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44화 (44/240)

# 44

주둔지 (2)

라그너는 상단 인력을 이끌고 이곳, 나울에 도착했다.

나울을 보자마자 라그너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도시 발전에 돈을 좀 많이 투자해야 할 거 같네요.”

“동감이야.”

앞으로 델리피나 대륙 최고의 상업 조직이 될 로그 상단.

그 대상단의 본사가 위치한 도시가 될 곳인데, 그에 비해 너무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로그 상단은 나울의 지역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울은 알아서 대도시로 성장하게 될 터.

라그너의 뒤를 이어 R팀 용병들도 하나둘씩 나울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에나의 불만이 이어졌다.

“대장님, 여긴 너무 덥지 않나요?”

휴대용 얼음주머니를 이마에 대면서 나에게 묻는 에나.

내가 들려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너만 덥게 느껴지는 거야. 가르시아, 용병들 데리고 숙소로 가서 짐 풀게 해.”

“예, 대장님.”

가르시아는 부대장 마크가 새겨진 보호구를 착용한 채 용병들을 이끌었다.

원래 부대장은 드레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시아가 부대장 마크를 달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부대장을 두 명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부대장이 반드시 한 명만 있으란 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타렌에서 부대를 통솔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가르시아를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드레인의 부대장직은…… 뭐랄까?

명예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본인도 잘 아는 모양인지 부대 통솔은 가르시아에게 양보를 많이 하곤 했다.

‘도착할 사람들은 다 온 거 같고.’

나머지는 가르시아와 라그너에게 각각 맡긴 뒤에 나는 내가 앞으로 머물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 단독주택.

이곳이 나의 보금자리다.

‘서울에선 뼈 빠지게 일해도 이런 집 한 채 못 구하는데. 소설 속 세계에서는 다 되는구나.’

감회가 새롭다.

물론 이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나는 소설 속에서 접했던 정보들을 이용해 떼돈을 벌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것이다.

기왕 소설 속 세계로 들어왔으니,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서울에서 눈치 보며 고시원 생활을 거듭해 왔던 지난날의 나는 잠시 잊어버리도록 하자.

로그 상단 상인들, 그리고 R팀 용병들이 각자 짐을 푸는 동안 나도 내 집 정리에 나섰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태양 대신 보름달이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좀 쉴까?”

의자에 앉아 숨 좀 돌리려고 할 때였다.

-띠링!

익숙한 알람 소리가 들렸다.

‘뭐지?’

눈앞에 떠 있는 창을 확인했다.

-주인공 라스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라스와의 친밀도가 미량 상승합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라스와의 친밀도가 올랐다.

처음에는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창가에 기댄 채 나에게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

페나트…… 아니, 지식을 탐구하는 드래곤, 레이샤르가 나를 향해 웃었다.

이 드래곤은 주거침입죄라는 개념을 모르는 건가? 문이 멀쩡하게 있는데 왜 창문으로 들어온대?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이샤르 님.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는지요?”

“오늘, 라스라는 남자를 만났다. 네 말대로 너의 칭찬을 엄청나게 해 줬지.”

아, 그래서 라스와의 친밀도가 올라간 건가?

그래도 아직 라스와 엮이기에는 한참 멀었다.

레이샤르를 통해 ‘나’라는 떡밥을 던져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레이샤르는 라스를 만났을 때의 일을 회상했다.

“라스라는 자, 검은 존재, 아니 칠흑의 조각과 싸우고 있더군. 너 못지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어.”

“인페르노 하트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보물을 삼키는 드래곤, 벨라시오닉의 심장을 형상화해서 만든 인페르노 하트.

벨라시오닉의 유산 중 가히 최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라스는 인페르노 하트의 힘을 가지고 있다.

칠흑의 조각 정도는 우습게 제압할 것이다.

“라스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레이샤르는 나를 응시했다.

서로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난 라스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소설 속의 주인공이니까.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요.”

“하긴 사람들에게 젊은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니까.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인물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 맞다, 자네한테 줄 선물이 있네.”

“선물요?”

“자네 덕분에 칠흑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좋겠군.”

내게 팔찌 하나를 툭 건넸다.

아이템 상태 창을 확인했다.

-붉은 비늘 팔찌

-등급 : 레전드

-화염 저항력 +340

-화상 효과 내성

-붉은 용, 켈레시드의 비늘로 만들었다고 알려진 전설의 아이템.

레이샤르는 아이템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벨라시오닉이 삼켰던 보물 중 하나다. 마법사들이 미친 듯이 탐내는 아이템이기도 하지.”

“이렇게 귀한 걸 저한테 그냥 줘도 괜찮습니까?”

“그냥 주는 게 아니야. 나에게 칠흑에 관한 정보를 넘겨줬기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주는 거다.”

그 보답은 이미 라스와의 친밀도 올리기로 갚았다고 생각했건만, 레이샤르는 딱히 그걸 보답이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난 상관없다.

공짜로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하나 얻은 셈이니 말이다.

모습을 감추기 직전에 레이샤르는 내게 말했다.

“이제부터 세계는 혼돈으로 가득 차기 시작할 거다. 그 징조는 네가 속한 용병 조직에도 영향을 미칠 테지.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바라마. 혹여나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날 부르도록. 그럼 이만.”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아니, 다 좋은데…….

“어떻게 부르라는 거야?”

방법이라도 미리 알려 주고 사라지든가 하지. 참, 나.

