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93화 (93/240)

# 93

선수 입장 (4)

다른 선수의 경기를 볼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나는 한참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하면 몰래 경기를 볼 수 있을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 들키게 될 것이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마침 나에게 딱 좋은 스킬이 하나 있었다.

이미테이션.

내 모습을 바꾸거나 혹은 타인, 사물의 모습을 바꾸게끔 만들어 준다.

원래 내 모습만 해당되는 건 준 알았는데 코드 002가 임시로 만든 나무판자 무덤을 꾸밀 때 이미테이션 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사물의 모습도 일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있어 보자.’

마침 근처에 빈 통이 있었다.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빈 통이었다.

나는 이것을 내가 앉아 있던 의자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에 통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얍.”

짧은 구호와 함께 빈 통은 앉아 있는 내 모습으로 변했다.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만약 살아 숨 쉬는 생물에 이미테이션을 걸었다면, 움직이는 모습까지 재현했을 거다.

‘이렇게 하는 수밖에.’

그다음은 내 차례다.

나는 뭐로 변신할까?

경기장을 아무런 문제 없이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신분이 되어야 한다.

‘진행요원이 좋겠어.’

진행요원들이 입고 있는 특유의 유니폼이 있다.

그것을 떠올리며 나는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변신했다.

대기실의 문을 열고 조용히 복도를 거닐었다.

마침 맞은편에서 다른 진행요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잠깐만.”

진행요원 중 한 명이 나를 불러 세웠다.

‘설마 들킨 건가?’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러나 진행요원은 다른 용무로 나를 불렀다.

“여기 있는 모조품 통 좀 옮겨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거든? 잠깐 도와줄래?”

“네! 바로 가겠습니다!”

들킨 줄 알았네!

휴, 다행이다.

* * *

본의 아니게 노가다를 뛰었다.

그래도 변장은 완벽한 모양인지 아무도 나를 로인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자신감이 붙게 된 나.

이대로 객석으로 향했다.

“잠시만요. 지나가겠습니다.”

진행요원인 내가 앞으로 나가겠다고 하자, 관객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 줬다.

행사 관계자의 특권을 멋대로 누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 크게 본다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일환이라고요.

이 정도는 용서해 주시길.

가장 앞쪽으로 향했다.

본선 무대 전용 경기장은 하나밖에 없다.

여기에 죽치고 있으면 나 말고 다른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을 볼 수 있을 거다.

첫 번째, 두 번째로 경기를 펼쳤던 선수들은 못 봤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8강 첫 번째 경기를 보면 자연스럽게 첫 번째, 두 번째 경기에서 이겼던 승자들을 다 볼 수 있을 테니까.

패자 중에서 추종자, 혹은 잠식 상태에 들어선 자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노리고 무투 대회에 참가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고 올라올 거다.

선수들이 하나둘씩 입장하기 시작했다.

‘자, 집중해서 한번 볼까?’

나홀로 수색 작전, 스타트.

* * *

16강 네 번째 경기는 트윈소드 대표로 나온 용병, 아이톤이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아이톤은 8강에서 나와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아이톤, 저 녀석은 그냥 실력 좋은 평범한 용병이고.’

이후에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다섯 번째 경기.

내가 아는 얼굴이 무대에 올랐다.

리오나.

그녀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커졌다.

특히 남성의 목소리가 유독 컸다.

첸버에게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리오나는 저번 경기에서 비록 우승은 못 했지만 여성 참가자로서 상당히 높은 성적을 거뒀다고 했다.

게다가 리오나의 미모는 매우 뛰어난 편이다.

예쁜 데다가 강하기까지 하다.

남성 팬들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 없었다.

‘실력은 많이 늘었으려나?’

라크스 공작과의 맨투맨 수련 이후로는 리오나가 전투를 펼치는 모습을 본 건 엘리미 사건 때밖에 없다.

