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선수 입장 (7)
중간에 사소한…… 아니, 운영진 측에서 보자면 굉장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던 검은 괴물의 등장.
이 문제는 나와 용병들의 활약으로 인해 일단락되었다.
비록 결승전에서 터드가 검은 괴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래도 나는 무사히 녀석을 쓰러뜨렸다.
우승은 결국 내 차지가 되었다.
난장판이 되어 버린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나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사회자가 목청껏 외쳤다.
“용병 무투 대회 우승자! 블루로즈단 소속! 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이 사람, 말 늘어뜨리기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우승을 하긴 했지만, 우승 현장이라고 보기에 참으로 민망했다.
경기장 여기저기에 파손된 흔적이 즐비했다.
관중들은 겁에 질려 다 도망가 버렸다.
오로지 몇몇 용병들만이 남아 내 우승을 축하해 줬다.
아니, 그 많은 시련과 고난, 역경을 다 이겨 내고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축하 현장이 이게 뭐야! 말이 돼냐!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회자는 내게 우승 상금과 더불어 상품을 증정했다.
“벨라시오닉의 보물, 커튼 네클릿입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얻었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획득하자마자 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흡수 가능한 아이템이 존재합니다.
-아이템을 흡수하면 용신단의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너도 그동안 많이 배고팠나 보구나.’
틈도 안 주고 바로 이런 메시지가 뜰 정도라니.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벨라시오닉의 보물은 가루가 되었다가 다시 작은 환약으로 변했다.
꿀꺽.
아이템을 삼키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용신단의 레벨이 오릅니다.
-2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용언 마법(Level 1)’이 개방됩니다.
새로운 스킬이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 용언이라는 단어를 자주 보긴 했는데. 델리피나 전기에서도 가끔 언급된 적 있었다.
용언(龍言).
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가장 근접하다고 알려져 있는 용들의 언어.
용언은 말 자체에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스킬 내용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기로 했다.
-용언 마법은 스킬 레벨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이 증가합니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용언 마법은 세 개입니다.
-Kusan(복종하라) : 일정 범위 이내의 타깃 하나를 대상으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지속 시간은 30초. 용언 마법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지속 시간이 증가합니다.)
-Serpel(잠들어라) : 일정 범위 이내의 대상들을 잠재웁니다. 잠든 대상은 외부의 충격을 받으면 바로 수면 상태에서 깨어납니다.(수면 시간은 개개인마다 다르게 적용됩니다.)
-Azer(춤춰라) : 일정 범위 이내의 대상들을 5분간 강제로 춤추게 만듭니다.(지속 시간은 5분. 용언 마법 레벨이 올라갈수록 지속 시간이 증가합니다.)
‘복종하라’, ‘잠들어라’는 알겠는데. ‘춤춰라’는 뭐냐? 춤추게 만드는 걸 어따 써먹어?
살펴보니까 레벨은 용신단의 레벨에 비례하여 올라가는 것 같다.
이로써 용신단의 레벨을 올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용신단의 새로운 능력도 얻었고, 블루로즈단은 다시 한번 엘리트 용병 조직이라는 칭호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얻은 게 많은 원정길이었다.
‘그나저나 칠흑의 조각 녀석들은 갈수록 상대하게 까다로워지는 거 같은데…….’
추종자들의 심장을 모아 자신의 심장으로 재구성시키는 건 그야말로 ‘충격 of the 충격’이었다.
‘나도 확실하게 대비를 해 둬야겠어.’
용병 무투 대회도 끝났으니 나울로 돌아가면 다시 열심히 수련해야겠다.
* * *
나울로 다시 돌아온 나는 본사 로비에 무투 대회 우승 트로피와 깃발을 전시해 뒀다.
이로써 우리 R팀의 위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갔다.
그러나 위상이 올라간 건 좋은데…….
의뢰가 너무 많이 들어온다.
그 탓에 라비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장님! 사무원 몇 명 더 뽑아 주시면 안 되나요?”
“왜.”
“왜긴요! 업무가 너무 많잖아요! 가용할 수 있는 용병 인원은 거의 마흔 명이 다 되어 가는데, 사무원은 저 혼자예요! 이 정도면 인력 충원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지 않나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의 라비를 보니, 한때 출판사 대표님한테 제발 편집자 좀 더 뽑아 달라고 애원을 하던 내 모습이 절로 연상되었다.
‘나도 그랬지.’
좋아. 기분이다!
“알았어. 뽑을 게. 몇 명 정도면 괜찮겠어?”
“열 명이면 딱 적당할 거 같은데요.”
“오케이, 딱 두 명만 뽑자.”
“방금 열 명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솔직히 열 명은 너무 많잖아. 너까지 포함해서 딱 세 명이면 충분해.”
“너무해요, 대장님!”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내가 대표 자리로 올라가니까 확실히 마인드가 달라지는 것 같긴 하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말단 편집자일 때 술자리 가질 때마다 대표님의 뒷담을 어마어마하게 깠었는데…….
대표님의 심정이 뒤늦게나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뽑아 주셨어야 했어요.
결국 라비와 타협을 본 끝에 네 명을 추가 인원으로 뽑기로 했다.
라비도 볼멘소리와는 달리 이 정도면 굉장히 선방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바로 모집 인원 공고문을 작성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니, 내려가려고 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 대장님에게 의뢰가 하나 들어와 있어요.”
“나한테?”
“네, 대장님 특별 지목 의뢰예요.”
