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감춰 온 진실 (1)
갑자기 들어온 긴급 의뢰.
이런 식으로 의뢰가 들어온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한데…….
‘이번엔 또 뭐야?’
타이밍 참 구리다.
안 그래도 카인을 사칭하는 가짜 녀석들 때문에 기분이 굉장히 언짢은 상황이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용병의 여유가 되지 못한다.
드레인이 이끄는 1소대는 우리가 크라켄 토벌을 나갔을 때 별도로 들어온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고, 크라켄 토벌 조는 오랫동안 바다에서 고생을 해서 내가 특별히 단체 휴가를 줬다.
지금 유일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대장인 나.
그리고…….
“로인 대장!”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한 여…… 아니, 하이 엘프인 베라가 기쁜 표정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급한 의뢰가 들어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저를 내보내 주시죠!”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네.
그보다 라비, 이 녀석!
내가 분명 의뢰 들어오면 나한테만 몰래 알려 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베라한테 의뢰 들어왔다고 몰래 정보를 흘려 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나는 몰래 한숨을 삼켰다.
“일단 의뢰 내용부터 확인하고. 어떤 내용인지 보고 나서 출전을 결정해야 하니까.”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용 인원이 지금 너하고 나밖에 없으니까. 만약 인원이 많이 필요한 의뢰라고 한다면, S팀이나 B팀에게 양보해야지.”
“…….”
베라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확인해 보고 알려 줄 테니까 일단 내려가 있어.”
“어떤 내용인지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방금 들어온 의뢰는 1급짜리야. 1급이 뭔지 알아?”
“의뢰에도 급수가 있나요?”
아니, 사실 없다.
급수니 뭐니 하는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베라를 의뢰에 내보내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뻥을 친 거다.
“1급은 대장만이 확인할 수 있는 의뢰야. 그러니까 내가 먼저 내용을 보고 난 다음에 결정할게. 오케이? 언더스텐드?”
“……알았어요.”
베라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기에 내 말에 반론을 가하지 못했다.
베라를 1층으로 돌려보낸 뒤 나는 의뢰 내용을 확인했다.
-소규모 마법사 조직, 일레미에서 마법 실험을 하던 도중에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쪽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할 것.
이것뿐이었다.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뭔데?’
의뢰서를 전달해 준 파랑새가 아직 1층에서 대기 중이다.
나는 파랑새를 다시 내 사무실로 호출했다.
“어, 대장. 왜?”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잖아요. 이 문제가 뭔데요?”
“그건 대장이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아.”
“말해 줄 수 없는 내용인가요?”
“어, 함구당했어.”
“…….”
뭐야? 정말로 1급 의뢰라는 게 존재했어? 난 그냥 뻥친 건데?
“가용할 수 있는 인력이 저 하나뿐인데요.”
“밑에 아주 우수한 인재가 있던데?”
“베라요?”
“어, 하이 엘프 아가씨. 용병 백 명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최강의 카드를 왜 안 사용하려고?”
“위험인물에, 문제아에, 트러블메이커거든요.”
“그래? 그렇게 안 보이던데?”
“겉보기에만 얌전하게 보여요. 아무튼 R팀은 저 혼자만 움직일 수 있어요. 그래도 돼요?”
“괜찮아. 첸버가 나에게 그랬는데, R팀은 자네 한 명만 와도 충분하다고 했어. 어차피 이번 의뢰의 메인은 B팀이 될 거니까.”
R팀에게만 들어온 의뢰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았어요. 저도 가겠습니다.”
“땡큐! 로인 대장이 힘을 보태 준다면 정말로 든든할 거야.”
일레미라는 곳에서 도대체 어떤 사고가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선뜻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 *
일레미가 보유하고 있는 마법 연구소는 도시 외곽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엔 혼자서 출전했다.
베라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대장의 결정을 번복할 만한 권한은 일개 단원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에는 꼭 데려가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긴 후에 나는 홀로 B팀과 합류했다.
“오랜만이야, 레임스.”
“너 혼자만 왔냐?”
“어, 든든하지?”
“전혀.”
농담으로라도 ‘네가 있어 진심으로 든든하다!’라고 말해 준다면 참 좋을 텐데…… 립 서비스라는 걸 모르네.
리오나는 기용한 용병들을 마지막으로 챙긴 뒤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그리고 미안해. 크라켄 토벌 때문에 한창 피곤할 텐데 도움 달라고 해서.”
“도움이라니?”
“사실 이번 의뢰, B팀한테만 들어왔던 건데 내가 특별히 첸버에게 R팀에도 의뢰 넣어 달라고 했어. 그래서 너희한테도 가게 된 거야.”
“이유는?”
“감이 안 좋아. 위험한 의뢰가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여성의 감이라는 건 무섭다.
가끔은 모든 계산과 예상을 뛰어넘을 때가 있으니까.
“그리고 들리는 소문도 신경이 쓰이더라고.”
“무슨 소문인데?”
“그곳에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귀신을 봤다는 주민들이 한두 명이 아니야. 어쩌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몬스터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보험 차원으로 너를 부르게 된 거야.”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귀신이라…….”
