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제물을 바쳐라 (2)
벤제머라는 영주가 다스리는 마을, 타람으로 향하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말을 타고 막 이동을 하려는 찰나였다.
“로인!”
내 이름을 크게 외치는 한 남자.
첸버가 우리를 찾아왔다.
“이제 막 떠나려는 겐가?”
“예, 그보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나도 같이 따라갈까 해서 왔지.”
“네?”
예정에 없던 일이다.
첸버도 같이 갈 거라는 말을 들은 기억도 없다.
첸버는 쓴 미소를 지었다.
“내 친구, 그리고 내 고향의 일인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으니까. 방해는 안 할 터이니 같이 데려가 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고맙군.”
첸버가 우리와 함께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첸버와 함께 임무를 수행해 본 적이 단 한차례도 없는 거 같은데…….’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 * *
중립 지역까지 거리가 꽤 된다.
말을 타고 4일을 쉼 없이 달렸다.
타람의 날씨는 1년 내내 겨울이다.
네스킨 산맥의 날씨에 비해서는 덜 추운 편이지만, 에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에는 딱 좋은 추위를 자랑했다.
타람 근처에 오고 나서부터 에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대장님, 입김 나오는 거 보세요. 환상적이지 않나요?”
“아니, 전혀.”
입김 하나 가지고 저렇게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은 에나가 유일할 거다.
저 멀리 타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언덕을 내려가면 금방 도착할 것 같았다.
언덕을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이봐, 거기 형씨들!”
약초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등에 멘 아저씨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저 마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 저주받은 마을이니까.”
칠흑의 조각이 이곳에선 저주 취급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저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곳에서 괴물을 퇴치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서요. 저희는 저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형씨, 용병이여?”
“네.”
나는 팔목 보호대를 보여 줬다.
블루로즈단 마크를 본 아저씨는 혀를 찼다.
“쯧쯧, 아무리 용병들이 돈 보고 움직인다고 해도 그렇지, 목숨은 소중히 할 줄 알아야지. 어제인가? 점심쯤에도 한 무리가 저 마을로 들어가더니만……. 다들 죽으려고 환장했구먼.”
한 무리?
내가 알기로는 벤제머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한 용병 조직은 우리밖에 없었다.
저곳으로 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
‘설마?’
갑자기 문득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아저씨, 혹시 어제 여기에 왔던 인물 중 한 명의 이름이 라스 아닙니까?”
“라스? 몰러. 누구여, 그 사람은?”
이 아저씨는 젊은 영웅으로 떠오르는 라스의 존재를 모르는 듯했다.
“아무튼 저기 들어가는 순간, 그쪽도 다 괴물 녀석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지도 모르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여기서 떠나는 게 좋을 거여! 내 말 절대로 무시하지 말고!”
강력한 경고를 남긴 채 아저씨는 제 갈 길을 다시 나섰다.
오지랖 넓은 아저씨다.
‘저주받은 마을이라…….’
맞는 말이긴 하지.
칠흑의 조각이라는 이름의 저주를 받았으니까.
‘그나저나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왔다는 일행이 자꾸 신경 쓰이네.’
마을로 가면 얼굴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유 모를 기대감이 샘솟았다.
* * *
마을로 들어온 우리들을 가장 먼저 반겨 준 건 환영도, 환호도 아니었다.
불안함, 그리고 초조함.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신들이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용병들이오?”
“예, 블루로즈단 R팀 대장, 로인입니다.”
“블루로즈단 S팀 부대장, 첸버라고 하오.”
자기소개를 하는 첸버.
몇몇 마을 사람들은 첸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가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이제야 기억하시는군요.”
첸버를 알아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첸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릴 때만 잠깐 있었을 뿐이고. 12살이 되자마자 바로 이 마을을 떠났으니까. 거의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뭐, 고향이라고 꼭 모든 사람들이 첸버를 알아봐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한편 남자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안 그래도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남자는 별말 없이 우리를 바로 벤제머 영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야기 전개가 상당히 스피디하네. 나야 좋지, 여기서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은 없으니까.’
마을은 매우 작은 편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죽지 못해 사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들이 이런 표정을 짓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칠흑의 조각 때문이겠지.’
검은 괴물에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데, 어찌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남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영주가 살 법한 저택이었다.
웨일, 그리고 라크스 공작의 저택을 보고 나서 이곳 벤제머의 저택을 보니, 뭐랄까…… 이런 말을 하면 벤제머에게 굉장히 실례된다는 건 잘 아는데, 볼품없어 보인다.
‘내 기준이 너무 올라간 걸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일하는 사람들의 낯빛은 굉장히 어두웠다.
드레인은 나에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에 3일 이상 머물면 정신병에 걸릴 거 같아.”
“괜찮아요. 3일까진 안 걸릴 테니까요.”
“정말이지?”
“네, 절 믿으세요.”
3일이면 넉넉하다.
빠른 시일 내에 이번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날을 맞춰서 왔다.
