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50화 (50/240)

# 50

라크스 공작 (2)

레미가 내게 호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리오나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려준 탓이었다.

리오나는 라크스 가문과의 연을 끊고 살다시피 했지만, 레미와는 그래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자매끼리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레미도 딱히 리오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리오나는 대체 왜 가문을 제 발로 뛰쳐나간 걸까?

라크스 공작은 오히려 리오나를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삼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레미는 머리가 비상하긴 하지만, 무술 실력은 거의 밑바닥 수준이다.

반면 리오나는 라크스 공작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모양인지 뛰어난 검술 실력뿐만 아니라 냉철한 사고방식과 결단력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블루로즈단의 B팀 대장을 꿰찬 것만으로도 이미 리오나의 실력은 검증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리오나는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잘 잡힌 캐릭터니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능력 랭크도 금방 올릴 수 있을 거다.

능력 좋고, 집안까지 좋은 리오나.

하나 그녀는 집안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전부 거절했다.

그리고 용병 생활을 택했다.

레미한테 슬쩍 물어볼까 했으나, 도중에 아는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언니, 이제 왔어요?”

리오나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그 이유는 리오나의 옷차림에 있었다.

레미와 같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코르셋 위로 드러나는 늘씬한 허리 라인,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그야말로 미의 여신이라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갑옷을 착용한 리오나의 모습만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니 신선했다.

레미는 내게 물었다.

“우리 언니 드레스 차림, 로인 님은 처음 보시죠?”

“어, 맞아.”

나는 레미에게 말을 놓았다.

레미가 먼저 내게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놓은 것뿐이다.

리오나는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창피함을 필사적으로 참아 내기 위한 시도였다.

‘저렇게 보니까 귀엽네.’

나는 그런 리오나에게 칭찬의 말을 들려줬다.

“잘 어울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야.”

“거짓말하지 마. 난 이런 옷차림은 안 어울리는 여자야.”

“그건 본인 생각이고, 제3자가 보기에는 굉장히 잘 어울리니까 자신감을 가져. 너답지 않잖아?”

“…….”

리오나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설마 칭찬받는 걸 싫어하나?’

이런 생각이 들 무렵.

-리오나 님과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뭐야, 딱히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 솔직하지 못한 여자고만.’

-히든 칭호 퀘스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음? 뭐지, 히든 칭호라는 게 있나?’

친밀도를 올리면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

그게 여기선 ‘칭호’라는 형태로 주어진다.

난 칭호에 대해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능력치를 팍 올려 주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스킬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였더라. 줘 봤자 해당 등장인물의 친밀도에 가산되어 적용된다든지, 아니면 어린아이들에게 보다 더 높은 호감을 얻을 수 있다든지…… 이런 것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히든이라고 하니까 묘하게 신경 쓰이네.’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혹시 여기, 화장실이 어디 있어?”

아직도 쑥스러워하는 리오나를 대신해서 레미가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 줬다.

“저쪽 문으로 들어가셔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바로 화장실이 나와요. 남녀 공용이니까 들어가시기 전에 꼭 노크하고 들어가세요.”

“알았어.”

가끔 술집에 가면 남녀 공용으로 화장실을 사용하는 곳이 있긴 했는데 여기서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레미가 충고해 준 그대로 노크를 했다.

똑똑똑.

“아무도 없죠? 들어갑니다.”

혹시 몰라서 들어가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에 누군가 있으면 이건 그 사람 잘못이다.

예상대로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갔다.

볼일을 보는 척하면서 히든 칭호에 관한 정보를 열람했다.

-칭호 : 이놈의 인기는 사그라들지가 않아!

효과 : 단역 이하의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친밀도가 10점 가산되어 적용됩니다.

‘헐, 대박! 이런 칭호가 있었어?’

10점이 가산되는 거면, 앞으로 대화 기준치를 달성할 때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드디어 벙어리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물론 단역 이하 한정이다.

그리고 모든 단역들의 대화 충족 기준치가 같은 건 아니었다.

어떤 등장인물은 30일 때도 있고, 어떤 등장인물은 5인 경우도 있다.

각각 제각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이 칭호는 무조건 따야 해!’

하나 내가 따고 싶다고 쉽게 칭호를 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조건이 붙어 있었다.

-칭호 획득 조건 : 단역 인물(5인 이상)의 친밀도를 최대치로 만드세요.

-현재 진행 상황 : 4/5인

‘내가 단역급 등장인물을, 그것도 자그마치 네 명이나 친밀도 최대치를 찍었단 말이야?’

그게 더 놀라웠다.

‘생각해 보자. 일단 반드, 에나, 가르시아, 그리고…… 라그너가 있구나. 음, 찍을 만했네.’

그러나 한 명이 부족하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단역 중에서 나에게 많은 호감을 품고 있는 인물이 두 명 존재한다.

바로 라크스 자매다.

둘의 친밀도가 비슷비슷했다.

리오나가 85, 그리고 레미가 65다.

리오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레미의 수치는 굉장히 놀랍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도대체 나에게 얼마나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걸까?

뭐, 나 좋아해 준다는데 기분이 좋긴 하다.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친밀도 MAX를 달성할 수 있는 인물은 그래도 레미보다는 리오나다.

‘리오나는 친밀도를 15만 올리면 되니까.’

