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불안한데? (2)
손바닥 크기만 한 검은 연기의 집합체.
나는 그걸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게 칠흑의 조각이라는 건가?’
숙주에게 들러붙지 않은 원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테일을 비롯해 사건을 담당하는 자들은 칠흑의 조각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인지 침착하게 대응했다.
“칠흑의 조각에서 떨어지도록.”
테일과 같이 파견을 나온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멀찌감치 거리를 벌렸다.
칠흑의 조각은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다.
숙주를 찾으면 바로 들러붙는다.
다시 떼어 낼 방법도 모른다.
적어도 소설의 1, 2권 내에서 칠흑의 조각을 다시 떼어 내는 방법은 나온 적이 없었다.
키메라 연구 샘플들을 보고 이곳에 혹시 칠흑의 조각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예상은 했는데.
‘너무 대놓고 있어서 놀랐어.’
아스랄로 벽을 만들 정도였으니 그만큼 숨기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설마 칠흑의 조각이 있을 줄은 몰랐다.
드레인은 칠흑의 조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게 칠흑의 조각이라는 거야?”
“예, 선배. 지금껏 저희가 상대해 왔던 검은 괴물이 저 녀석 때문에 나타나는 거예요.”
“소문은 무성히 들었는데 저렇게 생겼구나. 무섭다, 무서워. 저 녀석에게 잠식되기라도 한다면 나도 그 괴물 녀석들처럼 변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아무에게나 들러붙는 건 아니에요. 칠흑의 조각은 ‘적합자’로 인지한 대상만 숙주로 삼는다고 하더라고요.”
“적합자가 될 수 있는 기준이 뭔데?”
“그건 칠흑의 조각마다 달라요.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는 자라든지, 머리가 비상한 자라든지,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든지…… 몬스터만 좋아하는 취향을 지닌 칠흑의 조각도 있어요.”
말 그대로 중구난방이다.
칠흑의 조각은 각각 인격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
저것 자체가 생각하는 작은 생명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다.
테일은 마법사들에게 손짓했다.
“그거, 가져왔지?”
“예, 수사관님.”
‘그게 뭔데?’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법사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보온통 비스무리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때마침 라크스 공작이 우리를 대변하듯 물건의 정체를 물었다.
“그게 뭔가?”
“저희 마법사 길드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봉인구입니다. 칠흑의 조각을 가지고 이동할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든 거죠.”
“저걸 가져갈 텐가?”
“예, 여기에 놔두면 오히려 추종자들 때문에 위험하니까요. 언제 놈들이 다시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지. 근데 그걸 어디로 가져갈 생각인가?”
“칠흑의 조각에 관한 연구를 담당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흠, 그렇군.”
불현 듯 내 머릿속에 안 좋은 기억이 스쳤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인데.’
혹시나 해서 테일에게 물었다.
“어느 연구소입니까?”
“그걸 왜 묻나?”
“그냥 궁금해서요. 별 뜻은 없습니다.”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테일.
“원래는 비밀인데 그래도 저번에 네가 칠흑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알려 줬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알려 주지. 단, 절대로 다른 곳에 퍼트리고 다녀선 안 돼.”
“약속하겠습니다.”
“렉스 연구소라는 곳이야.”
설마 했더니 역시나였다.
소설 속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모그 신전에서 칠흑의 조각을 회수한 테일은 그것을 렉스 연구소로 이송했다.
그러나 1주일 뒤.
사건이 발생했다.
“수, 수사관 님! 크, 큰일 났습니다! 연구소에서 칠흑의 조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라고? 당장 비상소집령 내려!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전부 다 렉스 연구소로 보내!”
이것이 렉스 연구소 사건의 시작이다.
이건 말려야 한다.
“저기. 수사관 님?”
“또 왜?”
“혹시 다른 연구소로 옮기면 안 되나요?”
“이유는?”
“남자의 감이라고 할까요.”
“감 같은 소리 하네. 단감이 먹고 싶다면 선물로 보내 줄게. 그러면 됐지?”
“…….”
예상은 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말 한번 꺼냈다가 졸지에 단감 세트를 받게 생겼다.
이득은 이득인데…….
도리도리.
아니, 이득이 아니지.
렉스 연구소에서 탈출한 칠흑의 조각은 상급 마법사에게 들러붙게 된다.
잠식당한 상급 마법사는 렉스 연구소를 비롯해 연구소가 있는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제2의 파리마 사건이라 불릴 정도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기는 사건이 된다.
희생자만 하더라도 수천 명에 다다른다.
내가 그걸 빤히 알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겠나?
하나 막을 방법이 없다.
‘영 불안한데.’
가끔 이럴 때가 참 괴롭다.
미래를 아는 자만의 고충이다.
* * *
결국 칠흑의 조각은 렉스 연구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나는 무사히 라크스 공작의 호위(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임무를 마치고 다시 나울로 돌아왔다.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해서 렉스 연구소 쪽이 신경 쓰였다.
‘어쩐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 라비를 찾았다.
“라비 있어?”
“아, 대장님!”
낯선 얼굴들이 사무처를 대신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뽑은 사무원들이다.
라비의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죄다 여성만 뽑았다.
풋풋함이 느껴지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동시에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화장실이었다.
“금방 나오지?”
“아마도요.”
그럼 잠시 기다리기로.