그런데 그때는 상대가 마법사이기도 했고. 게다가 1대1도 아닌 1대 다수의 전투였다.

거기에다가 내가 워낙 빨리 002를 제압한 탓에 리오나가 제대로 실력을 펼치지도 못했다.

‘어디 한번 볼까?’

라크스 공작을 대신해서 내가 리오나의 실력을 평가해 주기로 했다.

리오나가 들었다면 아마 엄청나게 분노했겠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실력을 평가하냐고 하면서.

리오나도 자존심이 굉장히 높은 터라 화낼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조용히 관람하도록 하자.

상대방은 제법 강해 보였다.

구체적인 정보까진 모른다.

그러나 자세를 잡는 모습만 봐도 실력자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리오나는 자세를 취했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상대방은 리오나에게 빠르게 접근을 시도했다.

다루는 무기는 양날 도끼.

‘근접 파워 타입인가?’

힘으로는 리오나가 밀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교로 상대방을 눌러야 한다.

공격을 받아주는 척하면서 몸을 옆으로 뺀 리오나.

측면으로 돌아 들어가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후웅!

날카롭고 매섭다.

그리고 빠르기까지 하다.

그러나 상대방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무기를 들고 있던 팔을 옆구리 쪽으로 내렸다.

빠악!

남자의 팔에 레이피어 공격이 적중했다.

대담한 방어술이었다.

물론 무투 대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방어 방식이기도 했다.

‘만약 진짜 검이었다면 저런 식의 방어는 절대로 하지 않았겠지.’

그래도 머리 잘 쓴 거다.

이용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은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것도 싸움의 기술이다.

한편 리오나의 회심의 일격은 무의미한 공격으로 돌아가 버렸다.

때리긴 했으나, 상대방은 맷집이 꽤 강한 모양인지 아픈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타격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

‘약점을 공략해야지.’

휴즈가 알려 준 방식을 쓰면 된다.

인간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약점이 있다.

머리라든지, 명치라든지. 이런 곳들 말이다.

자, 리오나. 과연 어떤 약점을 공략할 거냐?

“…….”

리오나는 다시 검을 추켜올렸다.

남자는 리오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도발을 펼쳤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이런 무투 대회에 나오지 말고 귀족들 사교 대회 같은 곳에 나가서 괜찮은 남자 하나 골라잡고 아양이나 떠는 게 어때? 아니면 내가 상대해 줄까? 큭큭.”

“…….”

리오나는 침묵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상대방은 싸움에 꽤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저런 도발도 필요할 때는 필요하다.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만들면 이성적인 판단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번에는 오히려 앞으로 치고 나가는 리오나.

하지만 근접전은 남자가 바라는 전투 양상이었다.

그걸 오히려 리오나가 만들어 주고 있으니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남자는 양날 도끼를 가로 방향으로 부웅!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관중석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허리를 숙이며 공격을 그대로 흘려 버리는 리오나.

‘레이피어로 명치를 공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으나…….

리오나의 공격 패턴은 전혀 예상 외였다.

빠아아아아악!

있는 힘껏 발 차기를 날렸다.

어디로?

……남자의 급소로.

“끄아아아아아아악!”

남자는 비명을 질러 댔다.

양날 도끼고 뭐고 바닥에 내팽개치고 양손으로 사타구니를 감싼 채 바닥을 뒹굴었다.

나를 비롯해 경기를 지켜보던 남자 관중들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사타구니를 꾹 눌렀다.

‘남자의 고통……. 나도 잘 알지.’

그래서일까?

보는 쪽이 더 괴롭다.

리오나는 현명한 공격을 택했다.

남자에게 아주 직빵으로 드는 약점을 공략한 거니까.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향해 리오나는 비웃음을 날렸다.

“아양은 네가 훨씬 더 잘 떠는 거 같은데?”

나는 이번 경기를 보고 확신했다.

‘절대로 리오나를 화나게 해선 안 돼!’

