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선수 입장 (2)
수수께끼 던전 때만 생각하면 아주 그냥 신물이 난다.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 얀 때문이다.
‘이 녀석 때문에 그때 당시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절로 떠올랐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얀 덕분에 나는 데르킨 백작의 의심을 피해서 몰래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로채는 데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얀 때문에 입에서 쌍욕이 나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얀 덕분에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참 모순된 이야기다.
얀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앉은 자리에 합석했다.
“블루로즈단도 이번에 무투 대회에 나온다고 하던데. 로인, 너는 당연히 나올 테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구?”
“왜 나는 당연히 나갈 거라는 식으로 말하냐?”
“너, 강하잖아.”
강함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인정받은 상대가 얀이라서 그런 걸까?
기분은 엄청 좋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데? 여기 계신 아가씨?”
맞은편에 앉은 리오나를 가리켰다.
얀, 이 녀석은 무식한데 촉은 이상하리만치 좋다.
“어, 참고로 너는 그냥 아가씨처럼 이야기를 했는데. 나보다 더 경력이 오래 된 B팀 대장님이시다.”
“아! 저번 대회에서 8강 안에 들었던 그 아가씨로군. 못 알아봐서 미안해.”
“…….”
리오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얀과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 같다.
하기야, 내가 리오나라 하더라도 같은 입장을 보였을 거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너도 나가냐?”
“당연하지.”
“스테로이드였나?”
“스트레이트! 적어도 용병단 이름은 좀 기억해 둬라, 무식한 녀석아!”
살다 살다 얀에게 무식하다는 소리를 다 듣디니…….
치욕적인 날이 되었다.
“아무튼 가급적이면 높은 곳에서 보자고. 블루로즈단의 명성도 있으니까 설마 예선에서 떨어지거나 그러진 않을 테고. 이번에는 적어도 4강까진 가야지. 안 그래?”
싸구려 도발을 해 온다.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아나.
“너야말로 예선에서 떨어지지 말고 착실하게 본선 무대까지 잘 올라 와. 이번에야말로 누가 위인지 확실하게 교육시켜 줄 테니까.”
“오, 그 패기……! 나쁘지 않네! 안 그래도 너를 노리는 용병 조직들이 굉장히 많더라.”
“나를?”
“모르는 척하지 마. 벨레너의 13난제를 클리어한 용병은 너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하아, 이놈의 인기는 진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너무 많아서 탈이다, 탈이야.
‘어쩐지 그래서 내가 갈 때마다 용병들이 나를 힐긋 쳐다보고 그랬구나.’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무튼 조심해. 용병들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는 어떻게 해서든 이겨먹으려고 들 테니까. 그럼 대회에서 보자고. 난 바빠서 이만.”
영양가 없는 만남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정보를 남겨 주고 떠나는 얀이었다.
용병들이 나를 노리고 있단 말이지?
‘심심하진 않겠네.’
오히려 재미있어졌다.
* * *
나와 같이 온 R팀 멤버들은 대회고 뭐고 다른 용병단이랑 주야장천 술 파티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파이스가 날아다녔다.
유흥에 강한 남자, 파이스.
‘왜 파문당했는지 알 거 같네.’
혹시 성직자 주제에 유흥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르시아는 묵묵하게 레임스와 술잔을 기울였다.
레임스는 술자리에서 ‘왜 저런 인격 파탄자 밑에 자네 같은 훌륭한 남자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가르시아는 나를 옹호했지만, 레임스는 끝까지 태도를 굳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본인이 술에 곯아떨어져 레임스의 등에 업혀 실려 갔다.
여기서 나는 레임스가 주량이 굉장히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투 대회가 열리기 전에 이러이러한 소소한 일상 에피소드들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용병 무투 대회 당일.
현장에 도착한 나는 가장 먼저 받은 느낌은 이러했다.
‘사람 겁나 많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 건 소설 속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가 절로 떠올랐다.
용병 무투 대회 관람 권한은 일반인들에게도 주어진다.
티켓만 구입하면, 경기장에 들어가서 용병들이 대전을 펼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람할 수 있다.
이걸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그만큼 우승상금 또한 매우 많다.
하나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다.
‘이번에야말로 용신단 레벨 좀 올려 보자!’
요즘 너무 정체되어 있다.
능력치를 올려 둬야 나중에 칠흑, 혹은 칠흑의 조각과 싸울 때 쉬워지지 않겠나?
무투 대회는 하루 만에 전부 다 치러지지 않는다.
첫째 날에는 예선만 하루 종일 진행된다.
둘째 날부터 본선 무대가 시작된다.
참고로 본선 무대는 16강부터다.
그리고 대망의 셋째 날에 3, 4위전, 그리고 결승전이 펼쳐진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비해 마지막 셋째 날은 경기 숫자가 얼마 없어서 오전 내에 다 끝난다고 보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목표는 하나뿐이다.
‘오로지 우승! 그것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어!’
우승자만이 벨라시오닉의 보물과 더불어 거금의 상금을 거머쥘 수 있다.
상금은 2억 5천 제피.
그러나 내겐 상금은 부수적일 뿐이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내가 차지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달려왔다.
‘그나저나 추종자 녀석들도 어딘가 숨어 있겠지?’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우승 상품으로 떡하니 노골적으로 나왔는데 추종자들과 칠흑의 조각이 이걸 안 노릴 리가 없다.
분명 놈들도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내가 우승을 차지하고, 보물까지 차지하면 그만이다.
