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추종자들 (1)
빙판 호수 쪽으로 다가온 휴즈는 감탄 섞인 목소리를 냈다.
“오, 설마 진짜로 타우르를 잡을 줄은 몰랐군.”
솔직히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 녀석을 정말 내가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휴즈가 나에게 중요한 힌트를 준 덕분에 잡을 수 있었다.
타우르의 배 위에서 내려온 나는 휴즈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휴즈 님 덕분입니다.”
“난 너에게 내가 알려 준 걸 다시 한번 떠올려 보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네가 내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면 애초에 떠올리지도 못했을 테지.”
뿌듯함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휴즈.
그의 시선은 곧 타우르에게 향했다.
“이게 있으면 이번 겨울은 사냥 안 하고 다녀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나 보다.
어렴풋이 눈치챘다.
타우르의 사체를 가지고 싶어서 저러는 거다.
뭐, 상관없겠지.
애초에 난 타우르의 부산물을 노리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으니까.
“휴즈 님이 가지셔도 됩니다.”
“왠지 내가 네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느낌이 들어서 좀 미안한데.”
“제가 휴즈 님에게 드리는 수업료라고 생각하세요.”
시중에 타우르의 사체가 비싸게 팔린다는 건 휴즈한테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과감하게 소유권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난 휴즈에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 * *
하산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1달 조금 넘게 이곳에 머물다 보니 모든 것에 정이 들었다.
가방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을 때. 마침 휴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가져가라.”
천으로 감싸인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묵직했다.
돈은 아닌 거 같은데…….
“이게 뭡니까?”
“타우르의 어금니다. 상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거다.”
“안 주셔도 되는데…….”
“내가 필요한 건 이번 겨울을 날 수 있는 식량뿐이었으니까. 어금니는 필요 없다. 그러니까 가져가.”
저런 걸 소위 츤데레라고 하는 걸까? 말투는 저래도 챙겨 줄 건 다 챙겨 준다.
“선물 감사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네스킨 산맥을 떠나시거든, 저에게 알려 주세요. 블루로즈단의 파랑새를 찾으면 될 겁니다.”
“난 평생 여기서 살 거다. 어디 갈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인간 불신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휴즈는 속세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까운 캐릭터다. 칠흑을 상대로 대활약을 펼쳐 줄 수 있는 캐릭터인데…….
그러나 본인이 싫다니 어쩔 수 없었다.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휴즈에게 머리를 숙여 작별 인사를 고했다.
휴즈는 얼른 가라면서 손을 훠이 내저었다.
네스킨 산맥에 온 지 정확히 45일이 지난 뒤.
나는 권왕이라 불리는 남자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하산했다.
* * *
2달간의 달콤한 휴가를 끝마친 우리들.
이제부터 슬슬 밀렸던 의뢰를 하나둘씩 소화해야 했다.
막 휴가에서 복귀한 탓이라 그런지 우리에겐 굵직한 의뢰는 배정되지 않았다.
나도 지금은 딱히 의뢰에 욕심이 생기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할 일이 있었다.
로그 상단 본사로 찾아갔다.
“라그너 있어?”
“불러오겠습니다!”
젊은 남자가 빠르게 라그너가 있는 사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잠시 후,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온 라그너는 나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로인 님! 휴가는 어떻게…… 잘 보내셨나요?”
“휴가답지 않은 휴가였지. 그보다 요즘 많이 바쁘지?”
“예, 그래도 마음은 행복합니다.”
아마 그럴 거다.
나는 라그너에게 주기적으로 새로운 유통 경로 소스를 던져 줬다.
아무도 모르는 정보를 나는 알고 있다.
이게 다 소설 속 내용을 미리 봐 둔 덕분이었다.
덕분에 로그 상단은 파이어 스톤, 설탕뿐만 아니라 다양한 품목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는 상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미 로그 상단의 상단명을 모르는 상인들은 없었다.
하나 아직 멀었다.
기왕 시작한 거, 나는 웨일을 제치고 대상인이라는 호칭을 가져오고 싶었다.
세계 제일의 부자! 이 얼마나 달콤한 수식어란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 라그너가 좀 더 힘을 내 줘야 한다.
“바쁜 와중에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다음 주에 풀로 시간 비울 수 있어?”
“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라그너의 눈빛에 불안함이 감돌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라그너는 ‘혹시 상단에 악영향을 미칠 만한 일이라도 발생했나?’ 싶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이 반응이 꽤 재미있다.
라그너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아니었다.
“나랑 어디 좀 가 줬으면 해서.”
“어디입니까?”
“파리마.”
“예……?”
이제 파리마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칠흑의 조각이 벌인 바로 그 사건, 파리마 사건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파리마는 안 좋은 의미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곳은 왜 가시려는 겁니까?”
“사고 싶은 게 있어.”
“혹시 경매에 참가하실 생각입니까?”
“맞아.”
파리마 사건 덕분에 파리마라는 도시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안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열리는 경매장은 꽤 유명하다.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희귀한 물품들이 경매장에 자주 올라오기 때문에 파리마를 찾는 상인과 귀족의 숫자가 꽤 된다.
“사야 할 물건이 무엇입니까?”
“트리올이라는 몬스터의 사체.”
“아하!”
