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범인은 바로 너야! (3)
잠식 3단계에 접어들기 전에 조르를 먼저 잡아서 없애야 한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면 골치가 아파진다.
느와르 남작 때처럼 미쳐 날뛸지도 모른다.
그래도 느와르 남작 때와는 달리 상황이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조르는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지고 있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된다.
칠흑의 조각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영내에 대기 중인 용병들을 전부 쓸어버리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조르를 뒤쫓으려고 하던 찰나였다.
게럴은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인지 내게 되물었다.
“저 녀석이 칠흑의 조각이라고?”
“보면 모르냐? 검게 생긴 것이 딱 봐도 ‘내가 칠흑의 조각이오.’라고 생겼잖아!”
“그, 그렇긴 하지. 근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니, 2일을 찾아 헤맸는데도 코빼기 하나 안 보이던 녀석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니까 할 말이 없어지네.”
“잔말 말고 사람들이나 깨워! 난 놈을 쫓을 테니까!”
“알았어!”
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우선 용병들을 깨우기로 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르는 창문 너머로 몸을 던졌다.
창문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르는 바깥을 향해 뛰어갔다.
놈이 영내를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안 그래도 찾기 힘든 녀석이다.
모습을 드러낸 김에 완벽하게 제압해야 한다.
근처에 놓여 있는 도자기를 들었다.
딱 봐도 고려청자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엄청나게 비싸 보였다.
“지금은 이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있는 힘을 다해 도자기를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던 도자기는 정확히 조르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짐승같이 네발로 달려가던 조르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스트라이크!
내가 봐도 훌륭하다.
나는 창가에 발을 올렸다.
받침대처럼 사용하면서 있는 힘껏 공중으로 도약했다.
쿠웅! 정확히 조르의 등 위에 착지했다.
“끄억!”
조르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자는 이런 걸로 쉽게 죽지 않는다.
일단 제압은 했다.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웨일과 첫째, 막내아들도 보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자를 잡았습니다!”
웨일을 대신해 첫째 아들, 샤인이 내게 물었다.
“누구지? 놈의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 보도록 해라!”
“그 전에 각오를 좀 해야 할 겁니다. 특히 웨일가 여러분들이요.”
“……?”
샤인과 이븐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웨일은 달랐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웨일은 조르가 날이 갈수록 이상해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건 소설 속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불안감.
나는 그 불안감을 확인시켜 줘야 했다.
조르의 뒤통수를 붙잡고서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웨일가 사람들은 헛숨을 삼켰다.
“조르, 네가……!”
샤인과 이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웨일은 참담한 표정으로 조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미 조르에게는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3단계에 달하기 직전이었다.
없애려면 빨리 제거해야 한다.
그래도 웨일의 가족이, 소중하기 길러 온 아들이 연관된 문제다.
나는 이들에게 외쳤다.
“칠흑에 잠식된 이상,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긴 힘들 겁니다. 가족들이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저는 거기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웨일에게 묻고 싶었지만, 웨일을 대상으로 하면 나는 벙어리가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족 전체에게 의사를 물었다.
이들이 설령 조르를 살려 주고 싶다 하더라도 어차피 조르는 죽는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다.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라 봐도 무방했다.
웨일은 망설였다.
설령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존재라 하더라도 그의 아들 아닌가?
아버지로서 아들을 죽이라고 하기가 쉽지 않을 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조르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매섭게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일순간 내 시야가 차단되었다.
아래에 조르를 깔아뭉개고 있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을 질질 끈 탓에 조르는 벌써 잠식 3단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미 그는 인간의 형태를 버리고 괴물로 변모하게 되었다.
조르, 아니 한때 조르라는 이름을 지닌 인간이었던 검은 괴물은 웨일에게 덤벼들었다.
위험하다!
조르를 막아서기 위해 움직이려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
그때 검은 괴물과 웨일 사이를 가로막은 자가 있었다.
바슬라였다.
바슬라는 빠르게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해프닝이 발생하고 말았다.
“딸꾹!”
잊고 있었다.
바슬라는 긴장하면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는 버릇이 있는 마법사다.
망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갑자기 바슬라의 손끝에서 강렬한 불덩이가 형성되었다.
게럴은 이렇게 외쳤다.
“나왔구나! 바슬라의 러키 매직!”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게럴에게 들었던 게 떠올랐다.
바슬라는 딸꾹질을 하면 가끔 본인이 구현하려던 마법보다 더 강력한 마법이 구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다.
게럴은 이런 경우를 ‘러키 매직’이라 불렀다.
‘무슨 몽키 매직도 아니고…….’
여하튼 운이라는 수치가 거의 최대치에 도달했을 때 나온다는 러키 매직 현상이 발동된 덕분에, 조르는 불덩이를 맞고 다시 내 쪽으로 튕겨 나왔다.
바슬라의 나이스 어시스트였다.
나는 녀석이 다시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발로 놈의 가슴팍을 압박했다.
손을 쓰기 전에 웨일이 내게 외쳤다.
