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선수 입장 (6)
셋째 날.
대망의 무투 대회 마지막 날이 밝아 왔다.
원래 오늘 경기 일정은 딱 두 개만 잡혀 있었다.
결승전, 그리고 3, 4위전.
결승전에 앞서 3, 4위전이 먼저 치러지게 된다.
그러나 터드가 상대방을 떡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3, 4위전은 진행될 수 없었다.
어제 4강에서 터드를 상대했던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었다.
‘혼수상태라고 했나?’
이 와중에 어떻게 3, 4위전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결승전 딱 한 경기만 준비되었다.
결승전인 만큼 특별한 요소가 꽤 많았다.
그중 인상적인 것이 무대에 오르는 선수들을 집중 조명해서 소개시켜 준다는 거였다.
“청 코너! 블루로즈단 소속! R팀 대장을 역임하면서 그 유명한 벨레너의 13난제 중 하나를 클리어한 사내! 로이이이이이이이이인!”
쓰잘머리 없이 내 이름을 길게 늘어뜨렸다.
‘무슨 이종격투기 선수도 아니고…….’
그래도 사람들이 환호해 주니까 나도 손을 들어 화답했다.
‘음, 어제에 비해서 그래도 나를 반기는 관중들이 많이 늘었군.’
확실히 결승에 오른 것만으로도 내가 몸을 담고 있는 용병단 홍보가 많이 되는 듯했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홍 코너! 휠윈드 소속! 돌풍의 핵이라 불리는 남자! 특유의 잔혹함은 과연 결승전에서도 발휘될 수 있을지! 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드!”
드디어 ‘문제아’님께서 등장하셨다.
터드가 등장할 때에는 나에 비해 환호성이 크지 않았다.
화끈한 경기를 좋아하는 팬, 혹은 피를 좋아하는(?) 팬 일부가 터드를 응원할 뿐이었다.
선수 입장은 모두 끝났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이 서로 페어플레이를 다지는 악수를 나눈다.
악수를 주고받을 때 터드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기권하는 게 좋을 거다. 어제 그 녀석처럼 평생 병실 침대에 누워 지내기 싫다면 말이지.”
“배려심이 참 깊네. 하지만 머지않아 그게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잘 알게 될 거야.”
“용기가 가상하군.”
추종자라 해도 모두가 다 내 명성을 아는 건 아닌가 보다.
이래봬도 나름 칠흑의 조각들을 많이 없애 왔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터드에게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기로 했다.
거리를 벌린 뒤 심판의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번에도 터드는 롱 소드를 꺼내 들었다.
한 자루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또 한 자루가 튀어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삐이익!
드디어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나는 제자리를 지켰다.
이번 경기의 태마는 ‘응수’다.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달려들기보다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보고 자세를 달리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터드는 확실하게 테마를 가지고 나온 듯했다.
오로지 공격, 공격, 공격!
내게 빠르게 접근해 롱 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동작이 큰 공격인 만큼 피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놈이 노리는 건 1타가 아닐 터.
스릉!
왼손에서 롱 소드를 꺼내 들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1타는 시선 끌기용, 다시 말해서 어그로용이다.
진짜배기는 두 번째 롱 소드로 가하는 2타에 있다.
이걸로 녀석은 초반부터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해 왔다.
터드의 경기를 미리 관람해 둔 나였기에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사실 안 봤어도 나라면 충분히 대응했겠지만 말이다.
팔을 들어 올려 터드의 롱 소드를 막았다.
리오나의 공격을 팔로 막아 냈던 그 용병의 전술을 똑같이 따라한 것이다.
터드는 입맛을 다셨다.
“진짜 검이었다면 네놈의 팔 한 짝은 가져갔을 텐데.”
아니, 그래도 못 가져가. 왜냐하면 혹시 몰라서 마나를 팔에 두르고 막았거든.
설령 마나 보호대를 뚫는다 하더라도 내게는 용신단의 능력이 있다.
어지간한 물리 공격으로 내게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한다.
한동안 계속해서 치열한 공방이 오고갔다.
그 와중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해.’
여태껏 상대해 왔던 선수들과는 강한 편이지만, 내 객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여전히 약하다.
‘놈을 낭떠러지까지 몰아붙여 볼까?’
터드가 롱 소드를 휘두를 때를 정확히 노려 주먹으로 날을 가격했다.
빠각!
롱 소드의 날이 박살 났다.
터드가 당황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모조품이라 하더라도 강도는 실제 무기 못지않게 만들어졌다.
그런 무기를 주먹 한 방으로 박살 냈으니 당황할 만도 하다.
이틈을 노려 나는 왼 주먹을 뻗어 녀석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뻐어어억!
차진 소리와 함께 터드의 몸이 옆으로 크게 꺾였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구는 터드.
만약 녀석이 칠흑의 조각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한쪽 갈비뼈가 전부 으스러졌을 것이다.
“바닥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거 아니야?”
나는 일부러 도발을 했다.
이 경기에서 가지는 내 목표가 있다.
녀석의 정체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도록 만든다.
그래야 내가 놈을 죽일 수 있는 명분이 생겨난다.
터드가 인간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나는 터드를 죽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살인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니까.
터드는 영특하게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후우, 후우!”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끝까지 인간 폼을 유지했다.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면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렇다면 전략 수정이다.
이름하야…….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기 전법!
변신 안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끔…….
‘죽기 직전까지 패 주마!’
* * *
내 주먹이 녀석의 복부에 사정없이 꽂혔다.