특정 대상을 지목한 의뢰는 다른 의뢰에 비해 의뢰 비용이 강하게 측정된다.
최소 2배 이상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잘 신청하진 않는다.
‘또 어디 돈 많은 사람이 신청했나?’
웨일 정도면 가능할 거 같다.
웨일은 곤란할 때가 있으면 자주 나에게 의뢰를 해 오곤 하니까.
“누군데?”
라비에게 의뢰인의 정체를 물었다.
‘잠시만요.’라고 대답한 라비는 수첩을 통해 바로 의뢰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라크스 공작님이요.”
“공작님이 나를?”
“네, 호위 임무라고 하던데요?”
라크스 공작 정도면 호위 병력이 없어도 충분히 혼자서 다닐 수 있는 사람 아닌가?
굳이 호위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라비는 의뢰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서류를 내게 전달해 줬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나는 라크스 공작이 왜 나를 불렀는지 알게 되었다.
향하는 장소가 문제였다.
‘모그 신전…….’
기억이 난다.
여기는 추종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는 라스 일행이 모그 신전에 있는 추종자들, 그리고 몇몇 칠흑의 조각을 퇴치한 에피소드가 짧게 묘사되어 나왔다.
라크스 공작이 모그 신전에 가겠다고 하는 걸로 보아선…….
‘이미 라스가 모그 신전을 다 정리하고 난 뒤인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추종자나 칠흑의 조각과 나름대로 많은 싸움을 벌였지만, 놈들의 주둔지에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각에 잠긴 나는 다시 라비를 호출했다.
“이번 의뢰, 받아들이겠다고 해.”
“대장님 혼자서 가실 건가요?”
“아니, 혹시 모르니까 몇몇을 더 데려갈 거야. 가르시아하고 드레인 선배. 이렇게 둘이 적당하겠어.”
부대장급은 다 데려가기로 했다.
이유가 있었다.
‘추종자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부대장급들은 알고 있어야 나중에 소대원들을 데리고 칠흑의 조각과 싸울 때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이런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그때, 라비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베라 씨는요?”
“베라는 왜?”
“요즘 대장님한테 엄청 삐쳐 있어요. 자기만 쏙 빼놓고 의뢰 수행하러 다닌다고요. 이번에도 베라 씨 빼놓고 가면 또 입이 삐쭉 튀어나올 텐데요.”
이제 슬슬 한계인가?
어차피 한번은 데리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라스 일행은 모그 신전 토벌 작전 이후, 다시 모그 신전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을 해 보기로 했다.
“잠깐만.”
나는 베르투 수첩을 꺼냈다.
뒤 페이지를 넘겨서 마일에게 현재 라스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문의했다.
답장은 바로 왔다.
-메일렛에 있습니다.
모그 신전이 위치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다.
“라비. 베라에게 전해. 이번에는 데리고 나가겠다고.”
“네, 알았어요.”
베르투 회원 자격증이 있으니 편하다, 이런 것도 다 확인할 수 있고.
‘앞으로 베라를 데리고 나갈 때에는 마일한테 먼저 확인을 받고 내보내야겠어.’
* * *
라크스 공작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
블루로즈단 소속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출정길에 오르게 된 베라는 이동하는 와중에 내 속내를 떠보기 위한 질문을 꺼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갑자기 저를 다 데리고 가겠다고 하고.”
“너무 안 데리고 나갔으니까.”
“저를 평생 안 내보낼 생각인 줄 알았는데요.”
“그럴 거면 너를 왜 채용했겠어?”
“하긴, 그러네요.”
내겐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용병이 필요한 거지, 고이 모셔 둘 용병이 필요한 게 아니다.
베라는 사정상 기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베르투와 마일이 있으니, 앞으로 자주 기용할 예정이다.
모그 신전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곳에 라크스 공작 일행이 머무르고 있다.
“오, 왔군.”
라크스 공작은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그러게. 음? 처음 보는 얼굴인데.”
라크스 공작의 시선은 베라에게 고정되었다.
가르시아나 드레인은 오며가며 가끔씩 봤었다.
그러나 베라는 처음 봤을 것이다.
“새롭게 제 R팀으로 합류하게 된 베라라고 하는 여인입니다.”
“하이 엘프 아닌가?”
“예, 맞습니다.”
“세상에! 하이 엘프가 인간 용병 조직에 몸을 담고 있다니…….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군.”
나도 처음 본다.
베라는 우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엘라시아를 찾는 것뿐이다.
말에서 내린 베라는 라크스 공작에게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장 핵심 질문을 꺼냈다.
“혹시 저와 같은 하이 엘프 여성을 본 적 없습니까? 이름은 엘라시아라고 하는데.”
“엘라시아? 그녀라면 분명……”
“어흐음! 엣헴!”
나는 목청껏 헛기침을 했다.
라크스 공작은 뜬금없이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사정없이 윙크를 날렸다.
남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윙크란…… 별로 좋지 않다.
그래도 라크스 공작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신호를 보낼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라크스 공작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음, 모르겠군요. 본 적 없습니다.”
베라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다른 병사들에게도 엘라시아의 행방을 물어봤지만, 그들도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라크스 공작은 목소리를 낮췄다.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군.”
“예, 그럴 일이 있습니다. 제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별것도 아닌 걸. 아무튼 혹시 모르니 병사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겠네.”
“감사합니다.”
베라를 데리고 다닐 때에는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귀찮아 죽겠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