산 제물을 요구하는 검은 괴물.
놈은 보름달이 뜨는 날에 나타난다.
그때가 바로 산 제물을 바치는 날이다.
때마침 내일 저녁에 만월이 뜬다.
그래서 나는 도착일을 보름달이 뜨는 날로 잡았다.
우리의 목적은 검은 괴물을 퇴치하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왔다던 그자들은 안 보이네.’
나중에 더 찾아볼까?
일단 영주부터 만나 보기로 했다.
중년의 한 남성이 우리를 반가이 맞이했다.
“먼 길 오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소.”
“벤제머! 오랜만이군!”
“오, 자네 왔는가?”
벤제머는 마을 사람들과 다르게 첸버를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서로 가볍게 포옹을 하면서 지난날의 회포를 풀었다.
이후에 첸버는 벤제머에게 우리를 소개해 줬다.
“여기부터 차례로 R팀 대장인 로인, 부대장인 드레인, 그리고 R팀 단원인 에나라고 하네.”
나는 먼저 벤제머의 인물 정보를 확인했다.
-벤제머
-인물 등급 : 엑스트라
-종합 능력 : C
-중립 지역에 위치한 작은 마을, 타람을 다스리는 영주. 아내 네이를 굉장히 사랑한다.
벤제머의 등급은 엑스트라다.
이 정도면 친밀도를 올려야 하는 수고스러움 없이 곧장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한번 해 볼까?
“반갑습니다, 영주님. 로인이라고 합니다.”
예상대로였다.
목소리가 바로 나오니 편하네.
R팀을 대표해 내가 벤제머에게 인사를 건넸다.
벤제머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나같이 든든해 보이는 자들이로군. 로인이라고 했나? 자네의 소문은 익히 들었네. 뛰어난 용병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소문에 과장이 더해졌습니다. 사실 전 그렇게 대단한 용병은 아닙니다.”
거짓말해서 미안합니다.
사실 대단한 용병 맞습니다.
그래도 처음부터 너무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면 첫인상부터 안 좋은 이미지를 풍길 거 같아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옆에서 드레인이 ‘너 원래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라고 작은 목소리로 태클을 걸어왔지만, 애써 무시해 버렸다.
벤제머와 함께 저택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눈에 띄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는 젊은 여성.
표정이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움직임조차 없었다.
첸버는 여성을 보는 순간 침음을 흘렸다.
“네이, 네가 어떻게 여기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와 드레인, 에나는 첸버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벤제머가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놀랐나? 그럴 만도 하지. 왜냐하면 내 아내는 한 번 죽음을 경험했으니까.”
저 네이라는 여자가 벤제머의 아내인가?
그런데 죽음을 경험했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자초지종을 묻기도 전에 벤제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서 설명을 들려줬다.
“내 아내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지. 그러다가 며칠 전에 의사가 와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군.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고 말을 할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군.”
옛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벤제머는 고개를 좌우 방향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살아남았지. 나를 위해서! 아내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준 거야.”
감상에 젖은 벤제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특별한 약이라도 썼습니까? 어쩌면 그 약이 우연치 않게 사모님의 불치병을 치료해 주는 성분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단순히 내 추측이었다.
그러나 벤제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은 안 썼네. 애초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모든 약들을 다 동원했지만 아내는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
“그럼 대체 어떻게……?”
“글쎄, 나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이런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네만.”
기적 좋아하시네.
나는 네이라는 여자의 인물 정보 창을 바라봤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기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난 그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 * *
첸버는 벤제머와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지난날의 추억거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듣자 하니 12년 만에 서로 직접 얼굴을 보게 된 거라고 하던데…….
‘뭐,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나는 말없이 하녀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저택의 마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네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 같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깝다.
그래도 벤제머 입장에선 좋을 것이다.
첸버에게 들어 보니 벤제머는 아내 사랑이 대단한 남자라고 했다. 하긴, 인물 정보 창에 언급될 정도였으니.
벤제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자, 네이.
‘로맨티스트네.’
하지만 타람에서 벌어진 사건은 로맨스와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
첸버가 벤제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드레인과 에나를 내 방으로 불러들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에나는 내게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대장님 방은 시원해서 좋네요. 저랑 바꾸실래요? 제 방은 덥던데.”
“시원한 게 아니라 추운 거야. 그리고 방 바꾸자고 여기까지 널 불러온 것도 아니고.”
에나는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정말 추운 걸 좋아하는 여자다.
그 와중에 드레인은 열린 창문을 닫았다.
“보아하니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거 같은데……. 말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미리 준비해 둬야 하지 않겠어?”
역시 드레인은 눈치가 빠르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런 뒤 두 사람에게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칠흑의 조각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벌써?”
“엄청 빠르네요.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인물 정보 창으로…….’라고 말하려다가 대충 정황상이라고 둘러댔다.
그런 뒤에 나만이 아는 정보를 두 사람에게 오픈했다.
“네이. 그녀가 검은 괴물의 정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