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제물을 바쳐라 (4)
네이는 계속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양손은 검은 괴물의 손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나를 노렸지만, 나는 네이의 공격을 단 한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다.
내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네이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얼굴 표정에 담았다.
“그 백발 여자 마법사가 아니군. 누구냐, 넌!”
“맞춰 보시지.”
나는 녀석에게 도발을 걸었다.
정체를 밝혀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밝힐 필요까진 없었다.
이미테이션은 계속 유지하는 데에 극소량의 마나만 소모된다.
전투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네이의 공격.
그녀가 오른손을 크게 휘두를 때, 나는 자세를 낮춰 네이의 공격을 그대로 흘린 뒤에 안으로 파고들었다.
주먹을 주로 사용하는 나였기에 거리를 좁힐수록 내 격투술은 빛을 보게 된다.
휴즈의 말을 떠올렸다.
-주먹을 무작정 휘두르는 것보다 몸 전체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나는 안으로 파고든 뒤에 허리의 힘을 이용해 오른 주먹을 크게 내질렀다.
빠아악!
네이의 얇은 옆구리에 나의 주먹이 꽂혔다.
몸이 옆으로 크게 꺾인 네이는 그대로 수십 미터를 나뒹굴었다.
평소에 날리던 내 주먹보다 위력이 배가되었다.
고생해서 휴즈에게 가르침을 받은 보람이 느껴졌다.
한편 네이는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하면서 다시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녀의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검은 괴물은 무적이 아니다.
내 공격을 계속 받으면 분명 쓰러질 수밖에 없다.
소란이 크게 발생한 탓일까?
집 안에 숨어 있던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검은 괴물의 정체가 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증인들은 다수 확보했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벤제머에게 검은 괴물이 네이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이제 마음 편히 네이를 제거하면 된다.
저번처럼 가족인 웨일에게 동의를 받느니 마니 했다가 더 큰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럴 뻔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망설임 없이 여기서 바로 네이를…… 아니, 검은 괴물을 제거하기로 했다.
잠복해 있던 드레인과 에나 그리고 첸버가 타이밍 좋게 합류했다.
“잘했어, 대장!”
드레인은 내게 엄지를 추켜올려 줬다.
검은 괴물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우리는 포위망을 형성했다.
“…….”
매서운 눈빛으로 우리들을 훑는 검은 괴물.
녀석은 내 공격 한 번에 큰 내상을 입었다.
상처 입은 곳을 재생시키기 전에 심장을 뽑아 버릴 심산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부웅!
커다란 봉을 휘두르며 우리를 견제했다.
나와 드레인, 첸버는 뒤로 물러섰다.
거리를 두고 난 이후에 상대방을 확인한 순간, 드레인은 놀라며 말했다.
“검은 괴물이…… 둘이야?”
이거, 분위기가 굉장히 요상하게 흘러가는데?
* * *
두 번째 검은 괴물의 등장.
아니, 자세히 보니 검은 괴물은 아니었다.
덩치가 커 보이게 보이려고 일부러 짐승의 털을 검은색으로 염색시킨 의상을 착용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렸다.
검은 괴물과 얼추 비슷한 형상으로 만든 거 같은데, 검은 괴물은 정해진 외형이 없다.
어떤 녀석은 인간 형태와 매우 흡사하게 생겼고, 어떤 녀석은 네발 달린 짐승이나 혹은 날개 달린 괴물의 외형을 가졌다.
첸버도 나처럼 바로 눈치챘다.
“자세히 봐! 저 녀석, 인간이야!”
“저, 정말이네. 어휴, 난 또…….”
안심하는 드레인이었지만, 사실 안심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검은 괴물을 없애려고 하는 우리를 방해했다.
그 말인즉슨…….
‘검은 괴물을 추종하는 녀석인가?’
추종자일 가능성이 있다.
얼굴을 비롯해 외형을 철저하게 가리고 있었기에 인물 정보 창이 보이지 않았다.
인물 정보 창은 상대방이 외형을 완전히 감추고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레이샤르를 들 수 있다.
인간 모습으로 변장한 레이샤르의 정보를 처음에는 볼 수 없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대신 친밀도를 올리면 저렇게 외형을 철저하게 가려도 보이긴 한다.
그러나 나와 검은 습격자는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닌가 보다.
‘어차피 누가 되었든 상관없어!’
우리의 적임에는 분명하니까.
“두 분은 저 습격자를 맡아 주세요. 그동안 제가 검은 괴물 녀석의 심장을 뽑아 파괴하겠습니다. 에나! 너는 뒤에서 서포트해 줘!”
세 남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난 첸버에게 명령을 내릴 만한 권한은 없었다.
그러나 첸버는 내 말을 군말 없이 수용했다.
‘상황이 급박한데 누구의 명령을 듣고 안 듣고를 언제 따지고 있을 텐가?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자!’
드레인과 첸버에게 습격자를 맡기고 나는 검은 괴물을 향해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그러나 검은 괴물은 그 짧은 시간에 상처를 회복한 모양인지, 빠른 몸놀림을 보이며 내게서 벗어나려 했다.
아닌 밤중에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망할 녀석! 가만히 좀 있어!”
있는 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그러나 좀처럼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한편 검은 괴물이 달아나는 것을 확인한 습격자도 갑자기 추격전에 동참했다.
나를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안 그래도 따라잡기 버거운데 습격자까지 나에게 달라붙어 추격을 방해하니 짜증이 치솟았다.
그렇다고 습격자를 상대하자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검은 괴물은 마을 밖으로 벗어나려 했다.
‘위험해! 반드시 잡아야 돼!’
여기서 놈을 놓치면 다음을 기약하기 힘들어진다.
잡을 수 있을 때 잡는 게 좋다.
