# 102
도플갱어의 숲 (2)
처음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될…… 아니지, 안 되는 건 아니고 있으면 이상할 사람 중 하나가 데르킨 백작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왜 여기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데르킨 백작은 내게 권유했다.
“내가 누군지 확인했다면 그 무기 좀 치워 주면 좋겠군.”
“…….”
나는 단검을 다시 거둬들였다.
그러나 데르킨 백작과 함께 온 병사들은 검을 뽑은 채 노골적으로 나를 경계했다.
충분히 이해한다.
저들의 주인에게 무례하게 검을 겨눴는데 어찌 용서할 수 있으랴?
나는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병사들에게 전의가 없음을 드러냈다.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 미소도 지어 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매정한 사람들이네.
내가 잘못한 건 알지만 이쯤 했으면 용서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데르킨 백작이 수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이들은 다시 무기를 집어 넣었다.
한편 내 일행들도 소란이 벌어진 곳으로 다가왔다.
가장 먼저 드레인이 반응했다.
“어이쿠, 백작님 아니십니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다른 용병들도 얼떨결에 드레인을 따라했다.
베라만 빼고.
레이샤르는 데르킨 백작을 매섭게 응시하다가 마지못해 다른 용병들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레이샤르는 데르킨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나 본데?’
모르는 게 이상하다.
초중반에 등장하는 라스의 주된 적 아닌가?
라스의 편에 선 레이샤르는 데르킨 백작을 안 좋게 볼 수밖에 없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서는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아 보인다.
무의미한 싸움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데르킨 백작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자네들은 왜 이곳에 왔나?”
그러는 데르킨 백작은 왜?……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데르킨 백작 앞에서 말을 못한다.
왜냐하면 친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데르킨 백작이 준 임무를 성공시켰다면 아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준치까지 친밀도가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무려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져왔으니까.
그러나 나는 일부러 의뢰를 실패했다.
그랬더니 친밀도가 오르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조연급 캐릭터와 친밀도 올리는 게 쉽진 않으니까.’
나는 드레인에게 눈치를 줬다.
드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입을 열었다.
이제 척 하면 알아듣는 수준까지 온 건가?
“저희는 검은 괴물을…… 억!”
드레인의 정강이를 가볍게 차 버렸다.
내가 드레인을 너무 믿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큰일 날 뻔했네.
드레인은 ‘왜!’라며 억울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 틈을 노려 레이샤르가 말을 가로챘다.
“벨레너의 13난제에 도전해 보기 위해 왔습니다.”
“자네는 누구지?”
“마법사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중급 마법사, 페나트라고 합니다.”
“그렇군, 용병들은 도전 의욕이 항상 넘친다니까. 그 태도는 마음에 드는군.”
데르킨 백작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악당 녀석에게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우리가 검은 괴물을 쫓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데르킨 백작에게 알리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데르킨 백작은 틀림없이 알파를 노릴 테니 말이다.
레이샤르 덕분에 나는 한차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데르킨 백작은 병사들을 이끌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쪼록 여기서 무의미한 죽음은 맞이하지 않도록 하게.”
“예. 살펴 가십시오, 백작님.”
레이샤르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데르킨 백작을 배웅했다.
그제야 드레인은 내가 정강이를 걷어 찬 이유를 알아차렸다.
“백작에게 알파에 관한 걸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였어?”
“네, 극비 사항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미안, 내가 입이 너무 싸서…… 나도 모르게 말할 뻔했네.”
“제 덕분이죠?”
“어, 네 덕분이긴 한데…… 근데 왜 하필이면 정강이냐! 겁나 아프네! 이거 봐, 멍 들었잖아!”
“그런 건 파이스가 알아서 치료해 줄 거예요. 파이스, 새로운 임무다. 와서 치료해.”
“예! 대장님!”
힐러가 있으니 참 편하다.
부하를 마음 놓고 팰 수 있으니 말이다.
* * *
데르킨 백작이 도플갱어의 숲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레이샤르는 내쪽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데르킨, 그 자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도플갱어의 숲에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도 레이샤르 님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르킨 백작은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다.
괜한 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사람이 아니다.
그가 움직였다는 건, 아주 높은 확률로 이곳에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다.
그저 확률 문제일 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데르킨 백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다.
알파의 존재를 데르킨 백작에게 들켜선 안 된다.
만약 데르킨 백작에게 들킨다면 그는 틀림없이 알파를 데려가 자신의 수하로 삼으려 할 것이다.
‘일이 복잡해지네.’
아직까지 내 실력으로 데르킨 백작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레이샤르는 과연?
그래도 드래곤인데 데르킨 백작에게 쉽게 지진 않을 것 같다.
하나…….
‘칠흑은 드래곤을 뛰어넘는 존재니까.’
칠흑의 분신인 조각도 제대로 힘을 키우면 드래곤과 맞먹는 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다.
레이샤르는 그걸 잘 알기에 일부러 데르킨 백작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를 보낸 거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알파를 찾지 못했다.
알파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에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거 하나씩 팔에 차고 계세요.”
“뭔대, 이건.”
“여긴 도플갱어가 판치는 곳이잖아요. 우리들끼리 알아볼 수 있는 표식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하나 만들어 봤어요.”
