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54화 (54/240)

# 54

악당과 마주하다 (2)

주인공 라스와 초반에 대립각을 세우는 메인 악역 중 한 명, 데르킨 백작.

그의 인물 정보 창을 살폈다.

-데르킨 백작

-인물 등급 : 조연

-종합 능력 : S

-칠흑의 조각에 잠식당한 남자. 그러나 독한 정신력으로 오히려 칠흑의 조각을 역으로 지배하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었다. 겉과 속이 매우 다르다. 그의 첫인상에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상대로 엑스트라는 아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말도 못 붙인다.

혹시 몰라서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목 상태가 좋지 않음을 어필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데르킨 백작은 우리들을 쭉 훑었다.

그중에서 가르시아를 가리켰다.

“자네가 로인이라는 남자인가? 명성에 걸맞게 매우 강해 보이는군.”

틀렸어, 이 아저씨야!

가르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니라 이분이 저희 대장님입니다.”

가르시아가 가리킨 사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였다.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병사 한 명이 내게 외쳤다.

“무엄하다! 감히 백작님이 계시는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다니! 그 마스크, 썩 벗지 못할까!”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입하고 코만 가리는 마스크가?

이거 하나 착용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역시 악당의 수하는 성깔도 더럽다.

나는 드레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드레인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나를 대신해 말을 전했다.

“대, 대장은 지금 목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해 두지 못하면, 의뢰 수행 당일 날에 강제로 불참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부디 야,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레인은 말을 더듬었다.

그런 뒤에 ‘왜 나에게 이런 역할을 시켜!’라고 따지듯이 나를 바라봤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상대가 조연이라서 나는 말도 못 붙이니 말이다.

병사는 어이가 없는지 내게 다시 한번 강력한 경고를 날리려 했다.

그러나 데르킨 백작은 손을 뻗어 병사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됐다! 목 상태가 안 좋다는데 억지로 마스크를 벗게 할 수는 없지. 의뢰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데르킨 백작의 모든 관심사는 오로지 벨라시오닉의 보물에 쏠려 있을 것이다.

게다가 데르킨 백작은 내가 이번 의뢰를 받아 줬으면 한다고 대놓고 지목까지 했다.

내가 이런 무례를 저지른다 하더라도 크게 뭐라 하진 않을 것이다.

데르킨 백작은 내게 다가왔다.

“마침 근처에 일이 있어서 머무르다가 R팀 멤버들이 여기에 주둔지를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던전 공략까지 앞으로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부디 좋은 결과를 들고 왔으면 좋겠군.”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이후에 짧은 악수를 나눴다.

손을 잡은 순간, 나는 느꼈다.

별로 느끼고 싶지 않은 불길한 기운을.

검은 오라가 풍겨 나오는 듯했다.

음침하고, 그리고 섬뜩한 사기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제대로 잠식되었구먼.’

보통 잠식 3단계에 접어들면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데르킨 백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자들이 더 무섭지.’

실제로 라스는 데르킨 백작의 함정에 빠져 고전을 면치 못한다.

주인공 보정이 없었더라면 라스는 이미 데르킨 백작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냥 지금 데르킨 백작을 없애 버릴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내 실력으로 데르킨 백작을 없앨 수 있을지 알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직 주인공보다도 약하다.

주인공이 워낙 사기적인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지고 있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 주인공조차 데르킨 백작을 죽이지 못했다.

내가 덤벼든다 하더라도 승산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이라 함은…….

‘보물 빼돌리기지!’

최대한 데르킨 백작의 힘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나의 목표 중 하나다.

* * *

던전으로 향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R팀 전부가 가는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 호위 임무가 끝나지 않은 멤버들도 있었다.

던전으로 떠날 용병들은 나를 포함해 총 열두 명이었다.

핵심 멤버들은 다 있었다. 드레인, 가르시아, 반드, 에나까지.

가는 와중에 나는 드레인으로부터 던전에 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이름하여 ‘수수께끼 던전’이라 불리는 곳인데, 자연적으로 생성된 곳은 아니고 주티라는 건축가가 만든 건축물이었지. 원래는 액티브한 대형 퍼즐, 추리 게임을 좋아하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만들었던 건물이라고 하더군. 그러다가 갑자기 몬스터들이 들이닥쳐서 지금은 몬스터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버렸지.”

내가 있던 세계에서 치자면 거대한 방 탈출 게임으로 무장된 던전이라고 할까?

그래서 별칭이 수수께끼 던전이었다.

“근데 이게 위험한 게…… 함정이 있는데, 실제 함정이래. 그러니까…… 발동되면 목숨을 잃는 그런 부류의 함정 말이야.”

“아니, 놀이용으로 제작된 거라면서요.”

나도 모르게 태클을 걸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아닌가?

그런데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는 함정을 설치했다니.

“처음에는 안전장치가 확실히 되어 있는 시설이었대. 그런데 귀족들이 클레임을 걸어온 거야. 스릴이 부족하다나 뭐라나? 진짜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긴장감 정도는 유발해 줘야 게임이 재미있다는 의견이 많았나 봐. 그래서 주티가 진짜 함정을 설치하게 된 거지.”

“귀족들 취향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건 나도 공감이야. 그래서 결국 그 일이 있었던 탓에 오늘날의 수수께끼 던전이 탄생하게 된 거지. 그런데 후배, 머리 쓰는 일이 많을 텐데, 자신 있어?”

