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정보 조직 베르투 (1)
네이의 시체는 가루가 되어 점점 흔적을 감춰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벤제머는 네이의 곁을 지켰다.
울음을 삼키던 벤제머는 내게, 아니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맙네.”
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렇게 악몽 같았던 밤이 지나가고. 다시 아침 해가 떴다.
그동안 우리는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그들이 봤던 검은 괴물의 형태는 일관적이지 않았다.
봉을 휘두르는 검은 괴물, 그리고 네발 달린 짐승처럼 움직이는 검은 괴물.
이렇게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첸버는 이 이야기를 듣고 바로 벤제머를 찾았다.
“주민들을 여기에 가두고 산 제물을 바치라고 경고한 게…… 설마 자네인가?”
“…….”
벤제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는 스스로의 죄를 자백했다.
“아내를 어떻게든 이 마을에 붙잡아 두고 싶었네. 처음에는 가축으로 검은 괴물의 식탐을 어찌어찌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나중에 가선 가축들로도 안 되더군. 놈이 원한 건 인간이었어.”
칠흑은 높은 지성을 가진 생명체를 좋아한다.
그래서 칠흑은 벨라시오닉이라는 드래곤을 잠식했던 것이다.
칠흑의 조각들도 칠흑의 분신이라는 명칭에 맞게 추구하는 취향이 같았다.
가축보다 인간을 원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벤제머는 머리를 푹 숙였다.
“그렇다고 마을 주민들 모두를 죽임당하게 만들 순 없었지. 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름달이 뜨는 날, 젊은 여성으로 제물을 바치라고 이들에게 경고했네.”
“왜 하필 젊은 여성이지?”
“그게 아내가…… 아니, 칠흑의 조각이 원하는 거였으니까.”
자세히 조사해 보니, 벤제머의 저택에서 일하던 젊은 하녀가 몇몇 실종되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다.
그러나 죄는 죄다.
첸버는 벤제머에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미리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자네와 자네의 아내가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게 되었다네. 조만간 자네가 저지른 죄를 추궁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걸세.”
나는 첸버가 왜 이걸 미리 말해 주는지 알고 있었다.
도망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사실 타람 주민들을 위해서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첸버는 벤제머에게 정보를 흘렸다.
왜냐하면…….
‘절친이니까. 뻔하지.’
그러나 첸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이런 정보를 알려 주어도 벤제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나는 도망치지 않을 걸세. 여기에 남아서 내 죗값을 치를 거야.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이를 희생시켰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더 이상 그들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네. 여기에서…… 끝내고 싶군.”
“…….”
첸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벤제머가 이런 결정을 할 거란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정보를 흘린 거다.
이후 우리는 타람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제나드 일행은 검은 괴물이 소멸되는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이곳을 떠났다.
우리만 남은 셈이었다.
마을 바깥으로 나온 후에도 첸버는 수차례 뒤를 돌아봤다.
드레인은 혼잣말을 흘렸다.
“벤제머 그 양반은 어떻게 될까?”
“글쎄.”
첸버는 타람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뒀다.
“앞으로 그 친구에게 연락 올 일은 없겠지.”
무거운 한숨을 내쉰 첸버는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어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첸버와의 친밀도가 대량 상승합니다.
-첸버와의 친밀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블루로즈단의 2인자’ 칭호를 얻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블루로즈단에 소속되어 있는 용병들과의 친밀도가 +5 상승합니다.
칭호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칭호를 얻은 거 같다.
좋은 일이긴 한데…….
‘기……쁘진 않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함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듯했다.
* * *
타람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내가 모르는 사건, 내가 모르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타람 사건은 이것을 확연하게 느끼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제나드의 등장은 내게 큰 충격을 줬다.
‘설마 인물 등급이 조연일 줄이야!’
단장인 제나드가 조연급이라면, 그가 이끄는 블루로즈단은 《델리피나 전기》 후반에 크나큰 활약을 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 흘러갈지, 아니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었다.
‘라스의 적이 되거나 아군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인데.’
한 치 앞도 모르겠다.
편집자인 나는 1, 2권을 보면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지 대충 알 수 있다.
그러나 《델리피나 전기》는 솔직히 말해서 예상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소위 ‘팔리는 글’들이 가지고 있는 정석 루트를 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괜히 재미없다고 1, 2권만 읽고 도중에 포기한 게 아니다.
개연성도 부족하고, 이야기 전개도 허술하고…… 그래서 읽기를 포기한 것이다.
‘카인이라는 작자를 찾아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응? 잠깐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카인을 알고 있었다.
드레인조차 카인이 누군지 안다.
델리피나 대륙 최고의 예언가.
카인은 이곳 등장인물로 나온다.
그렇단 뜻은…….
‘내가 여기서 카인을 찾아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델리피나 전기》 3권 이후의 이야기를 들으면 된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말 간단한 거였는데.
나는 곧장 파랑새를 호출했다.
이번에는 꽤 먼 곳에 있었던 모양인지 파랑새는 정확히 내 호출로부터 3일 후, 나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내가 있는 R팀 본거지를 찾아왔다.
“R팀 대장님께서 나를 찾다니. 별일이네.”
여태껏 나는 파랑새를 직접 호출한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파랑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부탁할 게 있어서요.”
“부탁?”
“사람을 좀 찾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파랑새는 블루로즈단에서 정보와 소식통을 담당하는 남자다.
