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78화 (78/240)

# 78

음유 시인 세이라 (3)

더 이상 대기실을 살펴볼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곧장 바깥으로 나왔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레미가 나를 불렀다.

“잠깐만요, 로인 님! 뭔가 알아내신 거 맞죠?”

“물론이지. 궁금해?”

“저도 나름 결정을 내린 답이 있는데, 로인 님하고 동일한지 맞춰보고 싶어서요.”

레미의 생각이 들어보고 싶어졌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뭔데? 시간 별로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말해 봐.”

“세이라 양은 납치당한 게 아닌 거…… 맞죠?”

“맞아.”

역시 레미다.

아마 그녀도 대기실의 상태를 보고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거다.

너무나도 가지런히 잘 정리된 대기실. 이상할 수밖에 없다.

세이라는 납치당한 게 아니다. 만약 납치 당했다면, 대기실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어야 했다.

이건 본인이 스스로 나간 거다.

즉…….

“도망친 거야.”

“역시 그랬군요. 이상하다 싶었어요.”

레미는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도망친 걸까요?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그건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레미. 혹시 너, 여기 텐츠에 와 본 적 있어?”

“네, 제가 여기 항구 풍경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자주 휴가 보내러 오곤 해요.”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볼게. 여기에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장소가 어디어디 있어?”

“몇 군데 있긴 한데…… 항구 쪽이 의외로 사람들 발길 안 닿는 곳이 많아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장소가 스쳐 지나갔다.

‘붉은 등대!’

그곳은 접근 금지 구역이다.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굳이 그곳으로 갈 사람은 없다.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세이라는 본인이 스스로 도망쳤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곳을 찾아갔을 확률이 매우 높다.

레미의 말과 내가 아는 정보를 취합하면 붉은 등대라는 답이 도출된다.

남은 시간은 20분 남짓.

시간이 없다!

“나 먼저 간다! 데이비드한테는 공연 시작 시간 내에 반드시 세이라를 데려오겠다고 전해 둬!”

“알았어요. 맡겨 주세요.”

레미는 걱정하지 말라며 힘차게 대답했다.

최대한 걸음을 재촉했다.

‘뛰어가면 늦어!’

두 다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퍼어엉!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내 몸은 공중으로 높게 치솟았다.

건물 지붕을 디딤돌 삼아 크게 점프, 또 점프했다.

저 멀리 붉은 등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붉은 등대의 문고리를 잡아당겼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여기가 아닌가?”

그럴 리 없다.

세이라가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 만한 장소는 붉은 등대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붉은 등대를 한 바퀴 둘러봤다.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사다리는 등대 맨 꼭대기를 향해 있었다.

사다리 발판을 주의 깊게 살폈다.

어느 부분은 먼지가 있고, 어느 부분은 먼지가 없었다.

누군가 사다리를 사용했다는 증거다.

“가 볼 필요가 있겠어.”

굳이 사다리를 이용하진 않았다.

여태 해 왔던 것처럼 크게 점프를 했다.

착지 후에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열었다.

부드럽게 돌아가는 문고리.

‘이러면 1층 출입문을 잠근 의미가 없잖아?’

누가 등대를 관리하는지 모르겠지만, 주의를 주고 싶어졌다, 관리를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문을 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움직이지 마세요.”

옆에서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여성은 내게 다시 경고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슬쩍 확인해 본 결과.

‘세이라가 틀림없어.’

마나를 살짝 흘렸다.

이 좁은 공간에 세이라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있나 살피기 위함이었다.

확인 결과.

‘혼자군.’

이것으로 세이라가 스스로 공연장에서 도망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 추측이 맞았어.

그나저나 도입부가 도망친 여배우 시나리오랑 판박이인데?

설마 세이라에게 좋아하는 남자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러면 완전 똑같은데.

세이라는 내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처음 보는 얼굴인데. 공연 관계자인가요? 데이비드가 보낸 사람? 용병?”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세이라와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친밀도를 올리세요.]

빌어먹을. 이건 내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다.

저 여자, 엑스트라 아니었어? 적어도 1, 2권 내에서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는데!

게다가 음유 시인 아닌가?

음유 시인 캐릭터가 칠흑, 그리고 델리피나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역할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나는 세이라가 이야기 흐름상 분명 엑스트라 등급인 등장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단역? 아니면 조연? 뭐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 와중에 세이라는 내게 답변을 재촉했다.

“빨리 말해 보세요. 안 그러면 정말로 찌를지도 몰라요.”

거짓말.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든 단검에는 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살의가 없는 공격은 나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단 대답은 할 수 없고.

어쩐다?

나는 왼손을 천천히 내렸다.

내 손의 동작을 본 세이라는 단검 끝으로 내 목을 살짝 찔렀다.

“제 경고를 무시하지 마세요.”

“…….”

나는 그러는 와중에도 왼손을 움직였다.

내 목을 가리킨 다음에 손을 내저었다.

말을 못한다는 수신호를 보낸 것이다.

세이라는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물었다.

“말을 할 수 없나요?”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라는 여전히 나를 경계했지만, 실제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걸 어찌한단 말인가?

