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제물을 바쳐라 (1)
칠흑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짐과 동시에 추종자라는 새로운 존재들도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딱히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건 아니었다.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칠흑이 세상을 구원해 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넘어간 자들, 그들이 바로 추종자다.
앞으로 우리는 추종자들과 싸워야 한다.
파리마에서 돌아온 나와 일행.
비록 우리는 25억 제피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잃었지만, 그래도 나는 나름 만족했다.
‘25억 제피를 지불하고 엔드라를 살릴 수 있다면, 그 2배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지.’
엔드라는 라스에게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엔드라가 죽고 나자 라스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겠는가.
라스가 활약하지 못하면 그만큼 칠흑은 세력을 넓혀 갈 것이다.
라스는 꾸준히 활동을 해 주면서 칠흑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25억 제피를 날렸다.
‘아니, 날렸다고 표현하면 좀 그러니까…… 음, 투자했다고 치자.’
그게 속 편할 거 같다.
엔드라의 목숨값이라고 한다면 25억 제피는 아깝지 않다. 충분히 가치 있는 낭비다.
라그너는 나에게 묻고 싶은 게 정말 많다는 눈빛을 띠었다.
그러나 깊게 질문하진 않았다.
로인 님이라면 분명 깊은 뜻이 있으리라.
그렇게 믿기로 했나 보다.
R팀 본거지로 돌아온 드레인은 검은 괴물과 싸웠던 일을 회상했다.
“그러고 보니 느와르였나? 그 귀족도 저번에 갑자기 괴물이 되어 버렸잖아. 그것도 설마 칠흑이라는 녀석 때문이었던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칠흑의 조각이지만요.”
칠흑과 칠흑의 조각은 엄연히 다르다.
칠흑의 조각은 칠흑의 분신 같은 존재라고 할까?
칠흑의 조각을 아무리 없애 봤자 세계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원흉은 어디까지나 칠흑이다.
본체를 없애야 문제가 해결된다.
드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우리가 맡을 의뢰에 또 그런 녀석이 엮이게 되는 건 아니겠지?”
“글쎄요. 저도 모르죠.”
언제, 어디서, 누가 잠식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나조차도.
설령 내가 《델리피나 전기》를 완결까지 다 읽었다 하더라도 모를 것이다.
소설이 델리피나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다 담아내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내가 모르는 일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 주의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래도 휴즈 밑으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은 효과는 좀 있나 보다.
검은 괴물이 나에게 달려들었을 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놈의 공격을 받아 쳐 냈다.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팔에 남아 있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해.’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휴즈에게 가서 또 수련을 받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나만 강해지면 안 된다.
“선배.”
“왜.”
“슬슬 R팀 추가 인력을 뽑을까 하는데…… 어떨까요?”
“사람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물론 네가 그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자신 있으면 더 충원해도 좋아. 블루로즈단은 딱히 인원에 제한을 두고 있는 건 아니니까.”
고민되네.
만약 뽑는다고 치면, 신중하게 뽑고 싶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으로 더 험난한 길을 걸어가야 할 운명이니까.
* * *
인력 충원 보고 때문에 나는 첸버가 잠시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때마침 거리가 멀지 않았다.
말을 타고 반나절만 이동하면 바로 닿을 거리였다.
나 혼자만 온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네.”
리오나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나도 반가운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요즘은 잘 지내?”
“의뢰가 너무 쏟아져서 정신없이 보내고 있지. 우리도 R팀처럼 2달간 휴가 받으려면 열심히 해야지.”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라크스 공작님은 잘 계시지?”
“너무 잘 계셔서 문제야. 날 볼 때마다 로인 군 또 데려오라고 맨날 말씀하셔서 요즘은 피해 다니고 있어.”
이 말을 듣고 기뻐해야 하나.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뭐, 미워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리오나는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에 대해 물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인력 충원에 관해서 첸버와 이야기 좀 나눠 보려고.”
“위층에 있으니까 올라가 봐. 아까 보니까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보고 있던데.”
“그래?”
뭐기에 그러는 걸까?
나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리오나의 말대로 첸버답지 않게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문서 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근처까지 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무슨 종류의 문서인지 확인했다.
‘의뢰서인데?’
내용까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없이 의뢰서를 훔쳐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흠!”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내가 왔음을 첸버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제야 첸버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하군. 자네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어.”
“보아하니 의뢰서 같은데, 심각한 의뢰라도 들어온 겁니까?”
“……내 고향에서 온 의뢰서라네.”
당연한 말이지만 난 첸버의 고향까진 알고 있지 못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더군.”
“저한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칠흑의 조각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어쩐지…….
첸버가 왜 이리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직 인류는 칠흑의 조각과 맞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실력자인 반드와 가르시아가 고전을 면치 못한 것만 봐도 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려주세요.”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더니 주기적으로 산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 모두를 잡아먹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하더군.”
“설마 제물을 계속 바치고 있는 겁니까?”
“그러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을 테니까. 인질로 잡힌 셈이지.”
“마을을 떠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시도는 해 본 거 같은데, 도중에 검은 괴물이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고 하더군. 군대를 동원해도 워낙 강력한 놈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당하기만 한 거 같아.”
마을 전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인가?
골치 아픈 일이다.
“그곳의 영주인 벤제머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지. 그 친구도 골치가 많이 아플 거야.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곳에서 계속 살자니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고……. 그래서 나에게까지 이런 의뢰서를 보내온 거 같은데.”