“내 아들을 편하게 보내 주게!”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발에 힘을 실었다.
내 발은 조르의 가슴팍을 꿰뚫고 심장을 짓뭉갰다.
“끄어어어억!”
조르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조르의 몸은 점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웨일은 눈을 감았다.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르.
이로써 웨일가를 뒤흔들었던 검은 괴물 사건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 * *
칠흑의 조각이 조르를 잠식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마무리까지 지은 나.
덕분에 나를 향한 웨일의 관심은 폭등했다.
-웨일과의 친밀도가 대량 상승합니다.
-웨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목소리를 되찾았다.
웨일은 내가 다가와 등을 토닥여 줬다.
“수고 많았네.”
“감사합니다, 웨일 님.”
“음? 이제 말할 수 있는 겐가?”
“예, 한숨 자고 나니 목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푹 잔 나와 다르게 웨일은 한숨도 못 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촉망받던 후계자가 칠흑의 조각에 잠식되어 검은 괴물이 되어 버렸는데, 어찌 잠이 오겠나?
웨일은 피곤함을 애써 뒤로하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내 아들을 편히 보내 줘서 감사하네. 이 은혜, 잊지 않도록 하지.”
“아닙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걸요.”
나는 용병이다.
돈만 준다면, 그에 걸맞은 일을 해 주는 존재다.
물론 이번 일은 주인공의 조력자가 될 웨일을 지켜 줘야 한다는 사적인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목적은 달성하긴 했지만…… 뭐랄까?
영 찝찝했다.
새벽 내내 웨일가는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그 상황 속에서 태평하게 잠을 잔 내가 대단할 정도였다.
어쨌든 웨일이 의뢰했던 일은 결국 내가 해결했다.
웨일은 나에게 약속대로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웨일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일도 마무리되었으니, 슬슬 떠날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나 말고 다른 용병들은 이미 각자의 길을 떠난 상태였다.
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로인.”
게럴이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옆에는 바슬라도 있었다.
“너희 안 가고 뭐 하고 있냐?”
“같이 고생했는데 모여서 같이 술이나 한잔하고 헤어지자고. 언제 또 만날지 모르잖아. 어때?”
“대낮부터 술이냐?”
“뭐 어때? 그렇다고 해 저물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잖아. 가볍게 한잔 오케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게럴의 제안이 왠지 끌린다.
평소의 나였더라면 거절했을 텐데……. 뭐, 상관없으려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의뢰가 빨리 끝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가게에 들어가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게럴은 슬쩍 내게 물었다.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이번에는 친구가 쏘는 거 맞지?”
“너, 그게 목적이었지?”
“들켰어? 하하하!”
하여튼 이놈들은…….
그래도 밉상은 아니었다.
‘뭐, 어차피 넘치는 게 돈이니까.’
까짓것, 내가 쏘기로 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는 동안 게럴은 드레인 못지않은 수다력을 뽐냈다.
반면, 바슬라는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나는 게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라스는 웨일과 만나게 될 것이다.
차라리 레이샤르 때처럼 웨일에게 라스를 만나면 내 칭찬을 많이 해 달라고 말을 해 둘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갈까?
쿨하게 저택을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서 부탁하는 건 폼이 안 나긴 하는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한 남자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여기 테이블, 재미있어 보이는데. 나도 합석해도 되나?”
웬 아저씨가 한 명 난입했나 싶더니,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블루로즈단의 소식 전담병, 파랑새였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대장한테 전해 줄 소식이 있어서.”
파랑새는 내게 몰래 손짓했다.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자는 신호였다.
이쯤이면 슬슬 일어날 때가 됐다.
나는 게럴과 바슬라에게 다음에 보자고 말을 하고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를 나온 뒤 파랑새는 입에 담배 하나를 물었다.
“후우.”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 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무슨 일 있어요?”
“심각한 일은 아니고…… 미안, 정정할게. 리오나에겐 심각한 일일 테니까.”
리오나의 이름이 언급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리오나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녀의 가정사가 어떤지 드레인에게 이미 들었지?”
“네. 라크스 공작의 딸이라면서요.”
냉철하기로 소문난 남자, 라크스 공작.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공적을 세웠던 그는 파리마 사건 당시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듣자 하니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귀족, 히디아 백작을 제압하는 데 라크스 공작의 힘이 컸다고 했다.
라크스 공작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분명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으리라.
파랑새는 말을 이었다.
“리오나 대장이 라크스 공작 문제 때문에 너에게 상담을 요청하고 싶어 하더라. 임무가 끝나는 대로 너와 만나고 싶대.”
“상담 내용은요?”
“본인에게 직접 들어 봐. 나는 여기까지만 전해 달라고 요청받았으니까.”
리오나는 내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다.
상담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벤토로 가면 돼. 지금 출발하면 내일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바로 출발해야…… 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먼저 가 볼게요.”
파랑새와 이야기하던 도중에 잊은 게 떠올랐다.
‘술값 계산, 안 하고 나왔는데.’
뭐, 알아서 잘 계산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