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감춰 온 진실 (2)
앞을 향해 나아갈수록 음산한 기운이 가득 전해져 왔다.
레임스는 뒤따르는 용병들에게 주의를 줬다.
“진영을 갖춰라! 언제 어디서 녀석이 우리를 습격해 올지 모른다. 상대는 마법사니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지급한 안티 매직 아이템은 꼭 가지고 있어. 그것이 너희들의 생명줄이 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B팀 용병들에게는 안티 매직 효과를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하나씩 지급되었다.
리오나도 저번에 느와르 남작과 싸울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그 팔목 보호대 아이템을 수리해서 다시 들고 나왔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마법 방어 혹은 마법 효과를 무효로 만들어 주는 아이템 소지는 필수였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리오나는 슬쩍 내 쪽을 돌아봤다.
“정말 괜찮겠어?”
“뭐가?”
“안티 매직 아이템 말이야. 무상으로 지급해 준다고 했을 때 너는 거절했잖아.”
“나는 괜찮아. 그런 아이템 없어도 충분히 잘 버텨 낼 수 있거든.”
용신단의 패시브 효과 중 하나가 바로 마법 저항력을 자연스레 높여 주는 거다.
그래서 나는 굳이 안티 매직 효과를 지닌 아이템이 없어도 클래스가 높은 마법사와 충분히 겨룰 수 있다.
리오나는 이걸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를 걱정했다.
대신 전에 쓴 적이 있던 아이템을 받아 뒀다.
“이거 마법사에게도 효과는 확실한 거지?”
나는 작은 초커를 꺼내 들었다.
리오나에게 받은 아이템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오나.
“그걸 마법사한테 착용시키면, 일시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거야.”
“지속 시간은 어느 정도인데?”
“마법사의 능력에 따라 달라. 마력이 낮은 마법사는 몇 날 며칠까지도 가지만, 높은 마력을 지니고 있는 마법사는 10분…… 아니, 5분도 힘들 수 있어.”
“얼마나 강한 마법사인가…… 그게 관건이겠네.”
페튼에게 들었을 때에는 꽤나 마력이 높은 마법사라 들었다.
판타지 소설에서 대부분 사용되는 ‘클래스’라는 개념이 있다.
1에서 5클래스 정도가 보통 마법사에 속하고 6클래스부터 9클래스까지 고등 마법사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10클래스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만에 도달할 수 있는 신의 영역이라 불린다.
물론 모든 판타지 소설에서 사용되는 설정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봤던 판타지 소설들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 7, 8클래스 정도 되는 마법사려나?’
이곳 델리피나 전기에서는 클래스 개념이 없다.
초급, 중급, 상급으로 나뉘다.
그리고 극소수의 실력 있는 마법사가 마스터라는 칭호를 받는다.
마스터는 델리피나 대륙 내에서 딱 열두 명만 존재한다. 그래서 굉장히 유명하다.
‘분명 마스터는 아닐 터. 그렇다면 최소 상급이라는 뜻이겠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일단 녀석을 발견하면, 무조건 목에 초커부터 강제로 착용시킬 거다.
그러고 난 뒤에 대화를 시도하든 뭘 하든 할 생각이다.
앞서가던 레임스가 걸음을 멈췄다.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쥔 손을 보자마자 일동은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에 뭐가 있다는 신호인가?
‘저런 거 좋네. 우리도 나중에 R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신호 같은 거 만들어 둬야겠어.’
갑자기 탐이 났다.
여하튼 이건 나중에 본부로 돌아가서 상의해 보기로 하고…….
눈앞의 일부터 먼저 해결하도록 하자.
리오나는 바로 문 쪽에 몸을 기댔다.
수신호로 뭔가를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저들의 수신호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걸 잘 아는 모양인지 바로 내 근처에 있던 용병 하나가 수첩을 찢어 내게 건넸다.
-곧 돌입할 거라고 합니다. 준비하세요.
나이스 통역이다.
리오나는 손가락을 폈다.
셋, 둘, 하나.
Go!
문이 열림과 동시에 리오나와 레임스가 먼저 안쪽 방으로 몸을 날렸다.
나와 다른 용병들도 뒤를 따라 안으로 진입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짙은 어둠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겼다.
“…….”
침입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서 근처에 어떤 사물이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
어둠 때문에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을 무렵.
맞은편에서 강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엎드려!”
B팀 멤버들에게 소리쳤다.
동시에 나는 정면으로 튀어 나갔다.
바로 앞에 엄청난 마나 폭풍이 몰아쳤다.
마나 폭풍은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엄청난 강풍과 함께 몰아쳤다.
나는 마나 폭풍의 중심 덩어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흡!”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마나 구체를 박살 내 버렸다.
빠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나 구체는 빠르게 소멸되었다.
공격이 한 번만 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곧바로 다음 공격을 대비하려던 찰나였다.
우리 쪽으로 손을 뻗은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나뿐만이 아니라 B팀 용병들도 여성을 발견한 모양인지 침음을 흘렸다.
레임스가 여성을 보자마자 이런 말을 흘렸다.
“푸른 머리카락의 귀신……!”
* * *
엘리미 연구소 근처에서 자주 목격된다고 알려진 수수께끼의 존재.
푸른 머리카락의 귀신.
처음에는 인간형 몬스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좀 더 면밀하게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흰색 구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력을 불어넣은 뒤에 천장으로 구체를 던졌다.
구체는 천장에 달라붙은 뒤 빛을 뿜어내며 방을 환하게 밝혔다.
조명탄이었다.
동시에 푸른 머리카락의 귀신은 오른손으로 손 그늘을 만들며 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려 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녀석은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인간이다!’