결국 세이라는 질문의 형태를 달리하기로 했다.

“Yes or No로 대답해요. Yes면 고개를 끄덕이고, No면 고개를 가로저으면 돼요.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찾아 여기까지 온 건가요?”

Yes.

“데이비드가 보낸 건가요?”

이번에도 Yes.

“제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힘을 동원해서라도 저를 강제로 끌고 갈 건가요?”

망설임은 없었다.

내가 택한 건 Yes였다.

“못 본 척할 수는 없나요?”

처음으로 No를 택했다.

의뢰를 받은 이상, 그리고 의뢰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상 나는 세이라의 신변 구속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세이라는 내게 명령했다.

“반대편을 바라보세요.”

나는 세이라를 등지고 섰다.

그런 뒤, 세이라는 내게 짧은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잠시 여기서 누워 있어요.”

단검을 거꾸로 세운 그녀는 내 뒷목을 가격하려 했다.

하나 나는 이때를 노렸다.

세이라가 단검을 치운 틈을 타 나는 자세를 낮추고 바로 뒤로 돌아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

세이라는 빠르게 단검을 휘둘렀다.

무기를 휘두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충 휘두르는 것 같아도 전부 다 내 급소를 확실하게 노린 공격들뿐이었다.

‘이 아가씨, 정체가 대체 뭐야?’

음유 시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요즘 음유 시인은 칼질은 기본으로 배우고 다니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음유 시인의 정의를 잘못 일고 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세이라의 단검술조차 나를 가로막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싸움 실력은 내가 한 수 위였다.

단검을 피해 세이라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 순간.

예상 못한 일격이 날아들었다.

―!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음파?’

인간의 귀로 감지하기 힘든 무언가의 소리가 나를 압박했다.

그 소리에 따라 나는 크게 나가떨어졌다.

‘마나의 흐름……! 설마 마법인가?’

목소리를 이용한 마법이라니, 처음이었다.

그러나 계속 사용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음파 공격을 날렸던 세이라는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이후 힘에 겨운 호흡을 내쉬는 세이라.

본인의 힘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는 건가?

세이라가 능력을 발휘하기 곤란한 상황!

내게는 이때가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나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세이라에게 달려들었다.

세이라는 또다시 내게 음파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녀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게 있었다.

‘한 번 당한 걸 또 당할쏘냐!’

마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세이라만이 아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는 손을 크게 내저었다.

방금 전까지 내 몸을 억압했던 보이지 않는 힘이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마나 다루는 솜씨는 드래곤이 인간보다 더 한 수 위지!’

세이라의 정체불명의 능력은 둘째 치고 일단 그녀를 먼저 제압하기로 했다.

뒤로 돌아들어 가 그녀의 왼쪽 손목을 낚아챘다.

이후 허리 뒤로 꺾어 그녀를 제압했다.

“아얏!”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아가씨.

허리에서 보라색 팔찌를 꺼내 들었다.

수갑과 비슷하게 생긴 아이템이었다.

찰칵!

세이라의 왼쪽 손목에 보라색 팔찌를 강제로 착용시켰다.

나머지 한쪽 손도 뒤로 끌어들여 양손을 포박했다.

그제야 나는 세이라를 놓아 줬다.

세이라는 다시 한번 목소리로 내게 마력을 쏘아 내려 했지만.

“나오지 않아! 어째서?”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끄적끄적 글씨를 적은 후에 세이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아이템은 마력을 억제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그러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거야. 괜히 힘 낭비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수갑을 해제하려면 딱 하나.

방법이 존재한다.

물리력을 행사하면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렵지 않게 수갑을 후두둑 뜯어 버릴 수 있다.

근력이 세니까.

그러나 세이라는 딱히 그래 보이진 않았다.

세이라는 침음을 흘렸다.

나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세이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야 그녀의 인물 정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세이라

-인물 등급 : 단역

-종합 능력 : SSS

-세이렌과 인간 용병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선율에 마력을 담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세이렌이라. 노래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종족으로 알고 있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혼혈일 줄이야!

‘그래서 아까 그 요상한 공격을 마구 날릴 수 있었던 건가.’

그나마 나는 마법 저항력이 높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드레인이나 리오나가 먼저 세이라와 만나 전투를 벌였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반드는…… 잘 모르겠네. 초음속으로 움직이는 녀석이니까 세이라의 하드 카운터일지도.’

싸움을 잘한다 싶더니, 알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용병이다. 단검술은 아마 아버지에게 배웠으리라.

그보다 세이라가 단역 등급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3권 이후에는 특정 에피소드에서 활약하는 구간이 있나 본데?’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보는 세이라에게 호감을 살 수는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 친밀도 올리기는 포기하기로 했다.

귀찮더라도 필담으로 대화하자.

-어째서 스스로 도망친 거야?

“…….”

-침묵이 무조건 답이 될 수는 없어. 때로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게 오히려 정답일 때도 있으니까.

그리고 혹시 또 모르지.

어쩌면.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입을 굳게 닫던 세이라.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뭐지, 이건 좀 의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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