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불안한데? (1)
우리가 모그 신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신단 주변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저기에 다수의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아직 덜 치운 사체도 굴러다녔다.
드레인은 그걸 보더니 몸서리를 쳤다.
“어휴. 끔찍하다, 끔찍해! 라바인 전투 때 이후로 이렇게 많은 사체들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네.”
“선배도 라바인 전투 때 참가했나요?”
“어, 후방 중에서도 후방이었지만. 그래도 후방도 난리가 아니었어.”
하긴,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였으니까.
후방이라 해도 안전 지역은 아니었을 거다.
가르시아는 참가한 적이 없다고 했다.
베라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라바인 전투를 경험한 사람은 나하고 드레인뿐이었다.
아니지.
라크스 공작도 포함시켜야 한다.
중요한 인물을 빼먹을 뻔했네.
라크스 공작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관계자로 보이는 인물과 잠시 깊은 대화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주변을 살피기로 했다.
‘여기가 모그 신전이란 말이지?’
소설 속에서 봤던 바로 그 명소……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여하튼 추종자들이 실제로 머물렀다고 알려진 바로 그 장소에 도착했다.
한마디로 이 장소를 표현하자면 딱 이거다.
‘음침하기 짝이 없네.’
사람 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다.
베라도 나와 같은 감상평을 들려줬다.
“여기는 소름 끼치도록 음침하네요.”
그녀는 인간인 우리에 비해 감각이 뛰어나게 발달되어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더 많이, 그리고 자주 접할 거다.
“어때? 주변에 뭐 감지되는 거라도 있어?”
혹시 추종자가 남이 있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러나 베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전 주변에는 수상한 기척이 안 느껴져요. 안은…… 글쎄요. 일단 들어가 봐야 알겠네요.”
한마디로 ‘우리는 언제 들어가?’라는 뜻을 담은 질문이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우리는 신전을 조사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라크스 공작을 호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다.
그러니까 라크스 공작이 움직이기 전까지 우리는 이곳에 무한 대기해야 한다.
잠시 후 라크스 공작은 대화를 마친 후에 우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이미 내 딸도 도착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군.”
“따님이라면 레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리오나가 여기에 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맞네. 잘 아는군.”
“얼마 전에 저랑 같이 용병 무투 대회에 나갔거든요. 최근까지 같이 있었습니다.”
“무투 대회라……. 그러고 보니 이곳 모그 신전 사건 때문에 무투 대회에는 신경을 못 썼군. 그 아이는 얼마나 올라갔나?”
“8강입니다.”
“저번과 같군.”
리오나의 작년 성적까지 알고 있는 건가?
역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라크스 공작다운 면모다.
“더 올라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도중에 기권하라고 말만 안 했더라면요.”
“기권? 왜 그리 말했나?”
“상대가 칠흑의 조각이었거든요.”
“허허…… 그랬군.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먼. 무투 대회에서 갑자기 칠흑의 조각이 나타나서 난동을 부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 칠흑의 조각을 제압한 게 자네였군.”
“예, 그렇습니다.”
“자네하고 라스 그 친구만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어.”
나와 라스를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엑스트라로서 주인공과 같은 위치에 올라선 것만으로도 참으로 영광입니다.
라크스 공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신전 안쪽으로 이동했다.
대부분은 리오나의 근황에 관한 것들이었다.
주로 라크스 공작이 질문을 하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대답을 해 주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동안 나는 고개를 여기저기 돌리면서 신전 주변을 살폈다.
신전 내부는 꽤 어두웠다.
중간에 라이트 볼로 실내를 밝히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암흑 천지였을 거다.
꽤 깊숙한 곳까지 도착했을 때, 레미가 우리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아버님! 어머, 로인 님도 같이 오셨네요?”
“안녕, 오랜만이야.”
나는 레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줬다.
레미는 신전 조사를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고수했다.
저런 차림이 취향인가?
드레스를 싫어하는 리오나와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라크스 공작은 레미에게 다가가 물었다.
“알아낸 건 있느냐?”
“아니요. 전혀요. 애초에 저는 이런 현장에 처음 와 보는 거니까요.”
“하긴, 그렇지.”
레미는 전략 전술에 뛰어난 책략가다.
그러나 칠흑의 조각 사건을 전담하는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대신 레미는 다른 인물을 추천했다.
“어쩌면 저쪽 사람들은 알고 있을지 몰라요.”
레미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테일, 그리고 레이샤르……가 아니라 페나트가 현장 조사를 나왔다.
마법사 길드 소속 수사관인 테일은 뒤늦게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라크스 공작님 오셨군요. 가만 옆의 친구는 어디서 많이 봤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하는 테일.
그가 답을 내놓기 전에 페나트가 선수를 쳤다.
“저번에 느와르 남작 수사할 때 봤던 로인 씨잖아요. 저희에게 칠흑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던 그분 말이에요. 벌써 잊으셨나요?”
“아! 그랬지! 몰라봐서 미안하오. 그런데 내가 존댓말을 썼나?”
“아니요, 말 편하게 했습니다.”
사실 나도 잘 기억 안 난다.
그래도 친해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나는 테일에게 일부러 말을 놓게끔 유도했다.
