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감춰 온 진실 (3)
실험체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그 누구도 입을 함부로 열 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엘리미가 마법이라는 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이로운 조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말로 이 눈앞의 여자가 실험체로 이용된 거라면…….
“상당히 큰 문제가 될 수 있을지도…….”
레임스의 말 그대로였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 실험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이건 만국 공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미는 이런 일을 자행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 건수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면 크나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근데 소설 속에서 이런 사건이 존재했나?’
사건은 아니지만, 짤막하게 언급되는 파트가 있었다.
라스의 일행으로 합류하게 될 여성 마법사의 에피소드가 이와 비슷했다.
어렸을 적에 어느 조직에 납치를 당해 강제로 실험체로 이용당하게 되었다고.
이후에 겨우 자력으로 탈출해 훗날 라스 일행으로 합류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주 짧게 언급된다.
‘설마……!’
그러고 보니 아직 푸른 머리의 여성이 어떤 존재인지 인물 정보창을 확인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못 붙일 정도다.
그렇다면 최소 단역 이상이다.
‘어디 한번 볼까?’
-코드 002
-인물 등급 : 주연
-종합 능력 : SSS
-어렸을 적에 엘리미라는 마법사 조직에게 납치를 당해 생체 실험을 당한 불운의 여성. 이름 없이 코드 002로 불리며 자라 왔다. 최고등급 마나 심장을 이식받은 탓에 강력한 마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정식으로 마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아직 본인의 마력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코드 002!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 여자, 라스의 동료야!’
게다가 인물 등급도 주연급이다.
설마 이곳에서 거물급 등장인물을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한편 코드 002의 폭탄 발언 때문에 리오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쩐다……?”
그녀가 고민할 만했다.
만약 푸른 머리의 여성…… 아니, 코드 002의 말이 사실이라면 리오나는 더 이상 엘리미의 편을 들어 줄 수 없다.
아무리 우리가 용병이고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다 한다 하더라도 대놓고 이딴 짓을 벌이고 있는 자들의 손발이 되어 주고 싶진 않았다.
그건 리오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뢰였더라면 진작 거절했을 텐데.”
후회가 묻어나오는 리오나의 말.
그녀뿐만 아니라 B팀 모두가 다 공감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서든 이 여자는 무사히 살려 보내야 해!’
라스 일행에서 ‘마법사’라는 포지션으로 훗날 많은 활약을 해 줘야 하는 주연급 캐릭터다.
여기서 이런 인재를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비록 소설 속 흐름이랑 다르게 될지언정.
코드 002가 어떻게 처분될지 모르는 상황을 이대로 지켜만 볼 수는 없다.
내가 나서야 한다.
“우리가 구해 주자.”
“구해 주다니. 누구를?”
나는 대답 대신 손으로 코드 002를 가리켰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하지만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사실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소설을 봤으니까……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나.
나는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하고서 방 주변을 수색했다.
방은 다른 방으로도 계속 이어져 있었다.
코드 002가 난동을 피운 탓에 중요한 서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흩어진 종이 몇 장을 집어 들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저 푸른 머리의 여자는 소설 속에서 라스 일행으로 나오는 코드 002가 맞다.
그녀뿐만 아니라 연구소에서 실험체로 이용했던 아이들의 신상명세서가 정리되어 있는 서류 파일을 찾아냈다.
원래 이런 중요한 자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코드 002가 갑자기 난동을 피운 탓에 미쳐 자료들을 숨길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나는 증거가 될 만한 자료들을 들고 리오나와 레임스에게 건넸다.
“확인해 봐.”
백 마디 말보다 한 개의 물증을 보여 주는 게 가장 확실하고 편하다.
서류 내용을 확인하던 레임스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찢어 죽여도 부족할 녀석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납치해서 이런 잔인한 짓을 하다니!”
“진정해. 무작정 날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리오나는 레임스와 다르게 냉정했다.
하나 그녀의 동공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는 신호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야 소설 속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코드 002의 말이 사실임을 바로 인지했지만 이들은 달랐다.
게다가 엘리미와 페튼은 의뢰인이기도 하다.
이곳까지 오기 전에 페튼은 분명 이런 내용들을 단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다.
배신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나는 리오나의 의사를 확인하기로 했다.
“어떻게 할 거야?”
“이번 의뢰는 파기야! 보수금 안 받아도 돼. 난 이딴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오나 대장님!”
레임스를 시작으로 다른 용병들 역시 파업 의지를 드러냈다.
이래서 내가 블루로즈단을 좋아한다니까?
그래도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지키려고 하는 곳이 바로 블루로즈단이다.
소설 속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잡은 직장이 블루로즈단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많이는 아니고 쬐금.’
자료를 다시 내려놓은 리오나는 코드 002에게 물었다.
“실험체로 이용된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죠?”
“없어.”
“네? 없다니요?”
“다 죽었어. 나 혼자뿐이야.”
“…….”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코드 002가 엘리미 연구소에서 탈출한, 그리고 실험체로 이용당한 자들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임을.
그러나 막상 이렇게 현실로 접하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자료들을 다시 모아 집어 들었다.