다만, 굉장히 수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양 손목에, 그리고 발목에 쇠사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줄은 본인이 스스로 끊은 모양인지 절단된 상태였다.
옷은 낡은 원피스 한 장.
아니, 원피스라고 해야 하나? 그냥 천을 하나 몸에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뭐하는 여자야?’
아무리 봐도 연구원으로 보이진 않았다.
탈옥한 죄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범상치 않은 여자라는 거였다.
B팀 용병들은 바로 무기를 빼들었다.
“안티 매직 아이템을 꺼내! 저 여자가 우리가 제압해야 할 마법사다!”
리오나는 눈치가 빨랐다.
나도 리오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수상쩍어 보이는 게 너무 많았다.
‘일단은 제압부터 하고 생각하지!’
더 날뛰기 전에 우선 여성을 포박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바로 행동에 임했다.
“리오나, 레임스! 날 엄호해! 내가 저 여자의 목에 초커를 걸어 볼게!”
“네 녀석이 뭐라고 감히 나한테 명령질이냐!”
버럭 소리를 치는 레임스였지만, 리오나가 그의 말을 끊었다.
“로인의 말대로 한다.”
“예? 대장! 하지만 이건 우리 B팀의 의뢰인데…….”
“로인이 한 말 그대로야. 싸우기보다는 단숨에 여자를 제압하는 게 우선이야. 무의미한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이유는 나중에 들어도 충분해.”
“대장님이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애들아! 들었냐!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R팀 우두머리를 엄호해라!”
“예!”
나에게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레임스밖에 없다.
다른 용병들은 나를 메인으로 작전을 실행한다는 것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레임스랑 둘이서 따로 술이라도 한잔해야겠네.
그거 가지고 저놈의 꿍한 속이 풀어질지 말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성은 다시 한번 내게 마법을 날리려 했다.
그때, B팀 용병 둘이 측면에서 튀어나와 안티 매직이 걸려 있는 소방패를 들었다.
투웅!
나를 대신해 B팀 용병들이 방패막이가 되어 줬다.
“땡큐!”
푸른 머리의 여성이 다시 캐스팅에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리오나가 빠른 속도로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푸른 머리의 여성은 리오나의 접근을 눈치채고 캐스팅을 포기했다.
마법사가 시전하던 캐스팅을 포기해 버리면 답이 없다.
근접전에서 무기를 든 전사를 제압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푸른 머리의 여성은 내 상상을 뛰어넘은 능력을 보여 줬다.
오른팔에 마나를 감싸 리오나의 검을 막아 낸 것이다.
‘휴즈가 알려 준 방식과 동일해!’
마나를 몸에 둘러 무기처럼 사용하는 방식.
물론 이 방법은 휴즈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꽤 어렵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자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용신단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휴즈가 알려 준 방식을 그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푸른 머리의 여자는…… 글쎄.
푸른 머리의 여성은 왼손에 불덩이를 형성시켜 리오나를 향해 던졌다.
리오나는 안티 매직 효과가 걸려 있는 팔목 보호대로 불덩이를 막아 냈다.
퍼엉!
그래도 충격까지 막을 순 없었다.
리오나는 크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공중에서 무게중심을 잡은 후에 바로 착지에 성공했다.
역시 라크스 공작의 핏줄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B팀이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나는 편하게 푸른 머리의 여성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 가 아니라, 강제로 초커 착용하기!’
철컹!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여성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가녀린 목에 감긴 초커를 억지로 벗겨 내려 했으나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초커를 착용한 이상 마나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마력이 생각보다 강해! 아마도 거의 마스터 수준! 이거, 3분도 못 버틸 거 같은데?’
세이라를 제압할 당시에 사용했던 팔찌도 꺼내 들어 여성의 손목에 강제로 착용시켰다.
초커에 팔찌까지.
이렇게 두면 그래도 10분은 여성의 능력을 봉인시킬 수 있을 거다.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양손의 자유까지 잃어버린 여성은 나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그러나 마력이 실리지 않은 발길질은 내게 큰 위협이 되질 못했다.
나는 여성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니, 물으려 했다.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친밀도를 올리세요.
엥?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이 여자, 엑스트라 아니었어?’
오히려 내가 당황해 버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 나는 리오나에게 차례를 양보하기로 했다.
“저 여자한테 말이나 좀 붙여 봐.”
“네가 하려던 거 아니었어?”
“내 체질 알잖아? 낯선 사람 만나면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거.”
“아까 페튼이란 남자랑은 잘만 이야기하더구먼.”
“그 사람은, 그, 뭐라고 해야 되나……. 아! 예전에 내 옆집에 살았던 이웃집 아저씨랑 비슷하게 생겼더라고! 푸근한 느낌이 들어서 편하게 대화 나눌 수 있었던 거 같아.”
내가 생각해도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핑계였다.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던 리오나는 마지못해 포박 당한 여성에게 다가갔다.
“블루로즈단 B팀 대장 리오나입니다. 당신이 이곳 연구소 시설을 강제로 점검하고 농성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여성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리오나는 일단 그녀를 안심시켰다.
“무작정 당신을 저곳에 넘기거나 하진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의심 가는 게 많거든요. 그들은 당신이 이곳 연구소에서 거둔 성과를 독점하고 싶어서 이런 난리를 피우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리오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하긴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
눈앞에 있는 여성이 연구 성과를 독점하고 싶어서 욕심을 부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는 편이 좋아 보였다.
여성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녀석들의 말은 거짓말이야. 애초에 난 그자들과 동료도 뭣도 아니니까.”
“그럼 당신은 누구죠?”
“여기 있는 자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어.”
이윽고 여성의 입에서 그냥 흘려듣기 힘든 단어가 새어 나왔다.
“실험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