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야밤의 추격전 (2)
검은 괴물이 하나가 아니다.
둘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아니지.
렉스 연구소 사건이 묘사된 부분을 다시 떠올려 봐도 딱히 검은 괴물이 ‘한 마리’라고 명시된 건 아니었다.
두 마리여도 이상하지 않다.
‘칠흑의 조각이 하나 더 있었나!’
샘플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한편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된 검은 괴물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천장을 뚫고 등장한 검은 괴물이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 사이에 내게 공격을 받았던 검은 괴물은 뚫린 천장을 통해 바깥으로 도망쳤다.
“이런 망할!”
최악의 경우가 완성되었다.
두 마리가 별개로 행동하면 그만큼 우리도 전력을 나눠야 한다.
“반드! 베라! 도망친 녀석을 쫓아!”
“대장은?”
“난 여기 남아서 저놈을 상대할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도망친 놈을 쫓는 걸 우선으로 해!”
한 마리라도 놓쳐선 안 된다.
렉스 연구소 사건의 재림을 방지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 순 없다.
반드와 베라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도망친 검은 괴물을 쫓아 움직였다.
새로 등장한 검은 괴물이 반드와 베라를 막으려 했으나…….
“네 상대는 나라고. 괴물 녀석아.”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빠르게 다가가 녀석의 복부에 발 차기를 먹여 줬다.
뻐어억!
둔탁한 소리가 났다.
살짝 뒤로 밀리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검은 괴물.
그러나 타격은 심해 보이지 않았다.
‘처음 상대했던 놈보다 이놈이 더 강하군.’
맷집의 강도로 알 수 있었다.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되면 잠식될수록 검은 괴물의 능력치가 상승한다.
개인차가 있지만, 잠식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즉, 내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앞선 녀석보다 먼저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되었다는 소리다.
“네가 소동을 일으킨 주범이냐?”
검은 괴물은 ‘크르릉’거리며 짐승의 소리를 냈다.
이 녀석도 잠식 2단계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검은 괴물의 팔이 변하기 시작했다.
팔을 낫 같은 형태로 바꾸는 검은 괴물.
그걸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사마귀라도 되는 줄 아냐?”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내 말에 화답하듯 낫 형태로 변형시킨 팔을 휘둘렀다.
웬만한 검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허리를 숙여 검은 괴물의 일격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내 대신 기둥이 ‘스륵’ 하고 잘려나갔다.
저 정도면 사람 하나 정도는 우습다는 듯이 두 동강을 내 버릴 위력이다.
그렇다고 쫄 내가 아니다.
‘그게 과연 나한테도 통할까?’
녀석은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하나 나는 팔에 마나를 잔뜩 두른 후에 공격을 막아 냈다.
팔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막혀 버렸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검은 괴물.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고!
-드래곤 클로 스킬을 사용합니다.
-스킬의 효과로 물리 공격력이 대량으로 상승합니다.
오른 팔을 가볍게 내지른 것만으로도 손쉽게 검은 괴물의 팔을 절단시켰다.
다른 한쪽 팔마저 잘라 냈다.
검은 괴물은 순식간에 무기를 잃어버렸다.
떨어져 나간 팔이 다시 몸통과 결합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는 합체 로봇의 합체하는 시간을 기다려 줄 만큼 여유 넘치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럴 생각도 없고!’
드래곤 클로의 능력을 덧씌운 오른 팔로 놈의 가슴팍을 노렸다.
푸슉! 푹!
검은 심장을 도려냈다.
왼손을 뻗어 검은 심장을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검은 괴물의 전신에서 갑자기 수십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무투 대회에서 상대했던 검은 괴물도 이와 비슷한 공격을 했다.
나는 검은 심장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죽을 거면 곱게 죽을 것이지, 어차피 넌 내 손에 뒈질 운명이라고!”
검은 괴물은 내 말을 무시한 채 난도질당한 가슴팍의 상처를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틈을 줘선 안 된다.
드래곤 클로의 효과가 남아 있을 때 녀석을 제거해야 한다.
달려들기 위해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검은 괴물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본인이 스스로 하반신을 잘라낸 게 아니었다.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였다.
털썩.
쓰러지는 검은 괴물의 뒤로 한 남자가 오른 손에 묻은 검은 피를 닦아 냈다.
“늦어서 미안하군.”
레이샤르였다.
“오셨군요, 레이샤르 님.”
“인사는 나중에. 우선은 놈부터 없애도록 하지.”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천하의 드래곤 님이 하라는데 해야지요.
잘려 나간 검은 괴물의 상반신을 발로 밟아 고정시켰다.
놈은 끝까지 발버둥을 쳤지만, 검은 심장을 도려내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레이샤르는 주변을 둘러봤다.
“한 마리뿐인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레이샤르도 칠흑의 조각이 두 개였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알면 진작 말 좀 해 주지.
“예, 나머지 하나는 지금 제 부하들이 쫓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알파인지 모르겠군.”
“코드네임을 정해 뒀습니까?”
“자네한테는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곳에는 모그 신전에서 가져온 칠흑의 조각 말고 하나가 더 있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미리 말해 주셨어야죠.
까딱 잘못했다가 제가 역으로 당할 뻔 했다니까요!
“먼저 온 샘플이 알파. 그리고 나중에 온 걸 베타라고 불렀지.”
“알파는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중급 마법사에게 들러붙어 있던 녀석을 떼어 내 가져온 거야. 그게 알파지.”
