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52화 (52/240)

# 52

라크스 공작 (4)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새벽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충 씻고 저택 바깥으로 나왔다.

“조깅하기에는 딱 좋은 코스네.”

영내를 쭉 둘러볼 겸해서 가벼운 조깅으로 아침을…… 아니, 새벽을 맞이했다.

한 10분 정도 뛰었을 때, 저택 앞에서 몸을 푸는 리오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조깅하는 거야?”

리오나는 내 전신을 훑어보며 물었다.

“어, 체력 단련은 꾸준히 해 둬야지.”

“너 원래 조깅 같은 거 안 하잖아.”

“오늘부터 하기로 했어.”

사람이라는 건 갑자기 변할 때가 있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리오나와 잠시 대화를 나눌 때였다.

또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오나와 아침 훈련을 약속했던 라크스 공작이다.

그는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는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여기에 나와 있나?”

“…….”

리오나에게 눈짓을 했다.

나 대신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리오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이 직접 말하지, 귀찮게.’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놈의 빌어먹을 개연성 시스템 때문에 안 된단 말이지.’

어쩔 수 없이 리오나는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대신 전해 줬다.

“조깅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오호, 좋지. 아침부터 체력 단련이라……. 리오나도 자네를 보고 본받았으면 좋겠군.”

“…….”

리오나는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아마 불만이 많을 거다.

리오나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나는 아침 조깅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왜 갑자기 조깅 타령이냐!

바로 지금처럼 라크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리오나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리오나와의 친밀도가 소폭 하락합니다.

-리오나와의 현재 친밀도는 80입니다.

5나 깎여 나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번 작전의 콘셉트는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다.

어차피 나의 노림수는 리오나와의 친밀도를 최대치로 만드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하기로 했다.

라크스는 빠르게 몸을 풀고 연습용 목검을 들어라.

“바로 시작하지. 아, 자네는 하던 걸 해도 좋네.”

나는 미리 준비한 수첩을 꺼냈다.

-괜찮다면 구경해도 됩니까?

“구경? 상관은 없네만. 재미없는 구경이 될 텐데.”

-공작님의 대련을 직접 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부디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영광까지야…….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군. 알아서 하게.”

-감사합니다.

역시 칭찬에 장사 없다.

사탕발림식 칭찬 공격을 선보이니 라크스 공작은 금세 함락되었다.

리오나의 한숨이 깊어지는 건 덤이었다.

부녀의 대련을 지켜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다른 하인들은 두 부녀의 대결에 큰 관심은 없는 모양인지 제 할 일에 열중했다.

라크스가 사람들은 매번 보던 광경일 테니 신기할 것도 없겠지.

목검을 든 라크스 공작.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전장의 붉은 귀신이라 불리는 게 아니네.’

만약 내가 리오나 입장이라면 어떻게 라크스 공작을 공략해야 할까?

머릿속이 상당히 많이 복잡했을 것이다.

리오나는 침착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했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먼저 선공을 가한 쪽은 예상대로 리오나였다.

리오나의 움직임은 매우 민첩했다.

저번에 메를에서 같이 던전 공략에 나섰을 때보다도 더 좋아진 몸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가 그 유명한 라크스 공작이라는 것이다.

라크스 공작은 몸을 살짝 옆으로 빼면서 리오나의 돌진을 그대로 흘려 버렸다.

“느려.”

라크스 공작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일순간 무게중심을 잃은 리오나였으나, 이내 바로 자세를 잡고 라크스 공작의 일격을 받아 냈다.

터엉!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힘겨루기 대결에 들어가면 리오나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리오나는 그걸 잘 알기에 검을 튕겨 내고 속공으로 유효타를 노렸다.

하나 라크스 공작은 리오나의 이런 노림수에 쉽게 당해 주지 않았다.

회피, 그리고 반격.

동작들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큭!”

리오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세 걸음 물러섰다.

라크스 공작은 이 틈을 노려 리오나의 검을 쳐 냈다.

