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감춰 온 진실 (5)
웨일 덕분에 엘리미 연구소 관련 문제는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페튼과 엘리미 연구소가 숨겨 왔던 추악한 진실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페튼은 마법사 길드에서 영구히 제명 당함과 동시에 악명 높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출소일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없음……인가?”
나는 엘리미 연구소 사건 내용을 자세히 실은 소식지를 읽으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평생 수용소에서 썩어 갈 운명에 처하고 만 것이다.
델란은 아직 어떤 징계를 받을지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웨일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태를 들어본 결과, 페튼 못지않은 처벌을 받게 될 거라 예상된다.
소식지를 내려놓은 뒤 잠시 바깥 공기 좀 쐴까 하고 밖으로 향했다.
내가 있는 곳은 나울이 아니다.
엘리미 연구소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나울로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코드 002 때문에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여자야. 어떻게든 라스와 만나게 해야 해.’
코드 002는 현재 B팀의 보호 아래에 이곳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아직 코드 002의 처우는 결정되지 않았다.
웨일이 직접 코드 002를 보살펴주겠다고 했지만, 코드 002는 웨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솔직히 그 제안을 거절했을 당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웨일 상단의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코드 002는 라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코드 002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근처를 지키고 있던 레임스는 눈을 흘겼다.
“왜 또 와?”
“그냥 002의 상태가 궁금해서.”
“너, 그 여자한테 반했냐? 우리 대장한테 반한 거 아니었어? 설마 그세 바람피우려는 건 아니겠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002는 특별 관리 대상이라고. 그리고 위험한 인물이잖아. 어떤 상태인지 주기적으로 체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그건 우리 B팀이 하기로 했잖아.”
“이번 의뢰는 나도 같이 받았어. 그러니까 나한테도 아직까진 일에 관여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지. 안 그래?”
“…….”
논리로 나를 찍어 누르려고 하다니. 100년은 이르다고. 근육덩어리 녀석아.
우리가 밖에서 논쟁을 주고받을 때 마침 002와 리오나가 숙소 밖으로 나왔다.
“웬 소란이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장.”
리오나가 묻자 레임스는 대충 얼버무렸다.
연구소에서 탈출한 이후 002는 푸른 머리카락의 귀신에서 아리따운 미녀로 탈바꿈했다.
씻기고,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고, 그리고 멀쩡한 옷으로 갈아입힌 것뿐인데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역시 작중 히로인 후보다운 미모야.’
라스와 이어지는지 안 이어지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건 딱 2권까지였으니까.
아직 002와 친밀도가 부족한 터라 그녀에게 직접 말은 못 붙인다.
그래서 나는 차선책으로 리오나에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002가 저쪽 산에 올라가고 싶대.”
“저기는 연구소가 있던 곳 아닌가?”
“맞아.”
“왜 그곳으로?”
“글쎄…… 그건 이야기해 주지 않던데.”
그렇게 말하며 리오나는 002쪽을 슬쩍 바라봤다.
그럼에도 002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도착하고 난 다음에나 말해 주려나?
그녀를 혼자 보낼 순 없었기에 나와 리오나, 이렇게 둘만 002와 동행하기로 했다.
레임스도 가고 싶어 했지만 마을에서 대기 중인 용병들을 통제하려면 부대장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열 명이 넘어 가는 용병들을 전부 다 동행시킬 순 없었다.
그래서 레임스는 어쩔 수 없이 남아 있기로 했다.
연구소가 있던 위치는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다.
조금만 산을 타면 금방 도착한다.
연구소 안에 있던 모든 자료들, 그리고 설비들은 전부 사라졌다.
그런데도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
002는 연구소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계속 오르막길을 올랐다.
‘연구소에 들르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나와 리오나는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일단 잠자코 002가 이동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절벽이었다.
절벽 끝에 기다란 나무판자가 꽂혀 있었다.
002는 근처에서 꽃을 꺾기 시작했다.
한 송이, 두 송이…….
꽃다발을 만들어 나무판자가 꽂힌 곳 앞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나는 나무판자가 왜 이런 곳에 박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제나, 사일, 헤일라, 네이지 등등.
처음 보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누군지 알 것 같다.
‘백아홉 명의 아이들의 이름이겠지.’
이 아이들을 추모할 수 있는 마음씨를 지닌 사람은 연구소에서 오로지 딱 한 명뿐.
코드 002다.
이제야 나는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목격했다던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귀신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코드 002가 이곳을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 몇몇이 우연히 목격해서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이다.
리오나는 굳은 얼굴로 내게 속삭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번듯한 꽃다발이라도 사 올 걸 그랬어.”
지금이라도 사 오기에는…… 많이 늦겠지.
그래도 비슷한 건 할 수 있다.
“잠깐 실례 좀 할게.”
나는 002에게 양해를 먼저 구했다. 그런 뒤에 나무판자 위에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내가 지닌 스킬, 이미테이션을 발동했다.
그러자 허름하기 짝이 없던 나무판자는 멋들어진 묘비로 탈바꿈했다.
밑에는 002가 놓았던 꽃다발을 비롯해 다수의 꽃들이 묘비 주변을 감쌌다.
리오나는 무의식적으로 ‘……와!’ 하는 탄성을 자아냈다.