라그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올이라는 몬스터는 굉장히 희귀하다.
희귀한 만큼 트리올의 부산물은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만간 파리마 경매장에 트리올의 사체가 통째로 올라올 것이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사야 한다.
“희귀한 물품이긴 한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로인 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하는데 제가 어찌 싫다고 하겠습니까. 다음 주 일정은 통째로 비워 두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해. 바쁜데 내가 시간 빼앗는 거 같아서.”
“괜찮습니다. 오히려 로인 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성스럽군.
라그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둬서 다행이다.
* * *
파리마로 향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라그너는 내 뒤에서 대기 중인 일행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로인 님? 뒤에 계신 분들도 같이 파리마로 가는 겁니까?”
“응.”
일행으로 드레인, 가르시아 그리고 반드를 데려가기로 했다.
라그너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경매장에 참가하는 건데 로인 님하고 저만 같이 가면 되지 않습니까? 굳이 용병분들까지 대동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슬슬 출발하자. 가르시아, 말들 데려와.”
“예, 대장님!”
누가 보면 의뢰받고 몬스터와 전투하러 가는 것으로 볼지도 모른다.
라그너의 말이 맞다.
사실 이들을 데려갈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용병들을 데리고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조만간 라그너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말을 타고 곧장 파리마를 향해 달려갔다.
편도로만 2일을 소모해 드디어 파리마에 도착했다.
파리마 사건 때문에 한때 도시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흉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원래의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좋은 현상이다.
과거의 아픔에 언제까지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으니까.
숙소를 잡은 후에 나는 라그너에게 내일 경매장에 올라올 물품 명단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혹시 몰라 미리 구해 뒀습니다.”
“땡큐.”
일 잘하네.
부하 직원이 유능하면 상사는 편하다.
내가 원하는 트리올의 사체는 경매가 시작되고 2일이 되는 날의 오전 파트에 경매 단상에 올라온다고 적혀 있었다.
트리올의 사체를 사려는 데에는 다 깊은 뜻이 있었다.
2권 후반부였을까?
칠흑의 조각이 트리올의 사체를 잠식한다.
검은 괴물로 재탄생하게 된 트리올은 라스 일행과 맞붙게 된다.
주인공 일행은 힘겹게 트리올을 쓰러뜨린다.
그러나 그 승리에는 크나큰 희생이 뒤따랐다.
라스의 절친이자 동료인 엔드라가 트리올과의 전투로 인해 사망한다.
그 이후 라스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솔직히 여기에서 왜 엔드라가 죽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의미한 죽음이다.
엔드라는 더 오래 살아남아서 라스의 든든한 동료로서의 역할을 다해 줘야 한다.
그런데 너무 허무하게 죽어 버렸으니, 만약 내가 작품을 수정한다면 이 부분은 반드시 체크해서 작가 수정 원고를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곳, 파리마까지 오게 되었다.
‘트리올의 사체를 누가 사들이기 전에 내가 먼저 가로챈다!’
이것이 1차 목표다.
* * *
파리마 경매장은 3일 동안 열린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희귀한 물품들이 파리마에 모여든다.
도난 문제 때문에 상인들은 본인들의 소중한 거래 물품을 지키기 위해서 용병들을 다수 고용한다.
때마침 내가 아는 얼굴이 보였다.
“게럴!”
멀리서 외치는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게럴은 바로 반응했다.
“로인이잖아? 너도 의뢰받고 왔냐? 가만, 옆에 보니까…… 라그너 아니야? 로그 상단 대표! 너, 로그 상단의 의뢰를 받고 왔구나!”
저 녀석은 아직 내가 로그 상단의 공동대표임을 모르는 듯했다.
하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외부 행사는 나 대신 라그너 홀로 계속 참가해 왔으니까.
나는 용병 일로 바빠서 상단 대표로 행사에 참가해 본 적이 없다.
라그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뢰라니요. 로인 님이야말로 로그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예에?”
게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초지종을 들려주는 라그너.
그제야 게럴은 라그너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대박이네……. 네가 장사에도 소질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워낙 다재다능하지. 그보다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바슬라도 있다는 소리잖아.”
둘은 콤비니까 분명 바슬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 바슬라 녀석은 감기 걸려서 숙소에서 쉬고 있어. 하여튼 나약한 녀석이라니까. 고작 비 한번 맞았다고 그새 감기라니……. 의뢰인 보기가 민망하더라.”
“하하, 그렇겠네.”
“아무튼 난 바쁘니까 먼저 간다. 나중에 시간 되면 술이라도 한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술값 계산, 네가 안 했지!”
“자, 라그너, 시간 없으니까 우리는 먼저 가죠.”
“야, 거기 안 서?”
기억력도 참 좋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게럴을 뒤로한 채 나는 라그너와 함께 경매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드레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드와 가르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장, 두 녀석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볼일이 있다고 하면서 훌쩍 나가 버리던데…… 어쩌지?”
드레인은 난감하다는 듯이 내게 의견을 구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괜찮아요. 그 두 사람한테는 제가 따로 일거리를 줬으니까요. 자, 가시죠, 선배.”
“어? 어어, 그래. 근데 무슨 일거리를 줬는데?”
“나중에 다 알게 될 겁니다.”
머지않아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