“용병들을 파견하면 될 일 아닙니까?”
“군대조차 제압하지 못한 녀석이야. 일개 중대가 전멸했다고 하는데 우리라고 손을 쓸 수 있겠나?”
“정부에선 방치만 하고 있습니까?”
“내가 태어난 곳은 중립 지역이야. 무슨 뜻인지 아나?”
알고 있다.
중립 지역에 위치한 마을과 도시는 어느 국가에 포함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된다.
즉, 벤제머가 영주로 있는 마을은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쪽 사람들은 난감하겠네요.”
“그렇지…….”
곤란에 처한 표정을 짓는 첸버.
어디 보자, 내가 첸버하고 친밀도가 몇이었지?
-친밀도 진행 상황
-첸버 : +59
왜 이렇게 낮아?
지금까지 첸버에게 해 준 게 얼마나 되는데!
진작 친밀도를 MAX 찍고도 남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남의 친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니, 야속한 남자구먼!
앞으로 41을 올려야 한다 이 말이지?
적진 않다.
그래도 이번 일 한번 클리어해 주면 41 정도는 우습게 오를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큰 건수다.
첸버와 친밀도를 올려 두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대인 기피증 있는 단장인지 뭐시기인지보다 차라리 첸버와 친해지는 편이 더 득을 많이 볼 것 같았다.
게다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첸버는 최대 친밀도를 찍으면 무슨 칭호를 줄까?’
등장인물마다 친밀도를 찍으면 특별한 칭호를 준다.
첸버 정도면 괜찮은 칭호를 주지 않을까?
좋아, 결정했어.
“그 의뢰, 제가 맡겠습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칠흑의 조각이랑 연관된 의뢰야.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어. 굳이 너희 R팀이 이 위험에 뛰어들 필요는 없어.”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의뢰는 저한테 주세요.”
“…….”
첸버는 말없이 한동안 나를 응시했다.
요즘 용병계는 칠흑이랑 연관되어 있는 의뢰는 가급적이면 회피하려고 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의뢰를 달라고 하고 있으니, 첸버 입장에서 보면 ‘이 녀석이 미쳤나?’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고맙다. 이 은혜는 내 결코 잊지 않으마!”
첸버는 내게 빚을 하나 진 셈이다.
물론 해결하고 나서의 이야기겠지만.
* * *
칠흑의 존재는 굉장히 위험하다.
아무리 엘리트 용병 집단인 블루로즈라 하더라도 칠흑을 상대로는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이번 의뢰는 나 혼자 맡으려고 했다.
그러나 내 부하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나를 향한 충성심이 높았다.
“저도 같이 데려가 주시기를!”
가르시아가 자신의 가슴을 텅텅! 치면서 말했다.
뒤이어 반드와 에나도 한마디씩을 보탰다.
“흑염룡의 소유자를 혼자서 위험한 곳에 보낼 순 없지. 네가 죽는 순간 흑염룡 리트미스가 깨어나 세상을 집어삼킬 테니까.”
“대장님, 벤제머라는 영주가 있는 그 마을은 춥다고 들었어요. 오랜만에 한기를 느끼고 싶으니 저도 꼭 데려가 주세요!”
본인을 같이 데려가 달라는 목적은 같았으나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충성심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뭐, 그냥 좋게 생각하자!
그러나 이들을 다 데려갈 수는 없었다.
“딱 두 명만 데려간다.”
용병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지목할 인물의 이름을 호명했다.
“에나, 그리고 드레인 선배.”
“잠깐만, 대장! 난 지원조차 안 했는데 왜 나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난 싫어! 싫다고! 죽어도 안 가!”
억울함을 마구 표출하는 드레인이었다.
정작 가고 싶다는 사람들을 놔두고 드레인의 이름을 불렀으니, 그 누구도 내 결정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드레인을 부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 필요해서요. 선배라고 하면 꼰대……가 아니라, 친화력의 달인이잖아요? 낯선 사람이랑도 금방 친해지고.”
“방금 너, 꼰대라고 하지 않았어?”
“잘못 들은 겁니다. 아무튼 그곳 주민들은 칠흑의 조각 때문에 부쩍 예민한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마을 주민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면 선배의 힘이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하단 말이지? 하, 하긴 난 여기 R팀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니까! 엣헴!”
예전부터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드레인은 참 다루기 쉽다.
꼰대, 수다쟁이 기질이 다분해서 주변 사람들을 쉽게 지치게 만드는 게 단점이지만, 그것 말고는 나름 준수하게 써먹을 수 있는 등장인물이다.
‘전투력도 나쁘지 않고 말이지.’
에나는 말할 필요도 없다.
R팀에서 유일한 마법사이기도 하며 심지어 전투력 또한 어마어마하다.
안 데려갈 이유가 없다.
나머지 용병들은 이곳 나울에서 대기하면서 아직 소화하지 못한 의뢰들을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려 뒀다.
“가르시아, 나 없는 동안 네가 여기를 책임져야 한다. 잘할 수 있겠지?”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대장님. 그리고 부디 몸조심하시길!”
“고마워.”
역할 분배는 끝났다.
내일 당장 출발하기로 했다.
‘칠흑의 조각이라…….’
어쩌면 라스도 소문을 듣고 올지도 모른다.
물론 올지 안 올지는 라스 본인만 알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