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80화 (80/240)

# 80

크라켄 토벌 (1)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 보이는 베라.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지금 당장에라도 실전 투입을 노리는 베라인데, 굵직한 의뢰에서 그녀의 이름만 쏙 빼 버렸으니.

나 같아도 열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왜 저만 뺀 겁니까? 이건 의도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데요.”

“맞아, 의도적이야.”

“……네?”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내 태도 때문인지 베라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럴 때 역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면 된다.

그동안 용병단의 대장으로서 나름 경험을 많이 쌓아 왔다.

이 정도 클레임은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크라켄 토벌이 굵직한 의뢰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R팀 용병단 전원으로 이번 의뢰에 투입시킬 수는 없어. 내가 왜 1기, 2기 용병단을 뽑았는지 알아? 분업을 하기 위함이야.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일들을 소화할 수 있지. 너를 여기에 제외시킨 건 분업의 의미가 커. 그리고 너만 여기에 남는 거 아니야. 드레인하고 1소대도 여기에 남기로 했어. 그렇게 따지면 그들도 너와 같은 클레임을 걸어와야 하는데 가만히 있잖아.”

“…….”

“그리고 드레인과 1소대만 여기에 남겨 두는 건 불안해.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용병이 한 명 정도는 있어 줘야 하지. 그게 바로 너야.”

1, 2소대와 다르게 대장 직속 소대는 개개인의 능력이 상당히 출중한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반드, 에나, 파이스, 그리고 베라까지. 최정예 멤버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블루로즈단 전체로 따진다면 제나드가 이끄는 S팀이라고 보면 된다.

1소대, 그리고 대장 직속 소대 정예 멤버 한두 명.

이렇게 남겨 두면 내가 자리를 비워도 안심이 될 것 같다.

베라는 아까부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맞는 말이었으니까.

“네가 싫어서 출전 명단에 제외시킨 거 아니야. 그건 꼭 알아 줬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좋아.

슬슬 넘어오기 시작했다.

베라는 의외로 다루기 쉬운 캐릭터였다.

무슨 일을 할 때 그에 합당한 근거를 말해 주면 베라는 곧바로 납득했다.

무작정 떼를 쓰지 않는다.

이게 참 좋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좋아요, 이번만큼은 대장의 말에 따르도록 할게요. 하지만 다음번에는 저를 원정대에 포함시켜 주세요. 그리고 다른 멤버를 남겨 두면 되잖아요.”

“고려해 볼게. 하지만 장담은 못해. 상황에 따라 멤버 선정을 달리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건 네가 이해해 줘.”

고개를 끄덕인 베라는 사무실을 나섰다.

이것으로 베라 설득하기, 클리어.

사실 베라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다.

‘엘라시아와 지금 당장 만나게 할 수는 없어.’

주인공 일행들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활약을 해 줘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편해지니까.

* * *

3일 뒤, 우리는 다시 텐츠로 향했다.

드레인이 이끄는 1소대와 베라를 제외하고 나머지 R팀 멤버들이 총출동했다.

장관이 따로 없다.

한 부대를 이끄는 장군이 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니지만.’

이들을 이끌고 텐츠에 진입한 나.

항구로 향했을 때에는 이미 웨일 상단과 라스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라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해매는 엘라시아도 저기에 있다.

나는 미리 마스크를 썼다.

엘라시아에게 정체를 들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와 나는 나울에서 두 번째 인사를 나눴다.

그럼에도 마스크를 쓴 이유는 내가 라스 일행과 ‘말을 못해서’였다.

목 상태가 안 좋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 일부러 마스크를 착용했다.

라스 일행과 말 붙일 때가 오면 ‘갑자기 목 상태가 안 좋아져서…… 콜록!’ 이러면서 마스크를 착용하면 된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주인공 일행에게 말을 붙일 수 있을까?’

단역은 이제 조금만 호감을 얻어도 금방 대화를 나누는 단계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조연급 이상은 아직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었다.

“가르시아.”

“예, 대장님.”

“애들 데리고 짐 미리 옮겨 둬. 출항은 곧 있으면 할 거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동안 나는 웨일과 라스 일행에게 다가갔다.

“오, 자네 왔군!”

웨일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마스크는 왜 쓰고 온 겐가?”

“목 상태가 별로 안 좋은지라…….”

“이 친구, 하여튼 부끄럼도 많이 탄다니까.”

웨일은 내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오해하는 게 좋다.

개연성 시스템이니 뭐시기니 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한번 오해받고 편해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웨일과 인사를 나눈 후에 라스 일행과도 악수를 주고받았다.

라스와 함께 하이 엘프인 엘라시아, 아이템 헌터 카이딘, 그리고 엔드라까지.

이들은 총 네 명이었다.

엔드라는 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트리올의 사체를 미리 구입해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엔드라는 없었을 것이다.

“로인 님이라고 하셨죠? 이번 토벌 잘 부탁드립니다.”

엔드라는 예의가 바른 남자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나와 인사를 주고받는 걸 직접 접하니 감회가 새롭다.

하나 이것으로 라스의 동료들이 모두 모인 건 아니다.

‘아직 한 명 더 있을 텐데.’

유능한 여성 마법사가 후에 한 명 더 추가된다.

‘이름이…… 코드 002이었나?’

특이한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합류할 타이밍은 아닌가 보네.’

그녀의 합류 타이밍은 라스 일행들 중에서 가장 늦다.

게다가 지금 전개되는 이 소설 속 이야기는 나 덕분에 다른 흐름을 타고 있었다.

어쩌면 코드 002의 합류는 한참 뒤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합류하게 될 거다.

왜냐하면 그녀는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스의 연인으로 나올 예정이었지, 아마?’

썸 타는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었다.