“자신은 있는데 클리어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네요.”

예전에 친구들과 재미로 방 탈출 카페를 몇 번 가 보긴 했다.

다섯 번 정도였나?

그중에서 제대로 탈출했던 적은 두 번 정도에 불과하다.

그 두 번도 힌트를 죄다 얻어 내고 난 다음에, 종료되기 3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경험이 있으니까 할 만은 하겠지 생각하는데…….

“선배는요?”

“난 자신 없어. 가르시아도 머리 쓰는 일은 싫다고 하더라.”

반드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몸 쓰는 일이 좋다고 했다.

에나는 자고 있어서 못 물어봤고.

이럴 때 브레인으로 활약해 줄 인재의 부재가 뼈아프다.

레미 정도 되는 인물이 우리 팀으로 들어와 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그러면 머리 쓰는 일이 와도 걱정은 없을 텐데.

수수께끼 던전은 인근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근처에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라 불릴 만한 생명체는 구경도 못 했다.

가르시아는 정글도로 수풀을 잘라 내며 드레인에게 물었다.

“근방에 몬스터는 구경도 못 했는데, 정말 여기가 던전 맞습니까?”

“맞다니까! 나도 처음 와 봐서 확신은 못 하지만, 지도상에는 그렇게 적혀 있어.”

“흐음.”

가르시아뿐만 아니라 병사들 역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반드는 달랐다.

“몬스터는 있어. 우리에게 접근을 하지 않고 있을 뿐. 어둠의 고동이 요동쳐서 그런 것일지도.”

앞에 두 문장만 귀담아들었다.

마지막 문장은 버려도 될 것 같았다.

반드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오감이 뛰어나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 역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반드의 말에 따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 무기를 빼 들었다.

에나도 더운 와중에―그녀에게만 해당되는 더위였지만― 언제든 마법을 구현할 수 있도록 캐스팅 준비를 마쳤다.

근처에 어떤 몬스터가 서식하는지 우리는 그 어떠한 정보도 들을 수 없었다.

목격 정보가 희박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곳까지 오는 모험가도 별로 없었다.

소설 속에서 수수께끼 던전은 언급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이 적절하게 섞였다.

입구 쪽에 도달했을 무렵, 우리를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떼로 몰려들었다.

길쭉한 팔과 다리. 키는 죄다 2미터는 넘어가는 듯했다.

놈들은 각각 창과 방패를 들고 우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네피족이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가르시아는 능숙하게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수께끼 던전은 몰라도 네피족은 뭔지 안다.

기다란 신체가 특징이며, 고블린들처럼 무리 생활을 하는 몬스터로 알고 있다.

신체보다는 놈들이 직접 만든 창과 방패를 무기로 사용한다.

긴 공격 범위가 네피족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가르시아는 우선 방패를 들고 가드를 단단히 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에나가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안 시간을 벌어야 했다.

“반드! 우리 차례다!”

내 말에 반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의 수비 진영에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크큭, 그래야 내 대장답지!”

속도 하면 역시 반드다.

반드는 빠른 움직임을 이용해서 삼십여 마리 되는 네피들을 농락했다.

네피들은 반드를 잡기 위해 움직였지만, 반드는 저들의 공격을 웃으면서 피해 냈다.

“네놈들 정도면 라드리치 2레벨까지 개방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대해낼 수 있겠군, 크큭!”

반드가 말하는 라드리치 1레벨이니 2레벨이니 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반드가 만들어 낸 중2병 설정이다.

레벨을 높여 개방시킬수록 본인의 능력치가 올라간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그런 설정이라고 알고 있으면 된다.

반드가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나는 네피들을 한 마리씩 골라잡아 각개격파 할 수 있었다.

길쭉길쭉하게 생겼지만, 맷집은 약하다.

주먹 한 방에 ‘툭!’ 하고 허리가 부러졌다.

내 펀치력이 강한 것도 있지만, 이들의 몸이 약한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놈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없애 가는 동안, 드디어 에나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고클래스 공격 마법, 아이스 필드가 펼쳐졌다.

일정 범위 이내에 있는 타깃들에게 강력한 빙속성 마법 대미지를 입힘과 동시에 빙결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원래는 적군, 아군 가릴 것 없이 마법이 발동된다.

그러나 에나는 나와 반드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런 세세한 컨트롤은 굉장히 어렵다.

그럼에도 에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이런 컨트롤을 해 냈다.

‘역시, 비싼 돈을 들여 영입한 보람이 있군!’

빙결 상태가 되어 버린 몬스터들은 우리들에겐 샌드백이었다.

“돌격!”

가르시아의 외침에 용병들은 기세 좋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드레인도 롱 소드를 빼 들고 얼어붙은 네피들을 썰어 넘겼다.

그 많던 네피들은 사체가 되어 산을 이루었다.

나와 반드의 시간 끌기, 그리고 에나의 빙결 마법과 용병들의 마무리가 만들어 낸 합작이었다.

이게 팀플레이지!

“고생했어.”

나는 용병들에게 수고가 많았다는 말로 격려했다.

하나 아직 상황이 끝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여기가 수수께끼 던전의 입구인가?”

입구 앞에 선 나는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던전 전체를 훑었다.

크기가 크진 않다.

그러나 이곳에 몬스터와 함정이 바글바글할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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