이미 속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을 거다.
일부러 피를 보기 싫어서 내상만 계속 입혔다.
“커억!”
크게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터드.
그럼에도 끝까지 인간 폼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지가 대단하네. 무슨 의지의 한국인도 아니고.’
그래도 상관없다.
난 계속 패 버리면 되니까.
터드는 어차피 경기를 포기 못한다.
왜냐하면 벨라시오닉의 보물 때문이다.
한 경기만 따내면 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테니 경기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눈앞에서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긴 싫을 테니까.
“벨라시오닉의 보물은 내가 가져간다, 머저리.”
“네놈……!”
“싫다면 경기에서 이겨 보시든가.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 없잖아. 안 그래?”
으드득!
터드의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아하, 이래서 사람들이 도발이라는 걸 하는구나.
내가 도발과 함께 오른 주먹을 날리려 할 때 갑자기 터드의 팔 한쪽이 변형을 일으켰다.
터드의 팔이 검은 연기에 감싸이더니 검은 괴물의 팔로 변해 내 주먹을 막아 냈다.
사람들은 순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저, 저 사람 팔이 왜 저래?”
“검은 괴물이다! 검은 괴물 녀석이야!”
“도, 도망쳐!”
객석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터드는 인간 폼을 포기하고 괴물의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모습을 바꾸니 재생 능력도 올라갔다.
여태껏 누적시켰던 대미지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제야 본래 모습을 드러내네.”
“내가 칠흑의 조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군.”
“알다마다. 그래서 네가 본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죽도록 팬 거야.”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칠흑의 조각, 검은 괴물은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있는 놈들을 전부 싹 쓸어버리고 내가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차지하는 수밖에!”
세상일이라는 게 네 뜻대로만 풀리는 건 아니란다.
검은 괴물이 손짓하자, 객석에 잠복해 있던 추종자들이 난입하기 시작했다.
하나 나는 이미 대책을 세워 뒀다.
“리오나! 어제 내가 한 말, 알고 있지?”
“물론!”
리오나를 비롯해 블루로즈단 용병들이 추종자들과 맞서기 위해 움직였다.
다른 용병들도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모양인지 추종자들을 애워싸기 시작했다.
숫자상으론 용병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나 문제는 검은 괴물이다.
검은 괴물은 일당백이다.
용병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칠흑의 조각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녀석은 내 담당이다!’
나는 검은 괴물에게 접근했다.
검은 괴물도 나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인지 도망치지 않고 나부터 쓰러뜨리기 위해 움직였다.
부우웅!
검은 괴물이 팔을 휘둘렀다.
팔이 워낙 크고 두껍기에 팔 자체가 무기로 활용된다.
가볍게 놈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복부를 공략했다.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어 봤지만, 검은 괴물은 오히려 웃었다.
“이제 네놈의 공격은 안 통한다.”
“그런 거 같네.”
나는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검은 괴물로 모습을 바꾸면 재생 능력뿐만 아니라 근력, 체력, 이동속도, 방어력 등, 모든 스텟이 상승한다.
‘미니 용신단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용신단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아무리 검은 괴물이 강하다 할지라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드래곤, 벨라시오닉의 능력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변수가 있다면 지금 용신단의 레벨이 낮다는 점이겠지.’
그래도 터드를 쓰러뜨리는 데엔 크게 문제없다.
검은 심장만 노리면 된다.
다시 한번 터드의 앞쪽으로 파고들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체크메이트.’
오른손을 뻗어 녀석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손에 검은 심장이 들려 나왔다.
“커억!”
녀석의 입에서 검은 피가 새어 나왔다.
옷에 묻을까 봐 슬쩍 피했다.
‘비싼 옷이라고, 이거. 조심해.’
나는 미련 없이 검은 심장을 터트렸다.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녀석의 등에서 다수의 촉수가 튀어나왔다.
촉수들은 추종자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번에는 또 뭔 짓이야!”
촉수의 끝에는 추종자들의 심장이 들려 나왔다.
촉수들은 다시 회수되어 검은 괴물, 터드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뚫린 터드의 가슴팍에 새로운 심장이 연성되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헐…….”
진짜 말 그대로 ‘헐’이다.
설마 다른 사람들의 심장을 모아서 자신의 심장으로 재구성을 할 줄은 몰랐다.
칠흑의 조각이라는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더 내 상식을 뛰어넘어야 만족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터드는 키득키득 웃었다.
“나를 너무 얕봤군, 로인.”
“그러게. 인정할게.”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한 번 더 살아났으면, 또 죽이면 되는 거다.
그러나 터드는 아까와 다르게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했다.
“방금 전의 나와 다를 거다! 죽음을 거치면 거칠수록 강해지는 것이 생명의 법칙! 지금의 나는 또 한번 진화했다!”
확실히 움직임도 빨라졌다.
게다가 위력도 어마어마하다.
팔을 휘두를 때마다 경기장이 무슨 두부처럼 박살이 났다.
‘그래. 인정할게.’
하지만…….
“네가 죽는다는 건 변함없어.”
이미 내 손에는 녀석의 두 번째 검은 심장이 들려 있었다.
터드가 당황하는 기색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어느 순간에……?”
“세 번은 살아나지 마라. 귀찮으니까.”
꽈직!
다시 한번 검은 심장을 터트렸다.
혹시 이번에도 촉수들이 나와서 주변 사람들의 심장을 빼앗아가는 건 아닐까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한번 살아났으면 만족해야지.’
또 살아나는 건 눈치가 없는 짓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