인간형 몬스터인가.
솔직히 일레미 연구소 관련 사건은 나도 아는 바가 없다.
소설 속에서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본 소설 속 1, 2권 내에선 푸른 머리카락의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은 없는데……?’
3권 이후부터 나오는 내용일까.
아무튼 그건 둘째치더라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
리오나는 용병들을 데리고 일레미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소 소장 정도로 되 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반가이 맞이했다.
“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페튼이라고 합니다.”
인물 정보창을 확인했다.
등급은 엑스트라.
대화를 나누는 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리오나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B팀 용병대장 리오나입니다. 엘리미에서 보낸 의뢰를 이번에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야말로 아무쪼록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외부에 새어 나가면 안 될 민감한 문제인지라…….”
“원하신다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제가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면야 정말 고맙겠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도 되나?
그래서 의뢰서에 일부러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면으로 증거를 남겨 버리면 안 되니까.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기에 이런 함구 부탁까지 해 오는 걸까. 궁금증이 절로 증폭되었다.
“따라오시지요.”
페튼의 뒤를 따랐다.
마법 실험 연구소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규모가 컸다.
어쩌면 내가 연구소라는 것 자체를 처음 접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는 데 몇 개의 문을 통과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철저하네.’
이 정도 되면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다.
마치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런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진다.
국가 기밀 프로젝트라도 진행하고 있던 걸까?
하나 엘리미는 국가기관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마법사 몇몇이 의기투합해 만든 마법사 조직, 엘리미.
오기 전에 이들이 어떤 집단인지 조사했다.
규모가 작은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이라는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곳이라고 기억한다.
그 기반이 된 곳이 바로 이곳, 마법 실험 연구소다.
겉으로 봤을 때에는 상당히 깔끔한 연구소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느낌은 점점 지워졌다.
내벽뿐만 아니라 바닥, 천장 등.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뭐지, 이건. 여기서 싸움이라도 벌어졌던 건가?”
근데 여긴 마법 연구소잖아. 실험하다가 폭발이라도 발생한 걸지도 모르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동하던 와중에 대문짝만하게 출입 통제 구역이라 적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딱 봐도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동시에 우리가 나설 차례임을 깨달았다.
페튼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쪽에 들어가시면 마법사가 한 명 있을 겁니다. 그자가 우리의 연구 시설을 모두 장악한 채로 농성 중입니다.”
‘농성? 뭐냐, 이 상황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그중 첫 번째를 레임스가 대표해서 물었다.
“여기는 마법 연구소 아닙니까?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대기 중인데 고작 마법사 한 명을 제압하지 못하다니요?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안에 있는 자는 다수의 마법사를 상대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마법사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유명한 마법사일 텐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그 정도 능력을 지닌 마법사라면 델리피나 대륙에서 이름 깨나 날랐을 마법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페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밝혀 드릴 수 없습니다.”
의심 게이지가 1계단 더 차올랐다.
다음, 두 번째 질문.
이번에는 내가 직접 물어보…… 려고 했는데, 리오나가 선수를 쳐 버렸다.
“마법사는 왜 이곳 연구 시설을 장악하고 있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농성 이유를 묻는 리오나였다.
나도 그걸 묻고 싶었는데 잘됐다.
페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구 성과를 혼자 독점하려는 것이겠죠.”
“그게 저 안에 있는 자의 요구 사항입니까?”
“그렇습니다.”
혼자 성과를 독점하고 싶다고 이렇게 연구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게 정상적인 방법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도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으려나?’
이 의뢰는 정식으로 B팀에게 들어온 거다.
나는 옆에서 보조 역할만 해 주면 되니, 리오나의 결정이 뭔지만 듣고 행동하면 되겠지.
리오나는 의심을 반복하는 것보다 행동에 먼저 임하기로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저 안에 있는 자를 제압하면 됩니까?”
“예. 그리고 몇 가지 당부드릴 말이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첫째, 저자가 하는 말을 절대로 귀담아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짓말에 굉장히 능통한 자입니다. 만약 저희가 저자를 제압하기 위해 당신들을 고용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온갖 거짓말을 동원해서 여러분들을 회유하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어떤 말을 해도 전부 다 무시해 버리면 됩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대화를 거부하라는 뜻인가.
평화의 시작은 싸움이 아닌 대화에서 비롯되는 건데……. 저 페튼이란 남자는 평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법사인가 보다.
“그리고 둘째. 꼭 살려서 제압해야 합니다. 사살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저희가 죽을 지경에 몰려도 말입니까?”
“예.”
“…….”
리오나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하기야, 나 같아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팀의 부하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살은 절대로 금물이라니.
그럼에도 페튼의 태도는 단호했다.
“괜히 비싼 돈을 들여 당신들을 고용한 게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무조건 지켜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노력해 보죠.”
리오나를 필두로 우리는 출입 통제 구역 안으로 접어들었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나는 리오나에게 다가갔다.
“두 번째 조건, 정말로 따를 거야?”
“아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는데. 나하고 부하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깟 돈이 중요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사살할 거야.”
평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리오나에게 많은 호감을 느꼈다.
성격 참 괜찮은 여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