“가자. 여기서 계속 시간 끌고 있을 필요 없어.”
“어떻게 하려고?”
리오나에게 들려 줄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녀석들과 담판을 지으러 가야지.”
감춰 왔던 추악한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낼 차례다.
* * *
페튼은 출입 통제 구역에서 무사히 나온 우리들을 반겼다.
“오오! 무사히 생포하셨군요! 역시 블루로즈단 여러분들입니다! 명성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페튼을 보자마자 코드 002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모습을 보였다.
코드 002가 폭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챘다.
“긴히 이야기를 나눌 게 생겼습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시고, 우선은 저 여자부터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아주 지독한 마법사입니다. 언제 또 난리를 피울지 모르…….”
“저 여자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 이름이요?”
“예, 이곳에서 일하는 마법사라면 이름 정도는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은 우리에게 저 여자의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굳이 숨길 필요가 있었습니까?”
“…….”
“아니, 정정하죠. 이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하지 못했겠죠. 왜냐하면 저 여자는 코드 네임 002라 불리던 이곳의 실험체니까요.”
페튼의 얼굴이 구겨졌다.
처음에는 여러 개의 출입문과 방벽 시설이 있던 게 안전을 위함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안에서 벌이는 생체 실험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가만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에픽 몬스터, 그리고 드래곤만이 가질 수 있다는 마나 심장.
이 마나 심장의 힘을 인간에게도 강제로 적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을 반복해 온 곳이 바로 엘리미 연구소다.
총 백아홉 명의 실험체 중에서 유일하게 코드 002만이 마나 심장에 적응하여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마나 심장의 넘치는 마나를 다루지 못해 그대로 자멸해 버렸다.
만약 제2의, 제3의 코드 002가 나온다면, 이들은 분명 인간 병기로 활용될 것이다.
그들이 추종자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혹은 칠흑에게 잠식되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다.
내가 이들에게 요구할 건 우선 이거다.
“모든 진실을 다 밝히세요. 그리고 연구를 즉각 중단하십시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그러나 페튼에겐 이런 협박이 통하지 않았다.
“일개 용병 주제에.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은데, 좋은 말로 할 때 저 여자를 놔두고 꺼지는 게 좋을 거야.”
페튼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그래,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군.
“여자는 우리가 데려간다. 그리고 이 증거들도. 네놈들이 밝히기 싫다면 우리가 직접 밝혀내는 수밖에 없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페튼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둘씩 모여드는 마법사들.
이들의 시선에 살기가 묻어 있었다.
갑자기 B팀 용병들이 하나둘씩 주저앉았다.
“왜, 왜 이래?”
레임스도 마찬가지였다.
리오나는 어떻게든 버텨 내려고 이를 악물었다.
놈들이 수작을 부린 거다.
자리에서 일어선 페튼은 의기양양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봤다.
“너희의 움직임을 묶어 두기 위해 미리 이곳에 마법진을 설치해 뒀다. 중력 조절 마법이지.”
그 변이 고블린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마법인가?
마법은 우리들에게만 영향을 미쳤다.
코드 002도 무게감으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자를 끌고 가라.”
“예!”
페튼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들이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걸 두 눈 뜨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마법사를 발로 뻥! 차 버렸다.
쿵! 마법사는 뒤로 쭉 날아가더니, 벽에 그대로 처박혀 기절했다.
뒤이어 코드 002에게 접근해 오는 다른 녀석들도 똑같은 신세로 만들어 줬다.
“저 녀석!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말도 안 돼! 마법의 영향을 전혀 안 받는다고?”
받긴 받아.
단, 마법 저항력이 높아서 거의 안 받을 뿐이지.
“쳇.”
페튼은 혀를 차면서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놈의 손에서 매직 미사일이 다수 발사되었다.
수많은 매직 미사일들이 내게 접근했다.
다른 일행들에게 하나라도 새어 나가게 해선 안 된다.
용병들이 떨어뜨렸던 안티 매직 아이템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 일일이 매직 미사일 쪽으로 던졌다.
터엉! 퉁! 퍼엉!
매직 미사일들의 궤도를 전부 틀어 버렸다.
페튼이 다시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나는 빠르게 녀석에게 접근했다.
마법사를 제압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마법사 양반, 누구한테 주먹으로 맞아 본 적 없지?”
“요, 용병 따위가……!”
“그러는 너는, 마법사 따위냐?”
딱 봐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란 티가 난다.
난 화초 양반의 얼굴에 내 주먹을 선사해 줬다.
뻐어억!
페튼의 고개가 크게 꺾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페튼.
마음만 먹으면 주먹질로 머리를 터트려 버릴 수 있었으나 굳이 살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페튼을 지금 죽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엘리미 연구소가 저지른 만행을 밝힐 중요한 참고인이 될 테니까.
나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경고했다.
“네놈들도 뒈지게 맞기 싫으면 얌전히 투항해라. 내가 정말 미친 듯이 맞고 싶다고 생각허는 변태 취향을 지닌 놈이 있으면 미리 말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 줄 테니까.”
“…….”
마법사들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항복 의사를 드러냈다.
하여튼 주먹질을 해야 말을 잘 듣는다니까?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