002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마법도 쓸 줄 알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해 주고 싶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소 친밀도를 달성하지 못해서 목소리가 안 나온다.
연구소에 강제로 납치당해 한평생 바깥세상의 빛조차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어린 영혼들.
그들을 위한 마지막 추모 정도는 그래도 화려하게 해 주고 싶었다.
002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오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리오나와 나는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002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기분인지 100퍼센트 공감할 수는 없다.
공감할 수는 없으나 이해는 할 수 있다.
잠시 후 리오나는 나와 리오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짧지만 002의 현재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002와의 친밀도가 소량 상승합니다.
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친밀도가 올랐다는 사실에 기뻐하겠지만…….
지금은 뭐라고 해야 되나.
어린 아이들에게 벌어진 비극적 결말 앞에서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 * *
이제부터 002는 자유다.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몸이 되었다.
리오나가 그녀에게 앞으로의 방향을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예요? 웨일 상단으로 가는 것도 거부했고, 어느 한 곳에 안착할 생각도 없다면서요.”
“당분간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어. 세상이라는 게 어떤 곳인지 궁금했거든.”
“혼자서요?”
“일행이 있으면 좋긴 하겠는데.”
“그렇다면 저희 용병단에 들어올래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에는 딱 제격인데.”
리오나의 기습 제안에 나는 몰래 헛숨을 삼켰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러나 002는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병은 되고 싶지 않아. 어디에 얽매이는 것 없이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싶으니까.”
“음…… 그렇다면 저로선 할 말은 없네요.”
리오나는 미련 없이 002 영입을 포기했다.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인재다.
002의 막강한 능력을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나도 내가 002를 데려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포섭했을 것이다.
용병단에 실력 좋은 마법사가 있고 없고가 매우 중요하다.
마법사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전략 전술 운영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002는 용병의 길을 포기했다.
그런 그녀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또 다른 길이 있었다.
“리오나.”
나는 그녀에게 귀를 좀 빌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참을 속닥인 뒤 리오나가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그대로 전해 주면 돼?”
“어.”
“알았어. 이번 의뢰는 너한테 신세진 게 많으니까. 솔직히 태클 걸고 싶은 부분이 많은데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 줄게.”
리오나는 002에게 다가갔다.
“당신처럼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는 모험가 집단을 알고 있는데. 괜찮다면 추천해 드릴까요?”
“그자들이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요. 로인의 말대로라면 문제없이 당신을 동료로 받아 줄 거라고 하네요.”
002는 나를 힐긋 바라봤다.
“저 사람…… 말할 수 있었어?”
“네.”
“근데 왜 내 앞에선 한마디도 안 하는 거야?”
“낯선 사람을 보면 말문이 막히는 특이체질이라고 하네요.”
“저주 같은 거야?”
“그건 저도 몰라요. 서로 친해지면 되긴 하는 거 같은데. 아무튼 저한테 대신해서 전해 달라고 하네요.”
002가 반드시 찾아가야 하는 인물, 그리고 반드시 만나야 하는 남자.
“라스라는 사람을 찾아가래요.”
“라스?”
“젊은 영웅으로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남자예요. 강하기도 하고요. 알고 있는 것도 많으니까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줄 거라고 하네요. 저도 예전에 몇 번 만나 본 적 있는데, 괜찮은 사람 같아요.”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한번 만나 볼게. 너희에게 빚을 진 것도 있으니까.”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었다.
라스와 002는 앞으로 계속 활약해 줘야 한다.
칠흑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라도.
* * *
웨일 상단의 도움으로 002는 라스가 있는 곳까지 바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002를 먼저 보낸 뒤 나는 다시 나울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B팀도 마찬가지였다.
챙겨 온 짐을 말안장에 싣는 싣고 있는데 때마침 숙소를 나온 리오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가려고?”
“어, 너무 오래 본부를 비우면 안 되니까.”
“본부라……. B팀도 하나 만들어 둘까? 너희 보니까 있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관리만 잘하면 좋아.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만약 정말로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그동안 쌓아 올린 노하우를 팍팍 전수해 줄 테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게.”
리오나가 이렇게 높은 평가를 할 정도면 내가 고안한 시스템이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서로 각자 갈 길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려던 찰나였다.
한 남자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거기 젊은이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아는 목소리였다.
매번 의뢰가 끝날 때쯤 나타나 뭔가 숙제 같은 걸 하나씩을 툭툭 던지고 사라지는 남자, 파랑새가 우리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왔대.
“추가 의뢰라면 거절할 겁니다.”
나는 미리 선을 그어 뒀다.
그러나 파랑새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의뢰는 아니고……. 조만간 큰 행사가 하나 있잖아. 리오나 대장은 기억할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슬슬 그 시즌이네요.”
뭔데? 나한테도 말 좀 해 줘.
“로인. 너는 모르지?”
알 리가 있나.
리오나는 파랑새가 우리를 찾아온 이유를 서명해 줬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용병 조직들끼리 모여 큰 무투 대회를 하나 열 거야.”
“무투 대회?”
처음 들어본다.
그런 게 있었나?
‘근데 나랑 그 무투 대회가 무슨 상관인데?’
관련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파랑새의 말은 없던 연관성마저 창조해 냈다.
“리오나 대장하고 로인 대장, 이렇게 두 사람을 우리 블루로즈단 대표로 내보낼까 하는데.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