“예?”
내가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다.
“칠흑의 조각을 떼어 낼 수도 있습니까?”
“그런 거 같더군. 사실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알파를 발견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이런 떡밥이 존재할 줄이야!
칠흑의 조각을 떼어 낼 방법을 발견해 낸다면, 이야기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거다.
하지만 레이샤르는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진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 우리도 아는 게 별로 없어. 숙주로부터 칠흑의 조각을 떼어 낸 최초의 케이스니까. 그래서 알파를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하고 싶었던 건데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결과적으로 알파는 매우 중요한 샘플이라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든 놈을 포획해야겠군요.”
“가급적이면 사로잡는 게 좋긴 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파괴하는 수밖에. 괜히 알파 하나 잡자고 많은 희생을 낳을 필요는 없으니까.”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다.
레이샤르의 말에 나도 동감한다.
나는 뚫린 천장을 올려다봤다.
“제가 알파를 쫓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아닙니다. 레이샤르 님은 여기에 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직 구조되지 못한 연구원들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혹시 또 모르지 않습니까? 알파가 다시 이곳으로 올지도.”
칠흑의 조각은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 말대로 다시 연구소를 찾을 가능성도 있다.
레이샤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파는 자네한테 맡기도록 하지.”
“예, 가급적이면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천장을 뚫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숙주로부터 칠흑의 조각을 떼어 낼 수 있다라…….
‘엄청난 떡밥이야.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고 있어!’
제법인데?
카인, 다시 봤어. 이럴 줄 알았으면 1, 2권 재미없다고 때려치우지 말걸.
……이 후회는 지겹도록 했으니까. 그만하자.
* * *
막상 나오긴 했는데 어떻게 뒤를 쫓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 갑자기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새벽에 부는 찬기운의 바람과는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내 앞에서 작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급 바람 정령, 윈디아였다.
“베라가 보낸 건가?”
요정처럼 생긴 윈디아는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말은 못 하나 보다.
상급 정령들은 말을 할 수 있다고 듣긴 했는데.
윈디아는 본인을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다.
나는 윈디아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하급 정령이라 해도 바람의 정령이라 그런지 이동 속도는 나와 거의 맞먹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바야나의 성벽이었다.
‘이미 도시 바깥으로 도망친 건가?’
난감하다.
도시 안이라서 그나마 추적이 쉬웠는데 바깥으로 나가 버리면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만큼 수색 범위가 확 늘어나는 셈이니 말이다.
게다가 바야나 근처에는 숲으로 우거져 있었다.
여길 다 찾으려면…….
어휴, 절로 몸서리를 쳤다.
윈디아와 함께 이동한 곳은 절벽 끝이었다.
그곳에서 반드와 베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파는?”
“알파가 뭐죠?”
베라가 내게 역으로 물었다.
하긴 레이샤르에게 알파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용병단 중에서 나밖에 없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연구소에서 붙인 도망친 녀석의 코드네임. 어디 있는데?”
베라보다 반드가 먼저 반응했다.
절벽 아래를 가리키는 반드.
“심연의 끝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어.”
“……베라, 풀어서 설명해 줄래?”
반드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
베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숲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쫓으면 되잖아?”
“대장은 저기가 어디인지 모르나 보군요.”
뭔데?
사일런트 포레스트처럼 위험한 숲이라도 되나?
“저기는 ‘도플갱어의 숲’이에요. 들어본 적 있나요?”
“잠깐만.”
들어본 적 있다.
“……벨레너의 13난제 중 하나였지?”
“네, 맞아요.”
이런 빌어먹을!
많은 곳 놔두고 하필이면 저런 곳으로 도망치냐!
* * *
간밤에 바야나에서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지만, 이제 그것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었다.
나는 수사관 테일이 입원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건물 잔해에 깔렸던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테일이 앉은 상태에서 나를 반겼다.
“미안하군. 이런 상태로 만나자고 해서.”
“아닙니다. 그보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파이스라는 남자가 치료해 줘서 많이 나아졌어. 그 사람, 네 용병단 소속이지? 실력이 괜찮던데? 여기 병원 사람들도 보고 놀랐어. 만약 그 남자가 치료해 주지 않았더라면 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대.”
“파이스가 겉으로 보기에는 양아치처럼 생겼어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거든요.”
그래서 뽑았다.
실력이 있으니까.
병실 안에는 테일 혼자만 있었다.
레이샤르도 있을 줄 알았는데…….
들어 보니 테일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중이라고 한다.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테일은 다시 한번 후회했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보다 앞으로의 일이 중요합니다.”
난 테일이 왜 나를 불렀는지 알고 있었다.
“너에게…… 아니, 블루로즈 R팀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하고 싶어서 불렀어.”
예상대로다.
어디 한번 의뢰 내용까지 맞춰 볼까?
알파를…….
“……찾아줬으면 좋겠어.”
거 봐라, 이 정도면 내가 카인을 대신해서 대예언가로 활동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하지만 3권 이후부터의 내용을 모르니까 그냥 포기하기로 하자.
“알파는 우리 마법사 길드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샘플이야. 너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칠흑의 조각을 숙주로부터 떼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현시켜 줄 존재지. 어떻게 해서든 찾아와야 해.”
매우 힘든 의뢰가 될 것이다.
여태껏 칠흑의 조각을 포획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해야 돼.’
이 중요한 떡밥을 놓치면 안 된다.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