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선수 입장 (3)
대망의 둘째 날의 날이 밝았다.
16강에 이름을 올린 용병들 중에서 유일하게 두 명의 16강 진출자를 배출한 용병 조직이 있었다.
바로 블루로즈단이다.
경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첸버는 우리에게 많은 칭찬을 들려줬다.
“역시! 우리 팀의 대장들다워! 아주 믿음직스럽구먼! 하하하!”
이럴 때에는 보통 첸버와의 친밀도가 올라가곤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첸버의 친밀도를 최대치로 올려 두었기 때문에 친밀도가 더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친밀도가 다시 내려가는 일도 있던데.’
아직까지 첸버의 친밀도에는 그런 변화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첸버에게 잘하긴 잘했나 보다.
16강에 진출한 용병 조직 중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은 딱히 없다.
얀 정도가 다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찾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칠흑의 추종자가 과연 있을까?’
어차피 본선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16강 선수들이 모두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는 오프닝 행사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때 확인해 보면 된다.
인물 정보창을 확인하면 그 사람이 추종자인지 아닌지, 혹은 잠식 단계에 들어선 존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대신 내가 그 사람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인지라는 건 간단하다.
외형 전체를 보고 있거나.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한 상세 정보를 알고 있다거나…….
시각적, 아니면 정보적인 측면에서 그 사람을 ‘인지’하고 있다는 판정을 받으면 인물 정보창을 볼 수 있게 된다.
단, 서면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대진표만으로 추종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본선 진출자분들, 슬슬 오프닝 행사 시작할 테니까 단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대기하던 16강 진출자들이 한두 명씩 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리오나의 뒤를 따라 곧장 나도 단상을 향했다.
올라가니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오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네. 이렇게나 많이 모일 줄이야.’
엄청난 인파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본선 무대가 펼쳐지는 경기장은 콜로세움처럼 경기장을 가운데에 두고 객석이 주변을 빙 에워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기 있는 용병 조직은 팬들까지 동원된 상태였다.
신규 용병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스트레이트를 응원하는 팬들이 꽤 많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스트레이트의 팬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든 피켓을 확인했다.
-얀 오빠! 이번에는 우승하세요!
-사랑해요 얀 오빠! 우유 빛깔 얀 오빠!
-우승은 무조건 얀 오빠 거야!
얀의 인기가 엄청났다.
호응해 주기 위함인지 얀이 손을 한번 흔들어 줬다.
그러자 여성팬들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이 녀석, 의외로 여자한테 인기 있는 스타일이네.
‘그렇다면 혹시 나도?’
내심 기대를 가지고 주변을 살폈지만…….
‘어떻게 단 한 명도 없냐.’
쳇.
실망 그 자체다.
이중에서 내가 제일 유명하다며!
벨레너의 13난제를 클리어한 사람이 나 밖에 없다면서 용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말을 귀 따갑게 들었는데 정작 객석에는 내 이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용병들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로 쳐야 하나. 힘이 쭉 빠지네. 나도 ‘우유 빛깔 로인 오빠’ 소리 듣고 싶었는데.
어디 보자…….
열여섯 명 중에 추종자가 과연 있을까, 없을까?
개개인별로 면밀히 얼굴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오프닝 행사가 내 의도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거기! 혼자 튀어나오지 말고 대열을 갖추고 나란히 서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나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얼굴 한번 본답시고 나 홀로 앞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던 게 진행요원들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추종자 찾기가 어려워지는데?
‘어쩔 수 없지. 경기를 일일이 관람하면서 직접 체크하는 수밖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 * *
오프닝 행사는 비교적 간단했다.
그냥 열여섯 명을 나란히 세워 두고, 이 사람이 누구누구다 소개만 하고 끝났다.
스트레이트의 얀이 발표될 때가 가장 환호성이 컸다.
리오나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다.
“얀이라는 사람, 인기 많네.”
“왜 인기 있는지 모르겠는데.”
“잘생겼잖아.”
쿨하게 인정해 버리는 리오나.
그 녀석이 잘생겼다고?
“그럼 나는?”
“뜬금없이 너는 왜 물어봐?”
“좋아, 알았어. 그럼 질문을 바꿀게. 내가 잘생겼어, 얀이 잘생겼어?”
“굳이 따진다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는 후자 쪽.”
오 마이 갓!
여기 사람들은 미의 기준이 대체 어떻게 되어 먹었냐?
절대로 질투가 아니다.
내가 얀보다 더 잘생겼다고 자부하는데!
어째서!
‘이해가 안 가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리오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대회에 집중해. 너, 앞쪽에 배치되어 있었잖아. 몇 번째지?”
“세 번째.”
“그러면 곧 다시 경기장에 서겠네. 미리 몸이라도 풀어 두는 게 어때?”
16강 대전 상대는 듣도 보도 못한 용병이었다.
사실 내가 아는 용병은 거의 없다.
얀이라든지, 게럴하고 럭키 딸꾹질 마법사, 바슬라 정도가 전부다.
‘그러고 보니 게럴하고 바슬라는 이번 대회에 참가 안 했나?’
두 사람은 트윈소드라는 용병 조직에 몸담고 있다.
안 나온 걸 보니 다른 사람이 대표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충분히 이해는 한다.
게럴이 실력이 좋은 건 아니고. 바슬라는 굳이 말할 가치가 없다.
