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감춰 온 진실 (4)
페튼을 비롯해 이곳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을 싹 잡아다가 포박시켜 뒀다.
코드 002는 무표정으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처음에는 이들을 보자마자 바로 덤벼들 기세를 보였던 코드 002.
그러나 이제는 많이 침착해졌다.
코드 002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을 여기서 죽여 봤자 무의미한 복수일 뿐이니까.’
작중에서 코드 002는 어렸을 적부터 실험체로 이용당한 불쌍한 캐릭터로 나온다.
동시에 일찍 철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보기와는 다르게 꽤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레임스는 조용히 내게 다가오더니 불안함을 드러냈다.
“저 여자, 생각보다 얌전히 있는데…… 저대로 놔둬도 괜찮아? 언제 연구소 놈들을 다 죽일지 모르잖아.”
“안전장치가 되어 있으니까 괜찮겠지.”
“저 여자 능력이라면 금방 풀 수 있을 텐데.”
“근데도 아직까지 가만히 있잖아? 걱정 안 해도 돼. 코드 002는 그렇게까지 악독한 여자가 아니니까.”
“흠, 그렇군.”
레임스는 많이 불안한가 보다.
레임스뿐만이 아니라 B팀 용병들 전원은 코드 002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코드 002를 제압하려면 꽤나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 있는 전원이 몰살당할지도 모른다.
하나 코드 002라면 안심해도 된다.
내가 아는 소설 속의 그 인물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잠시 후, 페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일어났어?”
나는 페튼에게 다가갔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페튼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제는 거의 자동 반사 수준이네.
하긴, 내 목소리가 반갑게 들리진 않겠지.
“후회할 짓을 하는군.”
“우리가?”
“너희 아니면 누굴 말하겠나? 나는 너희의 의뢰인인다. 용병 주제에 의뢰인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나?”
“돈만 준다고 다 주인처럼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는 거 같은데 주인도 주인 자격이 있어야지. 우리 용병들에겐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돈이 100퍼센트는 아니야.”
한 99퍼센트 되려나?
1퍼센트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좋게 포장해 두도록 하자.
“최악의 용병단을 골랐군.”
페튼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나쁘다는 식으로 매도했다.
나는 도대체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하나다.
“네 뒤에 누가 있냐?”
흑막의 정체를 물었다.
그러나 페튼은 곱게 이야기해 줄 인물이 아니었다.
“나 혼자 자행한 일이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들이 기절한 동안 뒷조사를 좀 했어. 실험에 필요한 설비, 재료, 그리고 이곳 연구소 설립까지. 대대적으로 투자를 해 준 인물이 있더군.”
페튼이 숨기는 흑막의 정체.
그자의 이름을 내가 직접 언급했다.
“델란, 설마 처음 듣는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
정보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베르투의 정회원이다.
마일을 찾아 의뢰를 넣으니 필요한 것 이상의 정보를 죄다 알려 줬다.
그리고 델란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도.
페튼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델란 님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면, 이것도 알겠군. 내 뒤에…… 아니, 엘리미의 뒤에 ‘웨일 상단’이 버티고 있다는 것까지.”
물론 그것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웨일 상단이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웨일은 이런 반인륜적인 일을 자행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일이 벌어지면 크게 노할 성격이다.
페튼은 계속 이죽거렸다.
“웨일 상단이 나서면, 너 같은 녀석은 금세 묻어 버릴 수 있을 거다. 힘 위에 권력이 있고, 권력 위에 돈이 있는 법이니까.”
든든한 뒷배를 믿고 설치는 페튼의 모습에 코드 002가 먼저 반응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여 버리면 되겠네.”
코드 002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대로 페튼의 만행을 저지하지 못하면 자신처럼 고통받는 실험체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일단은 날 믿고 가만히 있기로 했던 코드 002였지만 상황은 페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본인이 나서기로 결심한 듯했다.
실제로 B팀 용병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블루로즈단이 유명한 엘리트 조직이라고 한들, 그보다 한 차원 더 위에 있는 웨일 상단과 맞설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페튼이 눈을 뜨기 전에 한 가지 조치를 취해 뒀다.
코드 002가 페튼에게 위협을 가하려던 찰나였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용병 하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지, 지금 밖에…… 웨일 상단이 와 있습니다!”
“뭐?”
“웨일 상단이 여길 어떻게?”
리오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리오나는 나를 바라봤다.
“네가 부른 거지?”
“맞아.”
“아까 잠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고선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이걸 위해서였을 줄이야…….”
원래는 웨일 상단을 부르기 위해 이곳을 비웠던 게 아니다.
사실은 마일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웨일 상단이 엘리미 연구소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나는 따로 웨일 상단과 연락을 취해 가급적이면 지금 당장 이곳으로 와 달라고 요청을 넣어 뒀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빨리 오긴 했지만……. 뭐, 아무렴 어때? 이런 건 빨리 처리할수록 좋은 법이니까.’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문제다.
연구소 안으로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하는 웨일 상단 관계자들.
페튼은 한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화식이 되었다.
‘저자가 델란인가?’
보다 확실하게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바로 인물 정보창이다.
-델란
-인물 등급 : 엑스트라
-종합 능력 : A웨일 상단에서 일하고 있는 간부 중 한 명. 웨일의 눈에 띄어 웨일 상단으로 스카웃되어 일하게 된 남자. 야망이 대단하다,
엑스트라라는 말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친밀도 올리려고 쌩쇼를 안 해도 되니 편하겠군.’
