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49화 (49/240)

# 49

라크스 공작 (1)

설마 라크스 가문에서 나를 초대할 줄은 몰랐다.

파랑새의 말을 좀 더 상세히 들어 보니, 공작이 직접 나를 초대했다고 들었다.

‘이거 참, 안 가기도 그렇고.’

고민하는 사이에 파랑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라크스 공작을 낫게 해 준 사람이 너라며?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라는 귀한 재료까지 무상으로 줬는데, 그쪽에서 대장을 초대할 만하지.”

파랑새는 내가 라크스 가문에 초대받은 이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남자, 대체 모르는 게 뭐야?

“리오나가 말해 줬습니까?”

“아니, 독자적인 정보망이 있거든.”

“그 정보망이 뭔지 모르겠지만, 신경이 쓰이는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 대장의 사생활까지는 안 건드릴 테니까. 그보다 초대에 응할 건지 말 건지, 나한테 미리 이야기해 줘. 그래야 그쪽에다 미리 전달해 줄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합니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고민할 이유가 있어?”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라크스 가문에서 나에게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초대하는 것도 아니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알았어요. 간다고 전해 주세요.”

“다시 한번 물을게. 확실하지?”

두 번 묻기. 파랑새의 버릇 중 하나다.

“예, 갈게요.”

“좋아. 위치는 나중에 따로 알려 줄게. 그럼 상단 업무 수고해.”

정말로 내 의사만 묻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왔나 보다.

저 사람도 대단하네.

* * *

샹그리의 설탕 유통 관련 업무는 이제 라그너가 알아서 잘 진행해 줄 것이다.

나는 라그너와 함께 나울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라크스 공작이 있는 장소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한가할 때 푹 쉬어 두려고 했건만…….’

오히려 호위 임무를 수행 중인 다른 용병들에 비해 더 바빠진 기분이 들었다.

라크스 공작이 머무르는 곳은 나울에서 멀지 않았다.

육로로 2일을 소비했다.

“이쯤인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라크스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조금만 둘러봐도 저택의 위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택의 크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였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나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답 대신 내 신원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만능 팔목 보호대를 보여 줬다.

보호대에 새겨진 마크를 확인하자마자 병사들은 바로 내게 예를 표했다.

“로인 님이시군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만간 안내해 줄 집사가 나올 겁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여 줬다.

라크스 공작은 여태껏 만났던 귀족들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

비록 1, 2권에서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지만, 그의 명성은 숱하게 언급되었다.

라바인 전투에서 대활약을 했던 전장의 영웅!

그가 곧 라크스 공작이다.

양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며 인사했다.

“로인 님이시죠?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 네.”

괜히 나도 긴장된다.

다시 한번 옷차림을 점검했다.

괜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쪽팔리니까.

웨일의 저택도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라크스 공작의 저택은 그보다 더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라크스 공작은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그래서 유독 집 안이 깔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다.

붉은색 계통의 장식품들이 많았다.

‘붉은색은 라크스 공작을 상징하는 색깔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라크스 공작에게 붙은 별칭이 하나 있다.

‘붉은 귀신.’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공적을 쌓아 올린 라크스 공작.

그는 항상 전투를 치를 때마다 피로 칠갑이 되었다.

본인의 피가 아니다.

적들을 하도 많이 베어 넘기다 보니 피가 여기저기 튀어서 온몸을 피로 칠갑을 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붉은 귀신이었다.

4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라크스 공작은 아직까지도 현역이다.

그의 검술을 뛰어넘는 검사는 대륙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대단한 등장인물이 드디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시게.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라크스

-인물 등급 : 조연

-종합 능력 : SS

-전장의 화신, 붉은 귀신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는 남자. 뛰어난 검술뿐만 아니라 빼어난 인품 덕분에 귀족들의 귀감이라 불린다. 후에 라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게 된다.

그 보기 드문 조연이다.

‘예전에는 단역만 봐도 바들바들 떨었는데. 하기야, 눈앞에서 직접 주인공 라스까지 봤었는데 조연 정도야 뭐…….’

그러나 문제는 내가 벙어리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어쩐다?’

대답 대신 나는 고개를 숙여 라크스에게 예를 표했다.

미리 준비한 수첩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일단 사과의 말로 시작했다.

-제가 목 상태가 좋지 못해서 지금은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적었더니 라크스 공작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 딸에게 들은 바로는, 자네는 보기와 다르게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 본 사람 앞에서 목소리를 잘 못 낸다고 하던데.”

“…….”

대충 둘러댔던 핑계였는데, 설마 리오나가 라크스 공작한테까지 말했을 줄은 몰랐다.

라크스 공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성향이라는 게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하겠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잘됐다.

비록 라크스 공작에게 소극남이라는 인식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라크스 공작에게 호감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밥 한 끼 하고 사라지면 된다.

라크스 공작은 백발의 노신사를 불렀다.

“알렉스, 리오나는 어딜 갔기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겐가?”

