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53화 (53/240)

# 53

악당과 마주하다 (1)

히든 칭호 퀘스트를 클리어했더니, 또 하나의 히든 칭호가 등장했다.

끝나지 않는 숙제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어떤 히든 칭호일지 모르겠지만, 전체 등장인물 친밀도를 올려 주는 효과 같은 칭호라면 오히려 내겐 땡큐다.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당연한 걸 물어보네. 확인해야지. 안 하면 쓰나.’

-칭호 : 이놈의 인기는 여전하네, 여전해!

-효과 : 조연 이하의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친밀도가 +5 가산되어 적용됩니다.

-칭호 획득 조건 : 조연 인물(5인 이상)의 친밀도를 최대치로 만드세요.

-현재 진행 상황 : 0/5

이번에는 단역 이하가 아닌 조연 이하다.

‘나쁘지 않은데?’

히든 칭호라는 거, 생각보다 완전 꿀이다.

물론 얻는 조건이 쉽진 않다.

솔직히 단역 다섯 명은 어찌어찌 해볼 만하다.

그러나 조연 다섯 명은 많이 힘들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런 건 천천히 하면 돼.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충분히 딸 수 있는 칭호니까.’

칭호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된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리오나.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몸이라도 안 좋아? 아까 아버지……가 아니라, 공작님이랑 대련하다가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 아니야? 너 많이 맞았잖아.”

“그랬지.”

생각해 보니 나, 꽤 많이 맞았구나.

그래도 아픔은 없었다.

저 정도면 괜찮다.

라크스 공작이 마음먹고 진심으로 나를 공격했더라면 어땠을까?

그게 궁금하긴 했다.

그래도 일부러 맞고 싶진 않다.

“그냥 일찍 일어나서 좀 피곤한 것뿐이야. 아침잠 조금만 더 자다가 밥 먹고 바로 출발 준비해야지. 너는 언제 돌아갈 거야?”

“내일모레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 너무 오랫동안 대장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까. 레임스에게도 미안하고.”

“하긴, 그렇지.”

레임스가 다 좋은데, 욱하는 게 좀 있어서 대장 자리에는 안 어울린다.

사람은 나쁘진 않은데, 인성과 대장의 자격은 별개니까.

리오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나는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그냥 밥만 먹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단역 이하 등장인물들과의 친밀도를 +10이나 올려 주는 칭호를 얻게 되다니.

완전 개꿀이다.

* * *

R팀 본거지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임무에서 복귀한 용병들이 다수 있었다.

절반 정도는 돌아온 것 같다.

나를 보자마자 용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90도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장님!”

“어, 그래. 편히 쉬고들 있어.”

이들에게 손짓을 하면서 편하게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두머리라는 느낌이 확 산다.

그래, 이런 맛도 있어야지!

얼굴 한 번씩 봤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짐 풀고 샤워한 후에 꿀잠이나 자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의 이런 원대한 계획은 가르시아의 보고에 의해 무참히 박살 나고 말았다.

“대장님, 파랑새가 대장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양반이 또? 이번에는 무슨 일로 왔대?”

“얼굴 보고 직접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아…….”

불길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니, 나 여러 번 굴렸으면 됐지, 또 굴리려고 찾아온 건가?’

불만이 치솟아오르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내가 유능하다 해도 그렇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고 하네.

블루로즈단 때려치우고 확 독립해 버려?

아래로 내려가 파랑새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착석했다.

파랑새는 피식 웃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군.”

“요즘 일을 너무 많이 해서요. 어깨가 너무 뻐근하네요. 어휴, 어깨야…….”

내가 어깨를 두드리자, 가르시아가 다가와 안마를 해 주기 시작했다.

근육질의 남자가 힘을 주고 어깨를 만져 주니 확실히 시원하긴 하다.

‘나 귀한 몸이라고. 엑스트라긴 하지만.’

파랑새는 나의 이런 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괜찮은 건수가 들어왔어. 아마 블루로즈단이 창설된 이래 최대로 큰 프로젝트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거야.”

“뭔데 프로젝트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까?”

“보수 금액이 어마어마하거든.”

“얼마인데요? 참고로 웬만한 금액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저는 꿈쩍도 안 할 겁니다.”

“8억 제피.”

“…….”

거절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고 한다.

아니,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의뢰금으로 무슨 ‘억’ 단위를 준다는 거야?

용병 생활을 하면서 의뢰금이 억 단위라는 소리를 들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설마 벨레너의 13난제라도 풀라는 의뢰입니까?”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야. 대신, 거기에 연관되어 있긴 하지.”

“어떤 식으로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벨레너의 13난제 중 하나를 풀어 낸 자네를 의뢰인이 특별 지목했어. 블루로즈단의 로인이란 용병은 꼭 참가해 줬으면 좋겠다고.”

벨레너의 13난제 중 일곱 번째 난제였던 칼바의 용암 동굴을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던 나와 R팀 용병들.

그 일 덕분에 용병업계에서 우리들의 명성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100년 가까이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벨레너의 13난제 중 하나를 해결했으니 주목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뿐만 아니라 나 같은 경우에는 웨일을 칠흑의 조각으로부터 구해 준 영웅이기도 했다.

이제는 용병들 사이에서 내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렇다 보니 가끔 특별 지목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처럼.

파랑새는 내게 좀 더 구체적인 말을 들려줬다.

