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56화 (56/240)

# 56

머리가 안되면 힘으로 (2)

드디어 골치 아픈 게 나왔다.

미로.

솔직히 이런 건 안 나왔으면 했는데, 결국 나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미로 곳곳에는 함정도 숨겨져 있는 듯했다.

공중으로 날아가진 못한다.

그렇다는 건 결국 미로를 통과해야 한다는 뜻인데…….

용병 한 명이 자신이 아는 토막 상식을 들려줬다.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한쪽 벽에 손을 대고 계속 이동하다 보면, 출구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시범까지 보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벽에 손을 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벽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헉!”

조금만 더 손바닥을 가까이 가져갔으면, 용병의 손은 지금쯤 벌집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에나는 긴 머리카락 끝을 배배 꼬았다.

“벽에 손 짚고 가는 건 포기해야겠네요.”

이걸 설계한 그 건축가라는 양반, 살아 있다면 정말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다.

용병들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장님?”

이것도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로를 가장 쉽게, 그리고 확실하게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나는 그 방법을 직접 보여 주기 위해 미로 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뒤쪽 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벽이 무너졌습니다!”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무기를 들어라!”

용병들은 침착하게 대형을 갖췄다.

반드와 에나도 곧장 자세를 잡았다.

나도 처음에는 네피족이 습격해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벽을 부수고 나온 여덟 명의 사람들.

그중 거대한 망치를 든 남자가 우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네들은 뭐야? 왜 여기에 있어? 설마 너희도 몬스터냐?”

그럴 리가 있냐?

오히려 내가 저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너희는 누구냐?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중에 문제가 발생했다.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친밀도를 올리세요.

엑스트라급은 굳이 친밀도를 올리지 않아도 바로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 말은 곧…….

‘이 녀석, 엑스트라급 이상이란 뜻이잖아?’

남자의 인물 정보 창을 응시했다.

-얀

-인물 등급 : 단역

-종합 능력 : A

-신규 용병 조직, 스트레이트를 창설한 용병대장. 뛰어난 싸움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다. 욱하는 성격을 주의해야 한다.

단역급은 웬만하면 기억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얀’이라는 인물은 없었다.

‘3권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등장인물인가?’

그럴 수 있다.

나는 소설을 다 읽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등장인물, 내가 모르는 사건이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나저나 욱하는 성격이라니, 하필 걸려도 성질머리 더러운 녀석에게 걸려 버렸다.

운이 안 좋군.

“반드.”

나는 반드를 불렀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반드는 이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지?”

“나 대신 말 좀 전해 줘.”

“직접 말하면 되잖아.”

“흑염룡을 봉인한 여파로 인해 나는 가끔 말문이 막힐 때가 있어. 화술을 봉인당하는 거지. 그러니 네가 나를 대신해 말을 전해 줬으면 좋겠어.”

“오, 그렇군!”

둘러대기 참 귀찮다.

반드는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내 말을 고스란히 전했다.

“몬스터는 아니고 블루로즈단 R팀 단원들이다.”

“블루로즈단?”

나는 팔목 보호대를 들었다.

얀에게 잘 보이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용병들 중에서 블루로즈단 마크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얀은 용병대장이다.

이 마크를 모르진 않을 터.

내 예상대로 얀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맞긴 한가 보네. 그나저나 그거, R팀 대장 마크 같은데. 설마 네가 로인이라는 녀석이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근데 왜 말을 못 해?”

반드가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그냥 목 상태가 안 좋아서 말 못 한다는 핑계를 미리 댔다.

얀은 뭔가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업계 유명 인사랑 이야기 좀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네.”

나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볼 필요는 있었다.

‘어쩌면 저 남자가 3권 이후부터 대활약하는 인물일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직 《델리피나 전기》의 저자, 카인만 알고 있겠지.

단역들과 친해지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먼저 악수를 청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얀은 내게 물었다.

“이거, 미로지?”

“…….”

말을 못 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체했다.

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의 던전은 하나같이 퍼즐, 퍼즐, 퍼즐. 죄다 머리 쓰는 일투성이네. 마음에 안 들어.”

그러더니 갑자기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망치를 들어 올렸다.

이후에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망치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얀이 미로를 향해 망치를 그대로 내려쳤다.

쿠우웅!

던전이 흔들릴 정도였다.

망치질 한 방에 미로의 벽들이 순식간에 박살이 나 버렸다.

“이제 길이 생겼네. 자, 가 볼까?”

뭐 저딴 녀석이 다 있나?

‘그보다 저 망치, 대체 정체가 뭐야?’

자세히 망치를 들여다봤지만,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크기가 멋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데. 아이템에 달린 스킬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나?’