물론 엔딩을 못 본 나로서는 코드 002가 히로인이라고 확정지을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다년간 쌓아 온 편집자의 소견으로 봤을 때에는 코드 002가 차후에 히로인의 위치를 차지할 확률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라스 일행과 한 명씩 모두와 인사를 나눈 후 출항 전까지 나는 출항 준비가 잘되어 가고 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혹시 여기서 뱃멀미하는 사람?”

사전에 미리 뱃멀미를 하는 인원들을 확인했다.

분명히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확인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뱃멀미 심해져도 책임 못 진다. 한번 출항하면 크라켄을 잡을 때까지 육지로 안 돌아올 생각이니까.”

“예!”

패기가 넘치는 단원들의 외침이었다.

믿음직스럽군.

역시 가려 뽑은 보람이 있어.

* * *

짐을 거의 다 실을 무렵.

항구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윽, 뭐야, 이 악취는!”

파이스가 코를 막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인원들도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악취의 출처는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자자! 하나씩 골라, 골라!”

과일 장수가 항구를 돌면서 선원들을 대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킁킁.

냄새를 추적한 결과.

과일을 가득 담은 수레에서 나는 악취임을 알 수 있었다.

“이보쇼, 냄새가 장난이 아닌데 과일들 썩은 거 아니요?”

나는 과일 장수에게 항의했다. 곧 중요한 일을 치를 선원들에게 썩은 과일을 먹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과일 장수는 오히려 나에게 역으로 물었다.

“당신, 외지인이지?”

뭐야, 어떻게 안 거지?

텐츠에 사는 사람들과 나울에서 온 우리들은 외견 차이가 없었다.

피부색도 똑같고, 말투나 억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지인과 현지인을 구분 짓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과일 장수는 내가 외지인임을 단번에 구분해 냈다.

떠보기 식이 아니었다.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

“어떻게 알았소?”

“딱 보면 알지. 메리안 냄새도 모르잖아.”

“메리안?”

“텐츠의 특산품이지. 냄새는 고약해도 맛은 기가 막혀. 잠깐만 기다려 보슈.”

과일 장수는 수레를 내려놓고 과일 칼을 꺼내 들었다.

이후에 파인애플과 비슷하게 생긴 과일을 들고 곧바로 손질에 들어갔다.

저게 메리안이라는 과일인가?

빠르게 손질을 마친 과일 장수는 내게 먹기 좋은 크기로 메리안을 잘라 건넸다.

“자자. 사양 말고 한번 먹어 봐. 츄라이, 츄라이!”

“……!”

정말 맛있을까?

의심이 가득 들었지만, 먹기 싫다는 감정과 호기심이 경쟁해서 호기심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냠냠.

메리안 한 조각을 입안에 털어 넣고 맛을 음미해 봤다.

“오오!”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생각보다 맛이 좋다. 훌륭하다.

“어때, 괜찮지?”

“의외네요. 시궁창 썩어 들어가는 냄새와 다르게 맛은 완전 반대일 줄은!”

“냄새와 맛의 크나큰 갭이 메리안의 매력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매력인지 모르겠지만, 맛 하나만큼은 인정한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 치자면 두리안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하네. 두리안, 메리안. 우연의 일치인 걸까. 흠.’

과일 장수는 내게 물었다.

“몇 개 사 갈 텐가?”

그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하게 답할 수 있었다.

“아니요.”

“뭐야, 맛 봤을 때에는 수십 개 사 갈 것처럼 하더니. 대답은 완전 다르네?”

“맛이 좋은 건 인정하는데, 냄새가 너무 독해요.”

외지인이 참아 내기 힘든 냄새다.

우리 R팀뿐만 아니라 라스 일행조차도 메리안의 독한 냄새에 혀를 내두를 정도니 다른 상선이라면 몰라도 우리 크라켄 토벌대가 탈 배에 메리안을 싣는 건 자제하고 싶었다.

외지에서 온 자들의 비율이 훨씬 많으니 말이다.

과일 장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선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들은 과연 메리안을 과연 살까?’

나는 부정적으로 답했지만, 다른 선원들에게 메리안은 인기 폭발이었다.

‘생각보다 잘 팔리나 보네.’

현지인들에게는 메리안이 인기 있는 과일인가 보다.

메리안은 현지인 비율이 높은 배에 주로 팔렸다.

토벌 끝나고 나중에 다시 텐츠로 돌아오면 하나 사 가야겠다.

가서 드레인에게 ‘선물입니다, 선배.’라고 말하고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 * *

모든 인원들이 승선을 마쳤다.

배에 오른 이들은 우리 R팀 멤버들과 라스 일행, 그리고 선장과 선원들이었다.

선장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스스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소. 이 배의 선장을 맡고 있는 카를이라 하오.”

“블루로즈단 R팀 대장, 로인입니다.”

“라스입니다.”

양 팀의 대장들이 대표로 선장 카를과 인사를 나눴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30대 후반의 선장, 카를은 우리에게 딱 한 가지 양해를 구했다.

“이래봬도 내가 배를 굉장히 거칠게 운행하는 사람이라서……. 혹여나 배가 많이 흔들거려도 이해해 주시 바라오.”

“알겠습니다.”

어차피 뱃멀미를 안 하는 인원들로만 추슬러서 배에 올랐다.

거칠게 배를 몰아도 딱히 상관은 없다.

……라고 생각을 했으나. 잠시 후 반드가 나를 찾아왔다.

“대장.”

“어, 왜?”

“배의 찬기에 사로잡혀 고통을 호소하는 불쌍한 양이 발생하고 말았어.”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뱃멀미를 호소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누구인데?”

“근육 돼지.”

듣자마자 바로 누군지 알아차렸다.

“가르시아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