“수수께끼 던전 안에 있는 아이템을 하나 가져와서 의뢰인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되네. 근데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아이템이 보통 물건이 아니더군.”

“어떤 아이템입니까?”

“벨라시오닉이 삼켰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어.”

드디어 왔구나, 벨라시오닉의 보물!

아이템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는 아이템이라고 하면 단연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리킨다.

이 보물을 탐내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아이템 헌터는 기본이고 귀족, 용병 그리고 칠흑까지.

델리피나 대륙의 모든 혼돈은 칠흑, 그리고 벨라시오닉의 보물에 의해 초래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긴, 요즘 벨라시오닉의 보물에 관련된 의뢰가 뜸했지.’

슬슬 하나 정도는 떨어질 거라 생각하던 찰나였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연결되어 있다면 이 의뢰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나중에 내가 보물을 차지하고, 의뢰인한테 가서 알고 보니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여기에 있었다는 건 헛소문이었다든지 아니면 분실되었다든지 하는 핑계를 둘러대면 된다.

그리고 내가 삼키면 되는 거지.

완벽한 작전이다. 후후후.

도중에 파랑새는 내게 물었다.

“받아들일 텐가?”

“저희 R팀 단독 임무입니까?”

“원한다면 B팀, S팀에 지원 요청을 해도 된다만.”

“아니요. R팀 혼자서 처리하겠습니다.”

“욕심이 많군.”

“원래 용병은 욕심이 많아야 하는 법 아닙니까? 특히 돈 욕심이요.”

“하하! 제대로 배웠군!”

파랑새는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인지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려줬다.

돈도 돈이지만, 내 원래 목적은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다.

어차피 의뢰는 받기로 확정 지었으니 누가 의뢰를 했는지나 들어 볼까?

“의뢰를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귀족이야.”

“이름은요?”

이 순간, 나는 듣지 말아야 할 이름을 듣고 말았다.

“데르킨 백작.”

……위험한 녀석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데르킨 백작은 《델리피나 전기》에서 등장하는 중간 보스 중 한 명이다.

아니, 어쩌면 중간 보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2권까지 다 읽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었으니까.

최종 보스는 칠흑이 맞긴 하지만, 칠흑은 숙주가 필요하다.

칠흑과 동화되어야 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을 거다.

‘그자가 바로 데르킨 백작이지.’

데르킨 백작은 벌써 잠식 3단계에 들어선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칠흑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칠흑의 조각이 지닌 힘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의지가 칠흑의 조각을 역으로 삼켜 버리는 경우는 정말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중 하나가 바로 데르킨 백작이다.

1, 2권 내내 주인공과 대립 구도를 세우면서 끈질기게 라스를 괴롭히는 흑막 중 하나로 나온다.

사일런트 포레스트에 있던 블랙 다이아몬드의 원래 주인이기도 하다.

하나 그건 소설 속 이야기에서 해당되는 내용일 뿐.

이번에는 내가 먼저 블랙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고 삼킨 탓에 데르킨 백작의 손에 블랙 다이아몬드가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 하필이면 데르킨 백작이 이번 의뢰인이라니.

의도치 않게 악당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아니지, 달리 생각해 보자. 데르킨 백작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얻지 못하게 훼방을 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거머쥐게 된 거잖아?’

도중에 내가 가로채면 된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잖아?’

복잡해진 머릿속 실타래를 풀어 갈 때쯤 파랑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즘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와서요. 가끔 사색에 잠길 때가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사춘기는 지난 나이 아닌가. 아무튼 뭐. 다시 한번 묻겠지만…… 의뢰는 받아들일 거지?”

“예. 참가 인원에 제한은 없습니까?”

“없어. R팀 전체를 데려가도 상관없고, 대장 혼자만 가도 상관없고. 그건 대장의 재량이야.”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나는 첸버한테 보고해 둘게. 그리고 이번 의뢰, 대장도 예상하고 있겠지만 꽤 어려울 거야. 보수가 센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아니겠어? 알고 있지?”

“네, 물론이죠.”

이제 나도 용병 생활 짬밥이 좀 된다.

그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저 의뢰인이 데르킨 백작이라는 사실에 좀 놀랐을 뿐.

나머지는 이상 없겠지.

* * *

데르킨 백작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우리 R팀은 던전으로 향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는 동안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대, 대장!”

헐레벌떡 뛰어온 드레인이 나를 다급하게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바, 바깥으로 나와 봐! 지금 당장!”

“왜요? 갑자기 왕이라도 행차하셨나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튼 거물급이야!”

누군가가 왔다는 뜻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인과 함께 바깥으로 향했다.

이미 우리 R팀 본거지 앞에는 다수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오십여 명.

뭐 이리도 많이 데리고들 오셨나 싶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흰색 양복을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남자.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에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흰색을 좋아하는 귀족인가 봐요. 제 마음에 쏙 드네요.”

“……그러냐?”

에나는 화이트 마니아다.

저번에 짐 옮겨 준다고 잠깐 그녀가 사는 집에 가 봤는데, 온통 흰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추위는 덤이었다.

온도를 낮추는 마법진을 집 안 여기저기에 새겨 둔 덕분에 큰 냉장고에 들어간 줄 알았다.

에나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등장한 남자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 후에 나와 우리 R팀 멤버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보는군. 반갑네. 데르킨이라고 하네.”

드디어 델리피나 대륙 희대의 악당과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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