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라크스 공작 (3)
내가 향한 곳은 레미의 방이었다.
숙녀의 방에 내가 들어가도 될까 걱정됐지만, 레미는 괜찮다며 들어오라고 재차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내가 알아차린 게 있었다.
‘레미는 위플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위플용 말들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레미가 얼마나 위플을 즐겨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러니 레미가 나를 이길 만도 하지.’
레미는 나에게 물었다.
“차는 어떤 거 좋아하시나요? 종류별로 다 있으니 말씀만 해 주세요.”
“티레이로 부탁할게.”
“알았어요.”
하녀에게 부탁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차를 탄다.
참고로 티레이는 내가 소설 속 세계로 들어오고 난 이후에 가장 좋아하게 된 차 이름이다.
맛은 녹차와 비슷했다.
“자, 여기요.”
“잘 마실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예상외로 차 맛은 훌륭했다.
머리 좋고, 말재간이 뛰어나고, 위플도 잘하는 데다가 차까지 잘 탄다.
재주가 많은 여자다.
맞은편에 앉은 레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언니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고 했죠?”
“어.”
정확히는 +15짜리 호감이 필요하다.
“언니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원래는 좀 어려운데, 제가 보기엔 로인 님이라면 충분히 잘 해내실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불안해지는데?”
“불안해할 거 없어요.”
레미는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저희 아버지에게 높은 점수를 따면 돼요.”
“라크스 공작님한테? 그게 리오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데?”
“아마 모르실 거예요. 사실 저희 언니는 아버지를 굉장히 존경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그 점은 변함없을 거예요.”
여러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라크스 공작.
그는 자식에게도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러면 리오나가 집을 나간 게 설명이 안 되는데? 아버지를 존경한다면서? 그리고 너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근데 왜 집을 나간 거야?”
“그건 저희 태생에 연관되어 있는 문제랍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가벼이 언급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안다.
찻잔을 내려놓은 레미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듯 라크스가의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해 줬다.
“예전에 아버지는 제 어머니와 결혼하시기 전에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어요. 줄리라는 이름을 가지신 멋진 분이셨죠. 하지만 그분은 이곳 라크스가에서 일하는 하녀 신분이었어요. 반면 아버지는 촉망받는 귀족 자제였죠. 두 분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을 싹틔워 왔어요. 성인이 되었을 때 줄리 님은 제 언니를 임신하게 되었죠.”
“결혼은?”
“아버지께선 줄리 님과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할아버님은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고귀한 귀족의 핏줄을 어디 서민의 피로 더럽히려는 거냐면서요. 결국 줄리 님은 이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지금의 제 어머니와 결혼하시게 되었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다.
서로 사랑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녀.
그리고 사랑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강제로 이어지게 된 남녀.
기구한 운명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책임감이 많으신 분이에요. 비록 제 어머니와 좋은 관계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부부의 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와 저에게 많은 애정을 쏟으셨죠.”
“리오니의 어머님은 어떻게 되었는데?”
“홀로 언니를 키우다가 언니가 9살 때 돌아가셨어요.”
“…….”
들으면 들을수록 물어본 게 미안해지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리오나에게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레미는 힘없이 웃었다.
“9살에 졸지에 혼자가 되어 버린 언니는 갈 곳이 없어졌지요.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지게 된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죠, 제 아버지는 책임감이 굉장하신 분이라고? 언니가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 언니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어 했어요. 그리고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언니를 입양했죠.”
“네 어머니는? 남편의 과거의 여자가 낳은 아이를 데려오는 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할 텐데.”
“자랑은 아니지만,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른 의미로 책임감이 있으신 분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이해심이 깊은 분이죠. 9살 난 꼬마 여자아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선 어머니도 동의했어요. 물론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분명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 언니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더 강했기에 결국 입양을 결정했어요.”
“대단하신 어머니를 뒀구나.”
“제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죠.”
훌륭한 어머니와 훌륭한 아버지를 뒀다.
‘흔치 않은 경우인데?’
레미가 문제없이 바르게 자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들었을 때에는 리오나가 집을 나가게 된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무슨 큰 문제라도 생겼어? 내가 알기론 리오나는 12살 때 집을 나섰다고 들었는데.”
리오나의 검술 연습에 어울려 줬던 드레인이 직접 내게 그렇게 말했다.
레미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려서 그래요.”
“무슨 뜻이야?”
“자신이 여기에 계속 남아 있으면 분명 아버지 입장이 난처해질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 언니는 아버지를 비롯해서 저, 그리고 제 어머니까지…… 가족들 모두를 사랑했지만, 집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거죠.”
“사랑하기에 떠나는 걸 고른 거구나.”
“모순이죠. 하지만 그게 언니가 택한 최선책이었어요.”
리오나다운 결정이다.
하긴 리오나 때문에 모두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긴 했다.
서열 문제도 있고 말이지.