유명한 대예언가의 행적은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따로 부탁을 하기로 했다.
“물론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어떤 대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나 볼까?”
“1억 제피 어떻습니까?”
간 볼 것도 없이 나는 단숨에 억 단위를 불렀다.
드레인이 지금 내 모습을 봤더라면, 분명 ‘미쳤어?’라고 쓴소리를 들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그만한 가치가 있다.
억을 주고서라도 카인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3권 이후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파랑새는 말이 없었다.
“보수 금액이 너무 적나요? 더 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니, 적어서 놀란 게 아니라 그 반대야. 설마 억을 부를 줄은 몰랐거든. 나는 기껏해야 2~3천만 제피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2~3천만 제피도 충분히 많다.
그런 와중에 내가 억을 불렀으니 오히려 파랑새가 당황할 법도 했다.
나는 파랑새에게 재차 물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하긴 하겠는데 솔직히 말해서 장담은 못 해. 너도 알겠지만 카인은 라바인 전투가 발발하기 전에 잠적해 버렸어. 그날 이후 카인을 본 이는 아무도 없지. 목격담조차 없어. 그야말로 감감무소식이야. 그렇게 유명한 예언가인데 목격 정보가 전혀 없다는 건……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 봐야겠지.”
파랑새는 카인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카인은 살아 있다.
만약 자취를 감췄다면 죽은 게 아니라 이세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이세계는 내가 살고 있던 곳이겠지.’
거기서 나에게 본인이 직접 작성한 《델리피나 전기》 전집을 전달한다.
이후에 나를 소설 속으로 보내 버린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카인의 행적을 찾는 일이다.
“하시겠습니까?”
나는 파랑새의 습관인 두 번 질문하기 신공을 발휘했다.
파랑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잖아? 일단 한번 해 볼게.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찾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괜찮습니다. 못 찾게 된다 하더라도 수고비로 5천만 제피는 드릴게요.”
“로인 대장, 통이 굉장히 크네? 원래 이렇게 통 큰 사람이었나? 오늘따라 자네가 너무 멋있어 보이는데?”
“전 평소에도 멋졌어요.”
누가 용병 아니랄까 봐 돈 준다니까 바로 아부 모드로 들어가네.
* * *
1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자잘한 의뢰를 맡으며 파랑새가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미안, 대장. 수소문을 해 봤는데, 내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거 같아.”
파랑새가 GG를 선언하는 건 정말 보기 드문 경우였다.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파랑새 아닌가?
그런데 가져온 건 좋은 소식이 아니라 크나큰 실망감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하긴, 이렇게 쉽게 카인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바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방법이 없을까요?”
“음…….”
파랑새는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방법이 전혀 없진 않은데. 사실 나보다 더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자들이 존재해. 그들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게 누구입니까?”
“특정인은 아니고 조직이야.”
파랑새는 말을 이어 가기 전에 주변을 살폈다.
듣는 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파랑새의 불안감을 직접 해소시켜 줬다.
“제 사무실은 방음 마법이 걸려 있어서 대화 내용이 바깥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파랑새는 목소리를 낮춘 채 나에게 중요한 정보를 들려줬다.
“혹시 자네, ‘베르투’라고 아나?”
“아니요.”
처음 듣는 단어다.
‘명칭? 사람 이름? 종잡을 수가 없네.’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던 단어다.
“베르투라고 하는 정보 조직이 있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 집단이기도 하지. 대현자를 필두로 48인의 현자들로 구성된 조직의 이름이야.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까 그곳에 의뢰해 보면…… 어쩌면 카인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1, 2권에는 나오지 않은 조직이다.
‘현자들로 구성된 정보 집단이라…….’
파랑새가 추천했으니,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그곳과 연결시켜 주실 수 있습니까?”
“연결은 시켜 줄 수 있지. 하지만 베르투는 자신들이 정보를 제공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어. 회원 자격을 얻으려면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지. 그래도 해 볼 텐가?”
또 테스트인가?
블루로즈단부터 시작해서 R팀 대장 테스트까지
여기는 어째 줄곧 테스트만 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참…….
“해야죠.”
“좋아, 그럼 특별히 연결시켜 주도록 하지. 머지않은 시일 내에 베르투에서 현자 한 명이 자네를 찾아올 거야. 그때부터가 테스트의 시작이니 잘해 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받아 가세요.”
“응? 뭔데?”
파랑새에게 두둑한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약속드렸던 5천만 제피입니다.”
“정말로 주는 거야? 카인을 찾지도 못했는데?”
“말씀드렸잖아요. 찾든 안 찾든 선금 개념으로 드리겠다고요.”
5천만 제피를 받아 든 파랑새는 짙은 미소를 선보였다.
“이래서 내가 로인 대장을 좋아한다니까? 나중에 필요한 게 있거든 언제든 말만 해 줘.”
“네, 알았어요.”
-파랑새와의 친밀도가 대량 상승합니다.
역시 돈이 최고다.
* * *
3일 뒤, 드레인이 내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로인 대장, 누가 찾아왔는데?”
“누구라고 하던가요?”
“글쎄, 이름은 모르겠고. 대장한테 ‘현자가 왔습니다.’라는 말만 전하면 된다고 하더라고. 정신병자 같은데, 돌려보낼까?”
“아니요, 들여보내 주세요.”
베르투라고 했나. 어떤 집단인지 한번 보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