검을 놓쳐 버린 리오나.

그녀가 사용하던 목검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내 옆에 툭 하고 떨어졌다.

짧은 시간에 승부는 결정되었다.

이번에도 라크스 공작의 승리였다.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리오나가 약한 편은 결코 아닌데……. 라크스 공작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뜻일까?’

리오나는 아무 말 없이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재차 자세를 잡았다.

재도전의 의지가 물씬 풍겼다.

그러나 라크스 공작은 검을 내렸다.

“아서라,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나와의 대련이 아니라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저도 저 나름대로 많은 수련을 거듭해 왔습니다. 아직 그걸 다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다시 검을 들어 주세요, 공작님.”

리오나는 레미와 다르게 라크스 공작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공작’이라 불렀다.

스스로 가문과 동떨어지려고 하는 리오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표현법이 아닐까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라크스 공작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렇게 부녀지간의 대련은 1시간가량 지속되었다.

하나 리오나는 단 한 번도 라크스 공작에게 유효타를 날리지 못했다.

리오나는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부딪친 듯했다.

반면, 라크스 공작은 여유 만만이었다.

“이게 끝인가?”

“…….”

“그런 나약함으로 어찌 용병 생활을 하겠다는 거냐?”

리오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라크스 공작이라…….

대단한 양반이다.

강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리오나를 저렇게 농락할 수 있는 강함이라…….

‘직접 체험해 보고 싶어지는군.’

슬슬 타이밍이 된 듯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라크스 공작은 내게 물었다.

“왜 그러지?”

-저도 공작님에게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와?”

-예, 이래 봬도 저 또한 리오나와 같이 블루로즈단 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라크스 공작님과의 대련을 통해 가늠해 보고 싶습니다.

“오호, 그렇다면야 나야 대환영이지. 안 그래도 자네의 명성은 많이 들었네. 보기와는 다르게 힘이 장사라고 하던데. 어디 한번 겨뤄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오나는 내게 괜한 참견이라는 식으로 눈빛을 보냈지만…… 이건 참견이 아니다.

남자들만의 승부욕이다.

대련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은 몸을 격하게 움직이기 전에 꼭 해야 할 준비운동이다.

라크스 공작은 검을 잡은 어깨를 가볍게 돌리는 것만으로 몸풀기를 마쳤다.

이미 라크스 공작은 몸이 풀릴 대로 풀려 있을 것이다.

자세를 취했다.

여태껏 난 단 한차례도 누군가에게 싸움의 기술이라는 걸 배워 본 적이 없다.

그저 용신단의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눌렀다.

과연 라크스 공작에게도 내 힘이 통할까?

‘어디 실험해 볼까!’

내가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갔다.

폭발적인 스피드.

라크스 공작은 자못 놀랐다.

살짝 힘 조절을 하기로 했다.

진심으로 라크스 공작을 때려 버리면, 몸에 구멍이 뻥 뚫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라크스 공작이 강하다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드래곤의 육신보다 강할 순 없다.

발을 빠르게 놀리며 내 주먹질을 피해 내는 라크스 공작.

회피 이후의 반격은 라크스 공작의 전매특허였다.

‘오른쪽이군!’

몸을 회전시키면서 아슬아슬하게 라크스 공작의 일격을 피했다.

이후 무게중심을 다시 잡고 라크스 공작에게 다리걸기를 시도했다.

부웅!

오른 다리를 크게 휘둘렀다.

하나 라크스 공작은 살짝 점프를 뛰면서 내 공격을 피해 냈다.

‘피하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네!’

라크스 공작의 움직임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나는 무식하게 힘만 센 게 아니다. 이동속도, 그리고 공격 속도 또한 빠르다.

그럼에도 라크스 공작은 내 스피드를 따라잡고 있었다.

라크스 공작은 위에서 아래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나는 목검을 그대로 잡아챘다.

“으음……!”

라크스 공작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에게 라크스 공작의 정갈한 회피 기술 따윈 없다.