올릴 수 있는 친밀도의 최대치가 100이다.

15만 올리면 히든 칭호 획득 조건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리오나와의 친밀도를 단번에 올릴 수 있을까.

화장실에 들렀다가 라크스 자매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 리오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오나는?”

“옷 갈아입는다고 하고 갔어요.”

“그래?”

마침 잘됐다.

리오나가 없는 틈을 노려 나는 레미에게 한 가지 부탁하기로 했다.

“네 언니 말이야.”

“리오나 언니요?”

“어. 혹시 어떻게 하면 리오나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까?”

“로인 님, 저희 언니 좋아하세요?”

이 질문은 수십 번도 넘게 들었다.

설마 리오나의 혈연에게도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나중에 라크스 공작한테도 듣겠다.

참 나.

“연애 감정이 아니라 그냥 직장 동료로서 좀 더 친해지고 싶다는 뜻이지.”

“그런가요?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레미의 눈은 내게 마치 ‘뻥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리오나하고 라크스 공작은 잘만 믿던데.

둘째 딸은 의심부터 하고 본다.

하긴, 가족이라고 모두 같으란 법은 없으니까.

레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선보였다.

“알려 드릴 수는 있어요. 대신, 공짜로 알려 주고 싶진 않아요.”

“뭔데? 돈이라도 줄까?”

“죄송하지만 돈은 넘치고 넘쳐요. 라크스 가문이 돈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다는 말, 들어 본 적 있나요?”

“아니, 없지.”

그냥 해 본 말이다.

애초에 돈 문제에 허덕이고 있다면, 이런 넓은 저택에 살고 있진 않겠지.

“원하는 걸 말해 봐, 둘째 아가씨.”

“간단해요.”

레미는 나에게 의외의 거래를 걸어왔다.

“저와 위플 게임 한 판만 해 주세요.”

* * *

뭔가 큰 부탁을 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위플 게임 한 판만 해 주면 된다니, 오히려 너무 쉬운 조건이라서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내가 위플 게임을 잘한다는 말도 들은 모양이다.

레미의 취미가 위플 게임이다 보니 자연스레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알았어. 할게.”

결국 위플 게임을 해 주기로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우리는 장소를 이동했다.

판을 깐 뒤 레미는 나에게 먼저 선택권을 줬다.

“흑 하실 건가요, 아니면 백?”

“흑으로 하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너한테는 블랙보다 화이트가 어울릴 거 같아서.”

“어머, 작업 멘트인가요? 저희 언니라는 임자가 있으시면서.”

태클 걸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았지만, 구태여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반응하면 지는 거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드디어 시작된 위플 게임.

레미는 정석이라 불리는 정면 치고 나가기 작전을 구사하지 않았다.

오른쪽 측면을 공략했다.

말을 옮기면서 레미는 자신이 왜 이런 움직임을 보여 주는지 직접 말로 설명해 줬다.

“정면은 상대방이 방어하기 쉬운 곳이니까요. 그래서 보통은 측면을 노리죠.”

나 또한 같은 전략이었다.

나는 왼쪽을, 레미는 오른쪽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레미와 내가 위플 게임을 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진 모양인지 저택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인파 속에서 라크스 공작의 모습도 보였다.

탁! 탁!

서로 말을 하나씩 주고받았다.

확실히 레미는 강하다.

‘데브 같은 어중이떠중이랑 붙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네. 잘해.’

역시 델리피나 최고의 전략가로 명성을 떨칠 인재다웠다.

나의 킹 바로 근처에 레미의 병사들이 접근했다.

레미의 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수 차이로 내 왕이 먼저 레미의 병사들에게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 위플 실력에 감탄했다.

“와……!”

“레미 아가씨를 상대로 30수 이상 버틴 사람은 처음 봤어!”

“30수가 뭐야? 만약에 한 턴만 더 빨랐더라면, 저 로인이라는 분이 이겼을 거 같은데?”

“막상막하네. 눈이 호강했어.”

판을 정리한 뒤 레미는 내게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에 제가 선을 잡지 않았다면, 오히려 제가 로인 님에게 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야, 그래도 네가 이겼을 거야.”

“실례지만 로인 님은 위플 게임 경력이 어떻게 되나요?”

“이번이 딱 두 판째.”

순간 갤러리들의 입을 쩍 벌어졌다.

“두 판 만에 저 정도 실력이라고?”

“뻥이겠지, 뻥이야! 저럴 리 없어!”

“레미 아가씨는 8년 가까이를 배우셨는데…….”

8년 경력의 초고수와 이제 위플 게임 딱 두 판째인 초보 중에서도 초보의 대결.

체스 게임 경력을 합치면 그래도 비등비등하겠지만, 이들이 체스가 뭔지는 알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말 안 하기로 했다.

레미는 나를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로인 님은 재능이 있으신 분이네요.”

“그런가? 난 재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럼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센스.”

풀어서 설명하자면 탁월한 감각이랄까?

근데 이것도 결국 재능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위플 게임은 내가 졌다.

그러나 레미는 나와의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레미가 내건 조건은 승리가 아니었다.

게임만 해 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알려 주기 힘들다.

보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나와 눈빛을 교환한 레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용한 곳에서 복기라도 해 볼까요? 커피도 같이 한잔하면서요.”

“나쁘지 않지.”

레미는 눈치가 빨라서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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