‘이럴 때 반드가 있었다면 금방 따라잡았을 텐데!’
아쉬움이 컸다.
마을 담장을 넘으려는 검은 괴물.
그때, 검은 괴물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다.
쿠웅!
바닥을 구르는 검은 괴물.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습격자는 망연자실한 감정을 드러냈다.
“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다가가는 검은 습격자.
그 와중에 나는 검은 괴물을 쓰러뜨린 존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대검을 든 한 젊은 청년.
그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네가 로인이냐.”
이미테이션이 풀린 상태였기에 나는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짧은 머리의 청년을 응시했다.
본 적 없는 남자다.
게다가 마스크로 입가를 가리고 있어서 바로 인물 정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저 남자는 나를 알고 있어.’
정체가 뭐지?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 반응을 지켜보던 남자는 마스크를 내렸다.
“역시 마스크를 착용하면 말하기 불편하다니까.”
마스크를 벗은 덕분에 남자의 인물 정보가 갱신되었다.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내 입에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녀석의 정체 때문이었다.
‘단장 제나드……!’
블루로즈단의 우두머리가 예고도 없이 등장했다.
* * *
뒤늦게 나에게 합류한 첸버는 제나드를 보자마자 크게 당황했다.
“단장!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분명 다른 의뢰를 수행 중이라고 그렇게 보고받았는데…….”
“요 근처였지요. 원래 일 끝나고 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여기에 검은 괴물이 나타난다는 목격 정보를 들어서 어제부터 잠깐 들렀어요. 애들도 몇몇 데리고 왔지요.”
아하! 그래서 아저씨가 우리가 타람에 들어가기 전에 외지인 한 무리가 먼저 타람을 방문했다는 말을 한 거였구나.
‘그럼 왜 숨어 다녔던 걸까? 대인 기피증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게 궁금해졌다.
물어보고 싶어도 나는 제나드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제나드의 인물 등급 때문이었다.
-제나드
-인물 등급 : 조연
-종합 능력 : SS
-블루로즈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뛰어난 대검 솜씨를 지닌 젊은 검사로 모든 용병들의 선망의 대상이라 불리지만, 대인 기피증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는다.
단역도 아니고 조연이다.
친밀도를 10~20 올려서 말을 붙일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1, 2권에서 제나드의 활약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조연 등급을 받았단 뜻은…….
‘3권부터는 대활약하는 인물이란 의미인가?’
매번 하는 후회지만, 난 왜 《델리피나 전기》를 끝까지 읽지 않았을까? 하아아!
첸버가 내 궁금증을 대신 풀어 주기 위해 질문했다.
“여기에 왔다면 왜 구태여 숨어 다녔던 겁니까, 단장.”
“칠흑의 조각은 숙주를 찾아 힘을 키워 가는 녀석이라 들었습니다. 어쩌면 마을 주민들 중 한 명이 칠흑의 조각에 잠식당해 검은 괴물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쪽 R팀 대장이 재미있는 계획을 꾸미는 거 같아서 기습 참가했죠.”
우리가 거의 다 몰아붙인 걸 갑자기 불쑥 끼어들어서 숟가락만 얹었다.
이 뜻을 장황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제나드였다.
“그리고 대인 기피증도 한몫했고요. 잘 아시죠? 저, 사람들 모여 있는 곳 별로 안 좋아하는 거.”
“……너무 잘 알아서 탈이죠.”
첸버는 힘없이 웃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나저나 말을 못 하니까 답답해 죽겠네.’
나의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나드는 쓰러진 검은 괴물을 응시했다.
“생각보다 쉬운 녀석이군요. 강하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그러더니 이번에는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벌써부터 이런 녀석에게 쩔쩔매면 안 되지. 벨레너의 13난제도 해결한 사람이라고 해서 실력이 출중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약하네.”
“…….”
내가 약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어디 가서 이런 소리 들을 짬밥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막판에 숟가락만 얹은 주제에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짜증 나려고 하니까!’
검을 든 제나드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네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검은 괴물, 네이는 벌써 잘린 하반신을 재생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숨통을 끊는 게 좋다.
그러나 검은 습격자는 제나드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봉을 들고 제나드를 가로막는 검은 습격자.
그때, 첸버가 외쳤다.
“그만하게, 벤제머!”
첸버는 이미 검은 습격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처음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을 것이다.
아마 벤제머가 네이의 이름을 외쳤을 때. 첸버는 그때 감을 잡았을 것이다.
벤제머는 스스로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미안하네, 첸버. 나는…… 내 아내를 지키고 싶었어.”
“지키고 싶었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의뢰를 보낸 건가!”
“그건…….”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벤제머를 대신해 내가 답을 들려줬다.
“이성적으로 네이 씨를 죽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본능이 그러질 못하기에 일부러 저희를 부른 거겠죠.”
스스로 아내를 죽이진 못한다.
왜냐하면 벤제머는 아내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네이를 계속 남겨 둘 순 없었다.
벤제머는 네이가 칠흑의 조각에 잠식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다.
마지막까지 나서지 않던 벤제머는 아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걸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이 사건에 끼어들기로 결심했다.
하나 그건 잘못되었다.
“아내분을 편하게 보내 주고 싶다면, 뒷일은 제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지 않으면 더 큰 희생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앞을 가로막겠다면, 힘을 써서라도 당신을 제압하고 검은 괴물을 제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뢰니까.
나는 용병이다.
돈만 주면 의뢰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
내가 받은 의뢰는 검은 괴물을 죽이는 것.
설령 의뢰를 준 당사자가 나를 막아선다 해도, 나는 의뢰 목적 달성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벤제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네가 해 주게. 내 손으론 차마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알겠습니다.”
그를 지나쳐 네이에게 다가갔다.
“편히 잠드시길.”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남기는 마지막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