1층에 앉아 시간을 때우면서 라비를 기다렸다.
마침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던 라비는 나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어머, 대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웬일이라니, 본부에 내가 있으면 안 돼? 그리고 인원 뽑는 거 맡겨 뒀더니만. 여성만 뽑았네.”
“성비 제한은 안 두셨잖아요.”
“책망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거야. 남자 사무원은 안 뽑아도 돼?”
“안 그래도 본부에 넘치고 넘치는 게 땀내 나는 남자들뿐인데, 하다못해 사무처라도 산뜻해야 하지 않겠어요?”
강한 설득력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말솜씨가 제법이네. 역시 사무처 최고참다워.
“근데 저는 무슨 일로 찾으신 거예요?”
“다름이 아니고 단원들 업무 현황을 표로 정리해서 나한테 좀 줄래?”
“네, 알았어요.”
“얼마나 걸려?”
“10분이면 돼요. 올라가 계세요. 커피라도 한잔 타서 같이 드릴게요.”
“땡큐.”
유능한 사무원을 둔 덕분에 한결 편하다.
정확히 10분 후.
똑똑.
노크와 함께 라비가 내 개인 사무실을 찾아왔다.
“여기요.”
“고마워.”
한눈에 보기 좋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2소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한가해 보였다.
“그런데 그건 왜요?”
라비는 궁금증이 든 모양인지 내게 이런 업무를 시킨 이유를 물었다.
뻔하지 않은가.
“일 시키려고.”
“의뢰 들어온 거 없잖아요?”
라비의 말대로다.
아직 우리에게 정식으로 할당된 의뢰는 없다.
“의뢰와는 별개의 일이 있을 거야. 2소대 제외하고 모든 단원들에게 내 말을 대신 좀 전해 줄래? 3일 뒤 바야나로 출정을 갈 테니까 준비해 두라고.”
“출정이요? 2개 부대를 데리고 갈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큰 볼일이라는 뜻이에요?”
“그런 게 있어.”
테일에게 렉스 연구소에 칠흑의 조각을 남겨 두면 안 된다고 계속 말해 봤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나름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치열한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각오를 단단히 해 두는 게 좋다.
* * *
렉스 연구소는 바야나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출정 장소를 바야나로 지정했다.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정 명령을 받은 용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드레인이 대표로 물었다.
“우리, 바야나 간다며?”
“네, 선배.”
“왜? 의뢰 들어온 것도 없다면서.”
“의뢰는 조만간 생길 거예요. 오늘부터 부지런히 달려야 하니까 일단 출발부터 먼저 하죠.”
“곧 들어온다고?”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해 봤자 믿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괜히 내 입만 아프다.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모르기에 나는 평소에 출정 명단에 자주 제외시켰던 베라조차도 이번에는 같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베라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평상시에는 어떻게든 베라를 안 데리고 가려던 양반이 웬일로 2연속 출정을 시킬까?
아마 속으로 그런 의심이 가득할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야나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숙소부터 잡았다.
바야나는 큰 도시인만큼 외지인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의 숫자 또한 굉장히 많았다.
방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숙소 하나를 골라 주인장을 불렀다.
터엉!
테이블에 제피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올렸다.
“1주일 동안 우리가 여기를 통째로 빌리고 싶은데.”
주인장은 주머니 안에 가득 담긴 금화를 보더니 곧장 나를 고객님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으로 숙소를 빌렸다.
그날 저녁, 숙소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내가 이끄는 대장 직속 소대원과 부대장인 드레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모였겠지?”
누구 빠진 이가 있나 눈으로 쭉 훑었다.
반드, 에나, 파이스, 베라, 그리고 드레인.
음. 다 있군.
근데 파이스의 상태가 이상하다.
“너, 벌써 한잔했냐?”
“옙, 대장님! 여기 술맛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이 녀석은 정말로 성직자 출신이 맞긴 한 걸까? 술, 담배, 여자를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파이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도박도 좋아하냐?”
“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대장님입니다! 마침 제가 요 근처에 있는 괜찮은 카지노 하나 알아 뒀는데 오늘 같이 가실까요?”
“아니, 난 됐어.”
안 좋은 건 다 하는 놈이네.
구제 불능이라는 단어는 파이스에게 사용하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핵심 인원들을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만간 이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거야. 그러니까 놀 생각만 하지 말고 24시간 출동할 수 있도록 항시 대기하고 있어.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 있지?”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대원들은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아무도 몰라? 선배도 몰라요?”
“나? 나야 아, 알지! 그 뭐시기냐…… 오초 대기?”
까먹었구먼.
“오분대기조입니다. 사건 발생하면 5분 이내에 바로 전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 두라고 소대원들에게 말해 두세요.”
“알았어.”
“근데 질문 있는데요.”
에나가 손을 들었다.
“저희는 누구와 싸우게 되는 건가요?”
적어도 싸울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려줘도 되겠지.
“검은 괴물이야.”
순간 이들은 헛숨을 삼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에 임했다.
“이 도시에 검은 괴물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을 접했어. 그래서 나에게 개별적으로 의뢰를 해 왔지. 검은 괴물을 제거해 달라고. 그 녀석을 없애지 못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거야.”
“그 검은 괴물이 어디 있는지 아나요?”
“알지.”
나는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렉스 연구소야.”
저곳에서 조만간 큰 트러블이 발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