트윈소드 용병은 딱 한 명 올라와 있었다.
만약 내가 16강에서 이기고, 트윈소드 용병도 이긴다면 그를 만날 수 있다.
‘기왕이면 트윈소드 용병이 올라오면 좋겠네.’
트윈소드가 어떤 용병 조직인지 궁금했다.
오늘 그 궁금증을 간접적으로나마 풀어 봤으면 좋겠다.
* * *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추종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출전자는 다른 선수의 경기를 관람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망할!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그전에 우선 내 경기부터 치르고 보자.
16강 경기를 치르기 위해 무대로 올라섰을 때,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뭐야, 살인은 금지되어 있던 거 아니었어?’
바닥에 흥건히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저기요.”
나는 진행요원을 찾았다.
“규칙상 살인은 금지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혹시 본선 룰은 다르게 적용됩니까?”
“아니요. 본선도 예선과 같은 룰이 적용됩니다. 살인만 안 될 뿐이지, 피를 보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내 앞의 경기가 엄청나게 치열했다는 것을 뜻하는 건가?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 출혈이라면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야?’
내심 궁금해졌다.
그전에 내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리오나가 내게 했던 충고 그대로였다.
우선은 우승을 위해 내 경기를 최우선으로 두는 게 좋다.
방심했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두 눈 뜨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대참사가 발생할 것이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 내야 한다.
상대방이 올라왔다.
체형은 굉장히 호리호리해 보였다.
‘용병으로는 안 보이는데?’
그러나 16강 본선까지 올라왔다는 건, 다시 말해서 실력자임을 뜻한다.
수백, 수천 개의 용병 조직에서 대표로 보낸 선수를 꺾고 올라온 남자다.
주의하도록 하자.
심판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준비 끝났습니까?”
“예.”
“언제든지.”
남자는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자신이 고른 무기가 어떤 건지 보여 주지 않았다.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경기 시작되면 다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붐과 동시에 경기 시작을 알렸다.
동시에 남자는 허리에서 수십 자루의 모조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얼추 알겠군.’
전투 스타일이 어떨지 대충 눈에 보였다.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로인이라 그랬죠? 과연 나의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오홍홍홍홍!”
웃음소리가 굉장히 특이한 녀석이다.
놈은 나에게 모조 단검들을 투척했다.
진짜 단검은 아니었기에 위협은 되지 않을 터.
그러나 도중에 문제가 발생했다.
단검 하나가 내 팔을 스쳤을 때였다.
스윽.
피가 한 줄기 주르륵 흘러내렸다.
‘뭐지? 모조 단검 아니야?’
하나 진짜 칼날처럼 내 피부를 베어 버렸다.
나는 어차피 모조 단검이라는 생각 때문에 대충 피했다.
그런데 도중에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설마?’
녀석이 던지는 단검 하나를 낚아챘다.
날을 만지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이거, 모조 단검이 아니잖아?’
진짜다.
모조 단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도색을 한 거다.
‘이런 치사한 짓을 하다니!’
여태껏 내가 만난 상대들은 그래도 반칙은 사용하지 않은 채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펼쳤다.
내가 압도적인 힘으로 너무 빨리 경기를 끝내 버려서 문제였지만.
그러나 이 녀석은 나를 건드렸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몸소 알려 주마!’
나는 녀석의 앞으로 빠르게 쇄도했다.
그러나 놈은 뒤로 수십 걸음 물러서면서 나와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나에게 이런 도발을 해 왔다.
“느려, 느려, 느려! 너무 느려 터져서 거북이인 줄 알았네!”
오호. 그렇단 말이지?
나는 자세를 바꿨다.
설렁설렁 봐주면서 하려고 했는데.
남자는 도발을 한 순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리게 된 셈이다.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계속 내게 진짜 단검을 날려 댔다.
“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딱 한 녀석뿐! 그 녀석이 누군지 압니까? 바로 당신의 부하, 스윙 나이프의 용병이었던 반드입니다! 그런데 반드가 아니라 당신이 나오다니! 크나큰 실수를 한 겁니다!”
“너 말이야,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용신단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것도 부족해서 두 다리에 마나까지 불어넣었다.
그러고는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놈은 내가 바로 코앞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쳐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헉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내가 말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내 위치를 알아차렸다.
“나도 반드 못지않게 빨리 움직일 수 있거든?”
여태껏 나와 대결을 펼친 상대방에게는 복부에 주먹 한 방이 통상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은 가중 처벌을 내리기로 했다.
얼굴에 한 방!
빠각!
남자의 고개가 크게 꺾였다.
바닥에 쿠웅!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크게 웅성이기 시작했다.
“저, 저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틀림없이 죽었어, 저건!”
안 죽어요. 안 죽는다고요. 걱정도 팔자네. 딱 죽기 일보직전까지 힘 조절하면서 때렸으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심판은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살인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조심히 하셨으면…….”
사과 받을 사람인 내가 오히려 경고 메시지를 받아서 바로 따지고 들었다.
“그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 주세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들을 건넸다.
“이거, 모조품처럼 보이지만 진짜 단검입니다. 만약 제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제가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출전자들 무기, 확실히 확인해 주세요.”
“이런, 죄송합니다.”
그제야 심판은 역으로 내게 사과했다.
그래그래, 좀 잘하라고, 이 친구들아.
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선수였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