* * *

리오나의 화끈한(?) 경기가 끝난 다음 두 명의 용병이 무대에 올라섰다.

이번에도 한 명은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용병 무투 대회 공식 미남인 얀이 경기장에 올라섰다.

그러자 여성 팬들의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아직도 난 이 소설 속 미남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잘생기지 않았나?

크흠!

반면 다른 한쪽은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인물 정보창을 살펴보기로 했다.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런!’

-터드

-인물 등급 : 엑스트라

-종합 능력 : A

-소규모 용병 조직, 휠윈드에 소속되어 있으나, 실상은 칠흑의 추종자 중 한 명. 현재 잠식 3단계에 들어서 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분명 추종자들이 스파이를 심어 놓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녀석을 내보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잠식 3단계라니.’

얀이 위험하다.

얀이 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얀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

바로 무식하다는 점이다.

무작정 힘만 내세우면서 싸운다고 잠식 3단계에 진입한 검은 괴물 녀석을 제압할 수는 없다.

약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쓰러뜨리기가 정말로 힘이 들 거다.

‘경기를 중지시켜야 하나?’

터드라는 녀석이 실은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되어 있다고 밝힌다면…… 아니, 그런다고 사태가 호전될 것 같진 않다.

잠식 3단계에 이른 칠흑의 조각은 영특하다.

녀석이 외형을 검은 괴물로 바꾸지 않는 이상, 마땅히 증명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내가 터드의 정체를 밝히면, 놈은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강제로라도 훔치려고 발악을 할 것이다.

‘터드 말고 다른 추종자들이 잠입해 있을지도 몰라. 그들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인질로 잡는다면, 처리하기가 골치만 아파지겠지.’

그렇게 되면 얀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친한 사이도 아니고, 재수없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아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진 않다.

하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망설이는 사이에 경기가 시작해 버리고 말았다.

“덤벼 보시지!”

얀은 기세등등하게 손짓했다.

‘생각해 보니 얀 저 녀석, 대회 규정 때문에 수수께끼 던전에서 사용했던 무기도 쓸 수 없잖아?’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터드는 얀의 도발에 응수하듯 바로 달려들었다.

무기는 무난하게 롱 소드.

그에 반해 얀은 워 해머였다.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터드의 일격에 얀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터드라고 했나? 실력이 제법이네! 듣자하니 무투 대회에는 처음 나왔다고 하던데.”

“말이 지나치게 많은 녀석이군.”

“왜, 말 많은 사람은 싫어?”

대답 대신 터드는 두 번째 일격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정확히 얀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얀은 워 해머를 이용해 롱 소드를 막아 냈다.

하나 터드는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또 다른 롱 소드를 꺼내 들었다.

‘두 자루였어?’

이건 나도 예상 못했다.

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 얀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커져라!”

그가 들고 있던 워 해머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터드의 회심의 일격을 튕겨 내 버렸다.

‘아니, 잠깐만……. 저거, 마법이야?’

볼 때마다 이해가 안 간다.

그러고 보면 수수께끼 던전에서 사용한 해머 무기도 크기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옵션 스킬이 붙어 있지 않은 아이템이었다.

이때.

-얀의 인물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 안 하고는 못 버티겠다.

바로 수락했다.

-얀

-인물 등급 : 단역

-종합 능력 : A

-신규 용병 조직, 스트레이트를 창설한 용병대장. 뛰어난 싸움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다. 욱하는 성격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다음 줄이다.

-벨라시오닉의 보물, 업다운사이징을 소유하고 있다.

-업다운사이징

-등급 : 레전드

-호기심 많은 마법사, 웨인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귀걸이 아이템. 손에 닿은 사물의 크기를 마음껏 키웠다 줄였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특수 옵션 : 사이즈 체인지

얀이 설마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어쩐지, 이제야 얀의 사이즈 변환 스킬이 어디서 온 능력인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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