맞으면서 때린다.

그게 나의 전법이다.

아무리 연습용이라 하더라도 맨손으로, 그것도 한 손으로 그대로 막아 내면 손에 피멍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

드레곤의 육체니까.

‘목검 따위에 피멍이 들면 드래곤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라크스 공작은 검을 다시 거뒀다.

이번에는 찌르기 공격으로 내 복부 쪽을 노렸다.

진심이 묻어나는 공격이었다.

연습이고 뭐고 그런 거 봐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잘됐다.

난 오히려 이런 상황을 바랐다.

목검은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들어왔다.

급소를 정확히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끄떡하지 않았다.

라크스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동시에 감탄했다.

“맷집이 대단하군!”

몇 안 되는 나의 장점이니까요!

라크스 공작의 공격을 맨몸으로 그대로 받아 내면서 그와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라크스 공작은 이번엔 내 머리를 노렸다.

목검이 닿기 전에 머리를 숙여 간신히 공격을 피해 냈다.

아무리 맞는 게 장기라고 하지만, 머리를 맞는 건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걸 노리고 라크스 공작은 일부러 머리를 노렸을 것이다.

다시 한번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라크스 공작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면서 나와의 거리를 재차 벌렸다.

갈 곳을 잃은 내 주먹은 그대로 지면에 박혔다.

쿠우우웅!

지면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렸다.

그러나 흔들림의 크기와는 상관없다.

땅이 흔들렸다는 것.

이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라크스 공작은 혀를 내둘렀다.

“전해 들은 것 이상이군! 엄청난 파워야! 게다가 담력도 있어. 자네의 그 능력, 보통이 아닌 거 같은데. 몸에 무슨 짓이라도 했나?”

부랴부랴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말을 못 하니까 엄청 불편하네.

-기초 체력 운동만 죽어라 했습니다. 그리고 리오나가 저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고 알려 줬습니다. 제가 강해질 수 있던 건 리오나의 덕이 큽니다.

“리오나가……?”

일부러 리오나의 공으로 돌렸다.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점수 좀 따게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크스 공작은 리오나를 바라봤다.

리오나는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린 라크스 공작.

“아무튼 자네는 기술적인 면만 잘 다듬으면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겠어. 정말로 강하군. 내 인정하겠네.”

강하다. 이 말을 듣는 게 오늘의 내 목표였다.

그와 동시에 목표 달성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크스가 당신에게 큰 호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라크스와의 친밀도가 +25 상승했습니다.

-개연성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라크스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아따, 오래도 걸렸다.’

엑스트라 신분으로 조연급 캐릭터와 대화를 나누는 게 이리도 힘들 줄이야…….

“아아아.”

목소리를 내 보기 시작했다.

순간 라크스 공작의 동공이 커졌다.

“오, 드디어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가?”

“예, 공작님. 그동안 말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와 친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기쁘군, 하하!”

라크스 공작은 내 어깨를 토닥여 줬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겠지만…… 내 딸을 잘 부탁하네. 자네가 내 딸의 곁을 지켜 준다면 정말 든든할 거 같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님. 저만 믿으시길.”

라크스 공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리오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든든한 동료를 뒀구나. 이 아비는 이제야 조금 안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조심해야 한다. 용병 생활이라는 건 결코 쉽지 않을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라크스 공작이 사라진 뒤, 리오나는 내게 다가왔다.

“고마워. 네가 좋게 말해 줘서 아버지…… 아니, 공작님이 내가 하는 일에 조금씩 안심하기 시작하는 거 같아.”

-리오나와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최대치를 달성했습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칭호를 얻었습니다.

-히든 칭호 조건을 클리어했습니다.

-‘이놈의 인기는 사그라들지가 않아!’ 칭호를 얻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단역 이하의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친밀도가 +10 가산됩니다.

‘드디어 과제 클리어인가!’

……하고 안심할 때였다.

-새로운 히든 칭호가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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