풀잎들을 엮어서 만든 작은 반지였다.
에나에게 이런 손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파이스가 새로운 표식 방법을 알려줬다.
“대장님, 손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손등이 보이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예. 잠시만요. 남자가 손 잡는다고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요.”
파이스는 내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다이아몬드 같은 형태의 문장이 새겨졌다.
“이건 또 뭔데?”
“제가 임시로 새겨 넣은 표식입니다. 24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거죠. 아까 에나 씨한테 들었는데, 아군끼리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어서요. 그래서 저도 하나 남겨 드리는 겁니다.”
좋네.
이런 표식들을 가지고 있으면 도플갱어가 우리 일행 사이에 섞여도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우리가 방금 만난 데르킨 백작은…… 진짜인가?’
* * *
휴식을 마치고 다시 숲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20분가량 지났을까?
또 다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나는 경계심을 높였다.
그러나 일행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멈추라고, 좀.”
그제야 자세를 낮추고 걸음을 멈췄다.
학습 능력이 없냐, 이놈들은!
혹시 또 데르킨 백작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단검 대신 맨주먹으로 나서기로 했다.
수풀 안쪽으로 빠르게 들어선 나.
주먹을 휘두르기 직전, 상대방이 다급하게 외쳤다.
“스톱! 저희, 몬스터 아니에요!”
4인 파티로 구성된 젊은 모험가들이었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싸울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장비 상태로 봐선 이 사람들도 벨레너의 13난제에 도전하기 위해 온 용병들처럼 보이는데…….
‘근데 하나같이 전부 다 낡은 것투성이네.’
장비를 갖추려면 제대로 된 걸 갖췄어야지, 낡아 빠진 것들밖에 안 보인다.
남자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피터라고 합니다. 그쪽도 용병인가요?”
“네. 블루로즈단 R팀 대장, 로인입니다.”
“그렇군요. 블루로즈단이라……. 유명한 곳에서 오셨네요, 하하!”
피터와 내가 서로 자기소개를 나누는 동안, 내 일행들도 뒤늦게 합류했다.
피터는 내 일행들을 가리켰다.
“여기 계신 분들 전부가 다 블루로즈단입니까?”
“한 명 빼고요.”
“우와, 정말로요? 블루로즈단은 한때 저의 1지망이었던 용병 조직인데……. 아무튼 반갑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드레인, 에나 등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악수를 건넸다.
피터라고 했나?
붙임성이 좋은 남자처럼 보인다.
하나 반드는 피터와의 악수를 거절했다.
“당신에게서 죽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군.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혹시 도플갱어인가?”
반드가 이런 의심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여기는 우리 말고 믿을 자가 아무도 없다.
피터는 머쓱한 미소를 보였다.
“오해할 만도 하죠. 저희도 낯선 모험가들을 만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요. 하지만 저희는 도플갱어가 아닙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이들이 도플갱어인지 아닌지 증명할 방법은 많지 않다.
하지만…….
‘없는 것도 아니지.’
아까부터 자꾸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나는 피터에게 물었다.
“장비들이 굉장히 낡아 보이는데. 혹시 거기 있는 검 좀 꺼내서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예? 검은 왜요?”
“저희 쪽에 마이스터가 있거든요. 괜찮다면 정비해 드리려고요.”
드레인은 ‘마이스터가 어디 있어?’라고 태클을 걸려고 했지만, 나는 또 다시 정강이를 차 버려서 드레인의 입을 막아 버렸다.
파이스, 뒷일을 부탁한다.
피터에게 검을 건네받은 후에 나는 확신했다.
“너희들, 도플갱어지?”
“예? 그게 무슨…….”
“벨레너의 13난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20년도 더 되어 보이는 낡은 무기들을 들고 이곳에 왜 오냐? 딱 보니까 원래 장비를 소유하고 있던 자들을 죽이고 자신들이 모험가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나 본데. 내 눈은 못 속이지.”
그리고 확실한 증거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피터의 인물 정보창이다.
-인물 정보창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타깃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맞는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물 정보창은 말 그대로 ‘인물’의 정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무생물을 비롯해 식물, 몬스터 등. 등장인물로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는 인물 정보창이 뜨지 않는다.
인물 정보창이 뜨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종족이거나.
참고로 베라와 레이샤르의 경우에는 이종족 판정을 받기 때문에 고유의 인물 정보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피터는 인물 정보창이 없다.
그 말은 곧…….
‘몬스터라는 뜻이지.’
내 말을 듣자마자 놈들은 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피터의 눈이 변했다.
“눈치 빠른 녀석이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피터의 4인 파티와 똑같이 생긴 놈들이 우리 주변을 삽시간에 애워쌌다.
피터…… 아니, 도플갱어는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먹이가 되어라, 인간 놈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피터로부터 건네 받은 낡은 검을 움켜쥐었다.
콰직!
낡은 검은 두부처럼 바스러졌다.
“너희는 사냥하는 쪽이 아니야. 우리에게 사냥당하는 쪽이지.”
마침 근질근질했는데 잘됐다.
도플갱어 녀석들이 얼마나 강한지. 테스트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