테일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미안해. 내가 요즘 깜빡증이 심해져서.”
“수사관님은 잠자는 시간을 좀 더 늘려야 해요. 잠도 안 자고 일만 하니까 젊은 나이인데도 벌써부터 그런 증세가 나오는 거잖아요.”
“시끄럽다. 보좌관 주제에 감히 잔소리냐? 넌 가서 물증들을 잘 옮기고 있나 확인이나 해.”
드래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인간이라…….
진귀한 장면이 펼쳐졌다.
이곳에서 페나트의 정체가 지식을 탐구하는 드래곤, 레이샤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나밖에 없을 거다.
레이샤르와 나는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짧게 목례를 했다.
페나트…… 아니, 레이샤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테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칠흑의 사건을 전담으로 하는 테일이 여기에 왔으니. 뭔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때마침 테일은 라크스 공작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보고했다.
“안쪽에 잠겨 있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저 안에 뭔가가 있을 거 같은데 좀처럼 문을 부술 수가 없더라고요.”
“자네의 마법으로도 안 되나?”
“안티 매직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마법 효과를 전부 무효로 만들어 버리죠. 그렇다고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서 문을 부숴 버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을 포함해서 벽이 전부 다 아스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스랄.
다이아몬드 이상의 강도를 지닌 광물로 알려져 있다.
아스랄로 만들어져 있다면 웬만한 물리 공격으로 파괴할 수 없을 거다.
마법도 안 통하고. 물리 공격도 안 통하고.
테일의 입장에선 굉장히 답답한 듯했다.
그때 라크스 공작은 내게 물었다.
“자네가 한번 해 볼 텐가?”
“제가요?”
“혹시 또 모르지. 자네의 힘이라면 아스랄 벽조차도 뚫어 버릴 수 있을지도.”
한번도 해 본 적 없는데.
테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 해도 맨주먹으로 아스랄 벽을 부수는 건 불가능합니다. 공작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한번 해 보는 거지. 도전하는 건 어차피 공짜니까. 어떤가, 로인. 해 보겠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여기서 ‘못하겠습니다.’라고 어떻게 말할까.
“예, 까짓것, 해 보겠습니다.”
간만에 힘 좀 써 볼까.
* * *
라크스 공작의 추천을 받아 나는 비밀의 방 입구에 도착했다.
혹시 모르니 주변 사람들에게 물러서라고 말을 전해 뒀다.
신전이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테일과 마법사들이 알아서 잘 해결해 줄 거다.
베리어를 발동하든 뭘 하든 어떻게든 해 주겠지.
나는 눈앞의 장애물을 부수는 데 집중하면 된다.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마나를 움직여 내 오른 주먹에 실었다.
그러자 테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청년, 마나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작은 목소리로 라크스 공작에게 속삭이는 테일.
그러나 내 귀는 꽤 밝은 편이었다.
귓속말이라 할지라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게. 나와 대련할 때에는 마나를 운용하는 모습은 안 보여 줬는데. 그새 성장했나 보군.”
사람은 본래 성장하는 존재 아닌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젖 먹던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빠각!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약간 금이 가긴 했지만, 벽은 멀쩡했다.
‘실패했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아쉬워하는 나와 다르게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아스랄 벽에 균열이……?”
“저 사람, 인간 맞아?”
“맨주먹으로 아스랄에 균열을 일으킨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네, 처음 봤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떤대?
아직 벽을 박살 낸 것도 아닌데.
다시 한번 더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부순다!’
심기일전하고 재도전에 돌입했다.
“으랴아아아아아아아아!”
기합을 내질렀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쩌저적!
아까보다 갈라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우수수 떨어지는 아스랄의 조각들.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생겼다.
부수긴 부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주먹을 연타로 후려쳤다.
그제야 사람 한 명 정도는 다닐 수 있는 구멍이 완성되었다.
“이 정도면 됐나요?”
“…….”
“…….”
일동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아직 부족한가?
말을 해야 알지. 나 참.
* * *
내 활약 덕분에 모그 신전에 감춰져 있던 비밀의 방이 드러났다.
안은 어두웠다.
테일은 빛 구체를 사방으로 띄우면서 안을 환하게 밝혔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서류들.
그리고 다수의 거대 시험관들이 우리들의 인상을 찌푸렸다.
가르시아는 침음을 흘렸다.
“키메라 실험까지……! 극악무도한 녀석들이군.”
오호, 이게 키메라 실험체인가?
시험관 안에는 듣도 보도 못한 생명체들이 잠들어 있다.
몬스터의 머리도 보이고, 팔과 다리를 해체해 따로 보관한 거대 시험관도 있었다.
‘추종자 녀석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자들이었네.’
이걸로 칠흑의 조각과 융합을 시켜 검은 괴물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커 보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칠흑의 조각이 있다는 뜻이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안쪽에서 조사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수, 수사관 님!”
“뭐야! 무슨 일이야!”
“저, 저쪽에……!”
조사원들은 다른 시험관과 유독 따로 떨어져 있는 시험관을 가리켰다.
그들이 놀랄 만도 했다.
시험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것.
그것을 보자마자 테일은 탄식을 내뱉었다.
“칠흑의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