* * *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수선했던 것들이 슬슬 정리될 무렵, 파랑새가 나를 찾아왔다.

“거기, 한가해 보이는 R팀 대장!”

“한가한 거 아닙니다. 명상 중이었지요.”

“요즘은 명상을 코 골면서 하는 게 유행인가 보네. 바쁜 일은 없지?”

“네, 한가합니다.”

“잘됐네. 소집령 떨어졌으니까 움직일 준비해.”

“소집령요? 전체 소집령입니까?”

“아니, 간부 소집령.”

소집령은 두 부류로 나뉜다.

전체 소집령.

그리고 간부 소집령.

전체 소집령은 블루로즈단에 소속된 용병 전체에게 해당된다.

반면 간부 소집령은 각 팀의 부대장급 이상의 직급을 지닌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간부 소집령을 내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파랑새는 그 이유를 내게 들려줬다.

“일거리가 다량으로 들어왔어. 일 분배 좀 해야 할 거 같다고 첸버가 그러더라.”

마침 잘됐다.

그동안 R팀을 개편한답시고 의뢰를 너무 안 받았다.

새로 합류한 이들도 이제는 슬슬 블루로즈단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

적응이 필요할 때 실전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나이가로 오면 돼. 여기서 편도로 2일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야.”

파랑새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잘 있으라고 하고서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파랑새.

아마 블루로즈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파랑새가 가장 바쁜 사람일 거다.

* * *

나이가에는 나와 드레인, 이렇게 둘만 가기로 했다.

부대장은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간부급 한 명은 본거지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나의 방침이었다.

이래서 일부러 나는 부대장을 두 명으로 임명했다.

두 명이라는 이점을 최대야 살려야 하지 않겠나?

암, 그렇고말고.

첸버는 내가 부대장 두 명을 전부 다 데리고 오지 않은 점에 대해선 뭐라 하지 않았다.

그보다 첸버는 다른 쪽으로 놀라움을 표출했다.

대상은 B팀 대장, 리오나였다.

“리오나, 여기에 와도 돼?”

“간부 소집령이잖아요. 오히려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뭐, 그렇긴 하지만…….”

첸버는 레임스를 힐긋 바라봤다.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 반응을 보이는 레임스였다.

리오나는 라크스 가문에 관련된 일 때문에 머릿속이 한창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리오나는 대장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히 임했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리오나의 저 모습.

대장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B팀 대장과 부대장, 그리고 R팀 대장과 부대장.

이렇게 총 넷이 소집령에 응했다.

S팀은 첸버가 대표로 참가했다.

나는 첸버에게 물었다.

“단장은 안 오나요?”

“어, 귀찮대.”

“소집령을 내린 사람은 단장이 아니었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가 간부 소집령을 제안했고, 단장이 그걸 승인했지. 이름은 단장 걸로 나갔지만, 실제로 제안한 건 나야. 그러니까 문제는 없어.”

언제쯤이면 블루로즈단 단장의 실체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미스터리다. 흐음.

첸버는 전체 소집령 때처럼 큰 두루마리를 펼쳤다.

의뢰가 상당했다.

총 35개.

전체 소집령 당시 의뢰가 15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번에는 상당히 많은 축이었다.

대신 35개의 의뢰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눈치 빠른 드레인이 대표로 공통점을 언급했다.

“전부 다 호위 의뢰인데?”

“자네 말이 맞아.”

고개를 크게 끄덕여 주는 첸버.

드레인의 말대로였다.

귀족 아니면 돈 많은 상인을 호위하는 내용이 다수였다.

첸버는 일이 이렇게 된 까닭에 대해 설명을 들려줬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최근에 커다란 사건이 하나 발생했지.”

그 말을 듣자 리오나의 어깨가 잠깐 움찔했다.

리오나와, 아니 리오나의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건이다.

파리마 사건.

귀족들이 칠흑의 조각에게 대량 학살당한 끔찍한 사건으로 유명했다.

“파리마 사건 때문에 칠흑이라는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났지. 귀족들은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더군. 자신도 제2의 파리마 사건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수많은 용병 조직들에 호위 의뢰를 보내고 있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될 정도야.”

용병 인력 부족 현상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하기야,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 목숨을 애지중지한다.

게다가 귀족을 대상으로 사건이 발생했으니, 경계심이 안 들려야 안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의뢰는 총 35개. 이 중에서 우리 S팀이 15개를 가져가지. B팀에서 12개를 가져가고, 나머지는 R팀에서 가져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까 하는데.”

“왜 우리는 숫자가 적은데?”

드레인이 바로 태클을 걸었다.

잘한다, 드레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콕 찍어서 대신 말해 주네.

이런 배분을 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R팀은 이제 막 개편을 마친 부대니까 초반부터 너무 많은 의뢰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개수를 줄이고 줄인 거야. 뭐, 자네들이 원한다면 더 줄 수는 있는데, 개인적으로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군.”

첸버는 나를 응시했다.

각 부대의 행동 방침을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대장의 권한이다.

굳이 어려운 길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그대로 해 주세요. 대신, 탐나는 의뢰가 있는데 그거 하나만 저희가 가져갈 수 있게끔 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선지목인가? 좋지. 어떤 걸 원하는지 말만 하게나.”

저번에도 나는 혼자서 먼저 의뢰 선택권을 가지고 지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보자마자 이건 무조건 해야 한다 싶은 의뢰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25번 하겠습니다.”

대상인 웨일 호위 임무.

저건 반드시 우리 걸로 가져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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