페튼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델란 님이 왔으니, 넌 이제 뒈졌다.’라는 의도가 강하게 풍겨 왔다.
그러나 문제는 델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남자였다.
“헉!”
“저 사람은…….”
“웨일이잖아?”
대상인 웨일. 그가 친히 직접 이곳까지 납시셨다.
설마 웨일이 직접 올 거라고는 예상 못한 모양인지 페튼의 얼굴은 다시 굳어졌다.
물론 델란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입니다, 웨일 님.”
“음, 이곳이 엘리미 연구소인가.”
“예, 그렇습니다.”
“예전에 왔을 때에는 한창 시설들을 짓고 있는 중이었는데 완공되고 난 이후로 몇 년이 흘렀지?”
“8년입니다.”
“8년이라……. 그동안 이곳에 너무 신경을 못 썼군.”
델란과 짧은 대화를 마친 웨일은 곧장 내게 관심을 돌렸다.
“자네가 나를 불렀다고 들었네.”
“예, 웨일 님. 바쁘신 와중에 제 무리한 청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의 부탁인데 당연히 와야지.”
내가 웨일을 호출했다는 말에 일동은 입을 쩍 벌렸다.
천하의 웨일을 직접 호출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온 웨일도 대단했다.
솔직히 나는 웨일이 이렇게 내 요청을 덥석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워낙 바쁜 남자니까.
그래서 대신 그의 아들들을 대리로 보내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래도 잘됐다.
대빵이 직접 이곳에 왔으니 대화하기 한결 편해졌다.
“엘리미 연구소에 대해서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예, 일단 이걸 봐 주시기 바랍니다.”
웨일은 내게서 그동안 엘리미 연구소가 감춰 왔던 추악한 진실을 담은 서류들을 다수 넘겨줬다.
웨일은 돋보기 안경을 착용하고서 내가 준 서류들을 꼼꼼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웨일의 표정.
델란도 마찬가지였다.
웨일이 침음을 흘릴 때마다 델란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마일에게 들은 정보가 있었다.
웨일은 엘리미 연구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
진정한 흑막은 바로 옆에 있는 남자, 델란이다.
그는 페튼과 몰래 결탁해 마법 발전을 명목으로 연구소에 막대한 투자금을 전달했다.
페튼은 이것으로 생체 실험을 진행해 왔다.
델란은 페튼이 반인륜적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이유는 뻔했다.
‘횡령이지.’
투자금의 일부를 델란이 빼돌렸다.
베르투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니 틀림없다.
‘그나저나 베르투 녀석들, 웨일 상단의 회계 장부 정보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한편 웨일은 그와 함께 이곳을 찾아온 간부에게 추가 자료를 요청했다.
“엘리미 연구소 투자금 내역에 관한 장부들을 전부 가져오게.”
그때, 델란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웨, 웨일 님. 이 건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하…….”
“자네는 입 좀 닥치고 있게. 말하면 말할수록 내 화를 돋우는 꼴밖에 안 될 테니까.”
“죄송합니다.”
이미 델란은 웨일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한번 의심을 품게 되면 그 의심이란 이름의 작은 불씨는 크나큰 화재로 번지게 된다.
지금의 델란으로선 진압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제공한 정보와 웨일 상단이 가지고 있는 회계 자료를 전부 직접 확인한 웨일.
그는 내 뒤에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미녀, 코드 002에게 향했다.
“그녀가 이곳에서 실험체로 이용당해 왔던 자인가?”
“예, 웨일 님.”
“…….”
웨일은 본인이 직접 휠체어를 끌고 코드 002에게 이동했다.
웨일 상단의 간부들은 위험하다며 웨일을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코드 002는 말없이 웨일을 응시했다.
웨일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나의 불찰로 인해 자네가…… 그리고 자네와 함께 이곳으로 끌려온 백아홉 명의 어린 아이들의 목숨이 무의미하게 사라졌군.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책임을 지겠네.”
“용서를 구하는 건가요?”
“아니.”
웨일은 고개를 저었다.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지. 비록 몰랐다고는 하나 내가 이끄는 상단이 저지른 일은 곧 내가 저지른 일이나 다를 바 없네. 그러니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책임을 지도록 하겠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
웨일은 역시 어른이다.
같은 상단을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서 웨일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배울 점이 많은 존재다.
웨일이 언급한 ‘책임’이라는 단어에는 페튼과 델란의 처벌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들을 끌고 가라. 머지않은 시일 내에 간부들을 소집해 징계위원회를 열 것이다. 그리고 델란, 나는 자네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또 신뢰했다. 하지만 이런 실망스러운 결과를 내게 보여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군. 내 신뢰를 배반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자네에게 몸소 알려 주도록 하겠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웨일 님!”
“끌고 가라!”
“예!”
이번 일의 배후이자 페튼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델란은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
델란을 잃은 페튼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
웨일은 페튼에게도 강도 높은 경고의 말을 남겼다.
“마법사 길드와 협업해서 자네가 지닌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하도록 할 걸세. 그리고 이번 일은 고이 넘길 생각이 없으니 각오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을 게야.”
페튼은 고개를 떨궜다.
추악한 진실을 감춰 오던 엘리미 연구소.
창대한 시작과 달리 그 끝은 매우 볼품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