그냥 레어 등급의 아이템이다.

옵션으로 달린 스킬도 없었다.

갈수록 저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 * *

문을 통과한 순간, 네피들이 우리를 습격했다.

얀의 스트레이트와 나의 블루로즈단 R팀은 서로 연합을 해 네피를 하나둘씩 격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스트레이트는 새로 조직된 용병 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R팀 용병들과 거의 호각을 다툴 정도로 비슷한 전투력을 뽐냈다.

잘 싸운다.

실력이 나쁘지 않다.

네피들을 전부 쓰러뜨린 뒤, 얀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 듣던 대로 제법이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싸우는 것 같아서 놀랐어. 사실 난 소문을 잘 안 믿거든. 거품이 많이 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해했네, 미안.”

먼저 악수를 청하는 얀.

나는 말없이 그의 손을 맞잡아 줬다.

-얀과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대화할 수 있는 최소 기준치를 넘었습니다.

-이제부터 얀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나이스.’

역시 남자는 말보다 주먹질이 더 잘 통할 때가 있구나.

“너도 잘 싸우던데?”

내 목소리를 들은 얀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목 상태가 안 좋다며?”

“싸우다 보니 좋아졌어.”

“특이한 경우네. 뭐, 상관없겠지. 이렇게 직접 목소리 들으면서 대화 나누는 게 훨씬 편하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놈의 개연성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만날 때마다 매번 스트레스다.

‘빨리 전체 친밀도를 올려 주는 칭호를 따 둬야 하는데……. 고민이다, 고민.’

안으로 들어갈수록 네피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졌다.

동시에 나는 직감했다.

“곧 보스 몬스터가 나올 거 같은데.”

“동감이야.”

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반드와 에나, 그리고 양 팀의 용병들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이 문 건너편에 보스 몬스터가 있다.

왠지 내 촉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얀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그럼 가 볼까?”

얀이 먼저 문손잡이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나는 얀의 손목을 낚아챘다.

“잠깐만.”

“왜 그래, 갑자기?”

“잊은 거 없어?”

“잊은 거라니?”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너희가 이곳 던전에 온 목적이 뭐야?”

얀은 숨김없이 목적을 말해 줬다.

“벨라시오닉의 보물.”

역시.

내 이럴 줄 알았다.

데르킨 백작 말고도 많은 이들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노리고 있다.

수수께끼 던전에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잠들어 있다는 정보가 새어 나갔다면, 분명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용병을 보내 보물을 찾아오게 의뢰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내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한편, 내 반응을 본 얀은 혹시나 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설마 너희도?”

“맞아. 우리도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면 곤란한데.”

갑자기 얀의 표정이 변했다.

“미안하지만 보물은 우리에게 양보해야겠어.”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고 있지?”

“…….”

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다.

내가 어떤 답변을 들려줄 건지 얀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싫다고 하겠지.”

“잘 아네.”

서로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누가 먼저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차지하느냐!

선점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다.

드르륵!

문을 열어젖힌 얀은 가장 먼저 건너편 방으로 넘어갔다.

얀의 뒤를 이어 내가, 그리고 블루로즈단 R팀과 스트레이트 용병들이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이건 또 뭐다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얀 역시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

그것은…….

“사막이 왜 던전 안에 있어?”

* * *

상식적으로 사막이 던전 안에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수수께끼 던전의 공간은 무한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곳은 정말로 사막 그 자체였다.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위에는 하늘도 있었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이럴 때에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게 제일이다.

“에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환각 마법이에요. 근처에서 강한 마력이 느껴지네요. 아마도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만들어 낸 환상인 거 같아요.”

에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모래사장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수수께끼 던전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던 네피족이었다.

여태껏 상대해 온 네피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자랑했다. 눈으로 쭉 훑어도 백 마리는 훌쩍 넘어 보였다.

반면 이쪽은 스무 명도 채 되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은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저 길쭉한 놈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벨라시오닉의 보물 같은데.”

네피들의 족장으로 보이는 놈이 지닌 기다란 스태프가 수상쩍어 보였다.

바로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일루전 스태프

-등급 : 레전드

-마력 +550

-지력 +120

-벨라시오닉이 삼켰던 보물. 환각 마법에 특화된 아이템. 마법을 전혀 모르는 자라 하더라도 일루전 스태프를 활용하면 대규모 환각 마법을 펼칠 수 있다.

-특수 옵션, 환상세계 스킬 사용 가능

얀, 저 녀석.

생각보다 감이 좋은 남자다.

‘아이템 정보 창을 볼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저게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린 걸까? 신기하네.’

어쨌든 저 스태프가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우리가 취할 행동은 정해졌다.

“저놈 잡아!”

나는 한 놈만 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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