나는 25조에 배치되었다.
리오나는 12조였다.
대표로 두 명씩 참가하긴 했지만, 용병 무투 대회는 1대1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간다.
팀전은 없다.
용병 조직당 두 명으로 숫자를 제한한 건 너무 많은 참가를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리오나는 레이피어와 꼭 닮은 모조품을 골랐다.
실제 무기를 사용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그럼 다녀올게.”
“이기고 와.”
“본선까지는 무난하게 진출할 거야. 너도 본선까지는 꼭 진출해. 엘리트 용병단이라는 칭호는 계속 유지해야 하니까.”
“알고 있어.”
괜한 걱정이다.
여기서 내가 본선에 떨어진다면 우승할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내 경기는 아직 한참 멀었다.
그래도 미리 가서 준비하고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25조 인원들이 경기를 펼칠 무대로 일찌감치 향했다.
내가 등장하자마나 주변이 크게 웅성였다.
“저 녀석이 그 로인이라는 놈이야?”
“뭐야, 소문으로 들었을 때에는 엄청난 베테랑인 줄 알았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잖아?”
“쟤가 정말로 벨레너의 13난제를 클리어했다고?”
“내가 보기에는 아닌 거 같은데…….”
고개를 가로젓는 용병들.
어딜 가든 매번 받는 오해였기에 크게 신경은 안 쓰였다.
내가 저들 입장이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변함이 없다.
일단 대진표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자.
‘해머풀에 소속되어 있는 리차딘이라는 용병이 내 첫 상대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누군지 모른다.
본 적도 없을뿐더러 관심도 없다.
근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드레인이 나를 찾았다.
“대장은 아직 경기 시작 안 했어?”
“조가 꽤 뒤에 위치해 있어서요.”
“25조? 가장 마지막 조네?”
“리오나는 어떻게 됐나요? 지금쯤이면 경기 끝났을 거 같은데.”
“지금 조별예선 결승만 남겨 두고 있어. 거기서 승리하면 바로 본선 직행.”
“그쪽은 빠르네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던데…….
‘나도 차라리 후딱 끝내고 숙소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
내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걸까?
진행요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25조 경기 시작할 테니 참가자 분들은 5분 뒤에 경기장으로 집합해 주세요.”
마침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25조에서 경기를 펼칠 용병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총 다섯 번의 경기를 펼쳐야 한다.
‘깔끔하게 전승으로 올라가자!’
그래야 덜 귀찮아질 테니 말이다.
조는 가장 마지막 조에 배치되었지만, 대전 순서는 내가 첫 번째였다.
경기장에 들어섰다.
나의 첫 상대로 배치된 리차딘은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 용병이었다.
“로인인지 노인인지 모르겠지만, 내 핵주먹을 맞고도 어디 무사히 서 있을 수 있나 지켜보겠다!”
“아, 그러셔?”
마음대로 해라.
듣자하니 리차딘이라는 용병은 주먹질에 꽤나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용병인 듯했다.
주먹 한 방으로 달려오는 황소를 일격에 쓰러뜨렸다나 어쨌다나?
근데 황소가 몬스터는 아니잖아?
그냥 동물이지.
심판으로 올라선 남자가 우리에게 주의사항을 일러 줬다.
“상대방에게 승리를 따내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 상대방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거나 두 번째, 상대방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면 됩니다. 대신, 살인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 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나와 리차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살인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리오나를 비롯해 무투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용병들은 본인이 평소에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닌 모조로 만들어진 무기를 사용한다.
나는 무기랄 것도 없었다.
맨주먹으로 놈을 상대할 것이다.
리차딘도 마찬가지였다.
“주먹 대 주먹의 대결이라. 좋군.”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리차딘.
심판이 호루라기를 붐과 동시에 리차딘은 기세 좋게 나에게 달려들었다.
비대한 덩치와 다르게 움직임은 굉장히 날렵했다.
몸놀림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굉장히 훈련이 잘된, 그리고 굉장히 실력이 좋은 용병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본선에 진출하고도 남겠는데?’
하지만 리차딘은 운이 안 좋다.
이유가 있었다.
‘하필이면 나를 첫 상대로 만나게 되다니.’
시작 전에 나는 속으로 리차딘에게 애도를 표했다.
* * *
경기는 상당히 싱겁게 끝났다.
리차딘이 내게 주먹을 날렸지만, 나를 맞추는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놈의 주먹을 여러 차례 흘려 버린 나는 오른 주먹을 쥐어 리차딘의 복부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헉! 하며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던 리차딘은 그대로 기절했다.
즉 전투 불능 상태가 된 것이다.
심판은 그대로 나의 승리를 선언했다.
첫 경기를 시작으로 나는 내리 다음 경기들을 치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 25조 조별 결승 경기.
창을 선택한 내 마지막 예선 상대는 화려한 스탭을 선보이며 나를 농락하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녀석이 농락당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나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고?”
“놀랄 필요 없어. 네가 너무 느려터진 것뿐이니까.”
스피드가 자신의 장기라고 소개했던 용병.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장기라고 내세우기에는 너무나도 수준이 떨어졌다.
가볍게 펀치 한 방으로 녀석을 기절시켰다.
“승자, 블루로즈단 로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혼 없는 고마움을 표현하며 나는 바로 경기장을 내려왔다.
지금 당장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숙소에 들어가서 빨리 샤워하고 자고 싶네.’
싸우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