“그게…….”

알렉스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알고는 있지만 말하기 뭣한 그런 상황일 때 주로 저런 반응이 나온다.

나도 가끔 저럴 때가 있어서 잘 안다.

분위기가 싸해질 무렵,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굳어 버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언니는 아직 옷 갈아입고 있는 중이에요. 아무래도 드레스를 잘 안 입어 봐서 익숙하지가 않은 모양이에요.”

리오나가 드레스를?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내 관심은 그보다 새로 등장한 인물에게 급격히 쏠렸다.

-레미

-등장인물 : 단역

-종합 능력 : S

-라크스의 둘째 딸. 정실부인이 낳은 딸이며, 머리가 상당히 좋다. 훗날 델리피나 대륙에서 손꼽히는 지략가로 성장하게 된다.

‘레미, 레미라…….’

소설에서 딱 한 번 언급된 적이 있었다.

라크스의 둘째 딸이 머리가 굉장히 좋다는 내용의 문구가 두 줄 정도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대륙 최고의 지략가로 활약하게 되다니…….’

내가 모르는 내용이다.

‘3권에서 나오는 건가? 아니면 4권? 5권? 미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다 읽어 둘걸.’

오랜만에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라크스는 레미의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쓴소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내 앞이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레미는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바로 읽은 모양인지 다른 제안을 해 왔다.

“어차피 식사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거예요. 그동안 제가 로인 님에게 저택 이곳저곳을 안내해 드릴게요. 아버지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직 많이 남아 있으시잖아요. 그사이에 미리 해 두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는 게 좋겠군. 그럼 조금 있다 다시 보도록 하지.”

라크스와 잠시 이별하게 되었다.

그에게 된통 혼날 뻔했던 알렉스 역시 라크스의 뒤를 따랐다.

이후 레미는 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다행이네요. 제 아버지는 언니 일이라면 항상 험악한 분위기가 되곤 하거든요. 아, 어째서 이런 분위기인지는 굳이 제가 설명 안 드려도 되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첸버를 비롯해서 드레인, 레임스 그리고 파랑새한테서 대충 전후 사정은 들었다.

리오나는 스스로 이 집을 나갔다.

그러면서 귀족 신분조차 반납했다.

그러나 라크스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리오나는 여전히 라크스 가문의 일원으로 되어 있지만, 리오나의 마음은 이미 이곳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오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라크스의 상태가 위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제공한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가 꽤 효과가 있었나 보다.

일단 겉으로 봤을 때에는 굉장히 팔팔해 보였으니까.

“저를 따라오세요, 로인 님.”

레미는 나를 이끌었다.

움직이기 불편한 드레스 차림인데도 불구하고 레미의 발걸음은 굉장히 가벼웠다.

이런 차림에 익숙해서일 것이다.

반면 리오나는…….

‘상상이 잘 안 가는데? 리오나의 드레스 차림이라니.’

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을 현실로 접하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내심 궁금해졌다.

* * *

레미는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줬다.

사실 딱히 흥미는 없었다.

이미 이런 거대한 저택은 웨일가에서 원 없이 접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내 집이 아니면 관심 없다.

남의 집 실컷 구경해 봤자 무엇 하랴?

상대적 박탈감만 늘어날 뿐인데.

레미는 나를 바라보더니 핵심을 찌르는 일침을 날렸다.

“저택 구경에는 흥미를 못 느끼시나 봐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말은 못 하니까.

말을 못 하니까 굉장히 답답하다.

‘리오나가 빨리 와 줬으면 좋겠는데.’

적어도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내 곁에 붙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일이 발생했다.

-레미와의 친밀도가 상승했습니다.

-레미와의 친밀도가 상승했습니다.

-레미와의 친밀도가 상승했습니다.

아니. 뭔데 계속 친밀도가 올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 거라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고개를 몇 번 끄덕여 준 게 다였다.

‘그런데 고작 이거 가지고 친밀도가 오른다고?’

오히려 너무 잘 올라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설마 오류가 발생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이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저, 로인 님에게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래서였군.

굳이 내가 친밀도를 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호감을 드러낼 경우, 이렇게 저절로 친밀도가 오르는 경우가 생긴다.

아스툰에 거주하는 마을 주민들이 이러한 경우에 속했다.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주의 외동아들을 구해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내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레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준치에 도달했다.

“아아.”

목소리를 내 봤다.

그러자 레미의 큰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어머, 이제 말씀하실 수 있게 되었나요?”

“네, 그런 거 같네요.”

“언니한테 들었어요. 리오나 언니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잠시 말을 못 하는 상태셨다고. 심리적인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면 그런 경우가 가끔 생기긴 하죠.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재차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레미.

-띠링! 레미와의 친밀도가 상승했습니다.

‘또 올라?’

친밀도가 오르는 건 좋은데 원래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나친 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관심 좀 그만 가져, 이 아가씨야!’

좋아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면 역으로 부담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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