“멋대로 집을 나가 버린 언니 때문에 아버지는 많이 섭섭하셨나 봐요. 그래서 언니를 굉장히 엄하게 대해요. 그래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언니를 사랑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레미가 나에게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이런 이유가 있어서 라크스 공작님께 잘 보이면 리오나의 호감을 살 수 있다고 말한 거였구나.”
“네, 맞아요.”
이야기가 빙글빙글 돌아서 오긴 했지만, 덕분에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라크스 공작님은 어떤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레미에게 추가로 질문했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다 얻어 두는 편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레미는 짧게 답했다.
“강한 남자요.”
“…….”
으음.
굉장히 하드한 작전이 될 거 같다.
* * *
라크스 가문에서 맞이하는 저녁 식사 자리는 뭐라고 해야 되나…….
그야말로 격식과 기품이 넘쳐흐르는 곳이었다.
즉…….
‘내 취향은 아니네.’
오랜 용병 생활을 해 왔던 나였기에 사실 이런 딱딱한 자리는 굉장히 불편했다.
애초에 상류층 사회가 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와는 다르게 리오나는 식사 예절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역시, 괜히 귀족 집안의 자제가 아니다.
라크스 공작은 식사를 하던 도중에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원래는 일찍 말을 했어야 했는데. 자네에게 아직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못 했군. 정식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아직 라크스 공작과 직접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고개를 살짝 숙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서 빨리 자네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군. 보아하니 레미와는 이야기가 잘 통하는 거 같던데. 아직 나는 많이 어려운가 보군. 하하!”
그건 아닙니다만……. 아니지, 어려운 건 맞는데…….
그래도 말을 못 하는 건 라크스 공작을 어려워해서가 아니다.
라크스 공작의 인물 등급이 너무 높아서였다.
사실 단역이면 그래도 어찌어찌 커버는 해 보겠는데, 조연을 상대로 말문이 트이게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히든 칭호를 비롯해 친밀도를 올려 주는 칭호가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것들을 빨리 모아 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원래 나는 저녁 식사만 하고 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식사 준비가 늦어지다 보니 저녁 식사 시간도 뒤로 밀리게 되었다.
라크스 공작은 내게 말했다.
“밤이 너무 깊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어떤가? 방은 많으니 아무거나 하나 고르면 되네.”
잘 대해 줘도 너무 잘 대해 준다.
하긴, 나는 라크스 공작의 목숨을 구해 줬다.
생명의 은인이니 이 정도 대접은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마음 편히 받아 보도록 할까.
* * *
자정이 가까워진 늦은 시간.
“슬슬 잘까?”
잘 준비에 돌입하려던 순간, 바깥에서 들려오는 낯선 기척이 내 관심을 끌었다.
창문 밖을 내다봤다.
상의를 탈의한 채 홀로 검술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라크스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저 양반도 대단하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경을 헤맸는데…….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격한 자체 훈련에 돌입했다.
저런 노력하는 태도가 라크스 공작이 가진 강함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만, 자세히 보니까 라크스 공작 혼자가 아니었다.
맞은편에서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보였다.
리오나였다.
라크스 공작은 검을 뽑아 들었다.
진검은 아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연습용 검이었다.
리오나가 들고 있는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못 본 사이에 심각할 정도로 약해졌구나, 리오나.”
“…….”
리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리오나가 약한 게 아니라 라크스 공작이 너무 강하다.
라크스 공작은 라바인 전투에서, 그것도 최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철의 남자다.
드래곤을 상대로도 물러섬 없이 싸운 남자인데, 리오나가 어찌 싸우겠나?
그럼에도 리오나는 포기하지 않고 라크스 남작에게 검을 겨눴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쳤다.
그러나 힘, 스피드, 그리고 기술과 경험 등 무엇 하나 리오나가 앞서는 게 없었다.
라크스 공작은 혀를 차면서 리오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약해 빠져 가지고서 어떻게 용병으로 활동하겠다는 거냐!”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 왔어요.”
“잘해 와? 로인 그 청년이 아니었으면 너는 벌써 메를에서 죽은 목숨이었을 게다!”
메를 사건도 알고 있나?
하긴, 느와르 남작 건 때문에 마법사 길드에서 수사관을 파견할 정도였으니까.
라크스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메를 이야기가 나오자 리오나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리오나에게 안 좋은 기억을 남겼던 사건이다.
아마 그녀에겐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크스는 검을 거뒀다.
“내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이곳으로 와라. 오늘 못다 한 훈련은 내일 이어서 한다.”
“……알겠습니다.”
저걸 말하는 라크스 공작도, 그리고 알았다고 답하는 리오나도 참 대단하다.
저런 부녀지간은 듣도 보도 못했다.
뭐, 솔직히 라크스의 심정은 이해한다.
딸이 혼자서 거친 용병 생활을 하고 있으니 라크스 입장에선 자신이 알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주고 딸을 다시 보내고 싶을 것이다.
언제까지 라크스 공작이 리오나의 곁을 지켜 줄 순 없는 노릇이니까.
따라서 리오나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그것이 라크스 공작이 원하는 것이다.
“새벽 6시라고 했지?”
리오나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좋은 작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