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42화 (42/240)

# 42

혼돈이 시작된 날 (2)

테일의 발표 내용은 델리피나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나에게도 파리마 사건에 관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내용은 내가 아는 그대로였다.

여기서 하나 더 추가한다면, 파리마 사건으로 인해 희생당한 자들의 명단이 붙어 있다는 것 정도일까?

내가 아는 귀족들의 이름은 없었다.

애초에 알고 지내는 귀족들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스툰의 아르헨 정도.

그러나 아르헨은 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영주였기에 파리마 사교 모임에 초대받진 못했다.

‘맞다, 한 명 더 있지.’

잊고 있었다.

내가 견습 용병 시절 때 인연을 맺게 된 귀족이 한 명 더 있었다.

바우너 그랑트.

명단을 눈으로 쭉 훑어 내려가던 도중이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히즈 그랑트라는 이름이 명단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우너 그랑트의 아버지다.

서민에서 귀족으로 신분 상승의 기적을 선보이며 권력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남자.

그가 파리마 사교 모임에 갔을 줄이야!

‘아니지, 권력 욕심이 충만한 사람이니까 충분히 가고도 남았을지도.’

라그너가 했던 말처럼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참가했어야 하는 모임이다.

혹시 바우너 그랑트도 같이 간 건 아닐까 싶어서 그의 이름도 찾아봤다.

불행 중 다행히도 바우너의 이름은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한번 가 볼까?”

오랜만에 나울에 들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우리가 수행해야 할 큰 의뢰는 없었다.

바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말을 빌리기 위해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때 아는 얼굴과 만나게 되었다.

레임스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레임스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R팀 대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임스는 여전히 나를 싫어했다.

난 레임스의 이런 태도에 딱히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레임스는 그냥 말투만 조금 고까울 뿐이지, 실질적으로 나에게 피해를 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데브처럼 나를 죽이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나울에 가려고.”

“나울? 거긴 왜? R팀에 의뢰라도 떨어졌나?”

“그럴 일이 있어. 그러는 너야말로 어디 가려고 그러는데?”

“난…….”

레임스는 말끝을 흐렸다.

말하기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숨겨 둔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냐?”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농담도 안 받아 주네.

평소대로라면 ‘너, 내가 여자한테 인기 없다는 거 알고서 그런 말 하는 거지? 싸우자는 거냐?’라고 열불을 냈을 텐데.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었다.

때마침 아는 얼굴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

말을 끌고 나오는 여인, 리오나.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리오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다.

그러나 리오나는 나를 한번 쳐다보기만 할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요상한데?’

레임스는 나에게 저리 가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난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얌전히 레임스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리오나와 레임스가 마구간에서 용무를 마칠 때까지 나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저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때 가르시아와 드레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대장,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드레인이 내게 물었다.

나는 손으로 마구간 쪽을 가리켰다.

“말을 빌리려고 하는데, 리오나 때문에 잠시 대기 중입니다.”

“대기? 왜? 가서 빌리면 되잖아.”

“분위기가 많이 이상한 거 같더라고요.”

“아…… 그것 때문인가?”

드레인은 뭔가 알고 있었다.

목소리를 잔뜩 낮춘 드레인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끔 주의하면서 내게 정보 하나를 흘렸다.

“사실 B팀 대장은 귀족 자제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본명은 리오나 라크스, 라크스 공작의 여식이야. 단, 서출이지. 예전에 라크스 공작이 하녀랑 눈이 맞은 적이 있거든. 그때 낳은 자식이 리오나 대장이야. 라크스 공작 밑에서 자라 오다가, 열두 살 때였나? 서열 전쟁 때문에 귀족의 신분을 버리고 용병으로 들어오게 되었지. 어릴 때 리오나 대장의 검술 연습에 많은 도움을 준 게 바로 나, 드레인이야. 참고로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냐 하면…….”

드레인의 수다를 BGM으로 삼기로 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일에는 이제 익숙해졌다.

투 머치 토커 전용 대응 방식이다.

나는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파리마 사건 희생자 목록이 적힌 종이였다.

라크스 공작의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라크스 공작은 살아 있는 거 아닌가요?”

“살아 있긴 하지. 근데 생명이 많이 위태롭대. 그래서 거기 명단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거야.”

“그랬군요.”

신분을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리오나에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다.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을 것이다.

때마침 리오나는 레임스와 함께 말을 빌리고 마구간을 벗어났다.

‘이제 내 차례인가?’

이동하려던 찰나에 드레인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대장은 어디 가려고 말을 빌리는 거야?”

“나울에 갔다 오려고요.”

“나울? 거긴 왜? 우리 R팀에 의뢰라도 떨어졌나?”

어쩜 이리 레임스와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동기끼리 닮아도 너무 닮았다.

“희생자 명단 보시지 않았습니까, 선배. 거기에 히즈 그랑트의 이름이 있었어요.”

“응, 진짜? 자세히 못 봤는데.”

드레인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 꼬마 도련님, 상심이 크겠네.”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 가깝기도 해서 잠깐 갔다 올까 합니다만……. 선배도 같이 가실래요?”

“나? 좋지. 마침 할 일도 없고……. 가자.”

그렇게 드레인과 함께 둘이서 나울에 잠깐 갔다 올 생각이었으나, 일행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

가르시아도 같이 가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대장.”

“안 따라와도 되는데.”

“대장을 지키는 건 부하의 몫입니다. 그리고 대장은 저희에게 있어서 중요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혹시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충성심 하면 가르시아, 가르시아 하면 충성심이다.

게다가 가르시아는 유독 나를 잘 따랐다.

내가 부하 하나는 잘 뒀단 말이야.

* * *

나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도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도시 전체가 초상집 같았다.

침울함 그 자체였다.

‘하기야 영주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는데, 밝은 분위기는 아니겠지.’

걱정되는 마음으로 그랑트 저택을 향해 나아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나와 드레인을 예의 주시했다.

“가만, 어디서 많이 본 자들인데…….”

나는 병사의 얼굴을 기억한다.

“저번에 의뢰 잘못 받았다고 여기에 한번 들렀던 블루로즈단 용병들인데……. 우리 그때 만났잖아요.”

“아!”

그제야 병사는 기억이 난 모양인지 나를 보며 손뼉을 쳤다.

한편, 같이 근무를 서는 후임 근무자는 우리와 처음 대면하는 남자였다.

선임 근무자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우리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설마 거짓 의뢰를 받았다고 주장하려 온 건 아니겠지?”

“바우너 그랑트 도련님을 만나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저희가 이래 봬도 도련님이랑 친분이 좀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저희가 왔다고 말씀드리면 바로 들여보내라고 할 겁니다.”

“…….”

병사는 내 말을 못 믿겠다는 식으로 바라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내 말이 사실일 경우, 멋대로 우리를 내쫓기라도 하면 바우너 그랑트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병사는 일단 확인은 해 보자는 심산으로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선임 근무자는 혀를 차면서 문을 열어 줬다.

“들어가도록.”

“감사합니다, 하하.”

역시 바우너 그랑트는 우릴 잊지 않았다.

그보다 예전에 비해서 저택이…… 뭐라고 해야 할까?

많이 달라진 느낌이다.

관리가 잘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는 굉장히 깔끔했는데. 지금은 좀 너저분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저택 로비에 미리 나와 있던 바우너 그랑트는 우리를 반가이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형.”

“그래, 간만이다. 예전에 비해서 키가 좀 큰 거 같은데?”

“크긴 컸죠. 하지만 아직 마음은 어른이 되지 못한 거 같아요.”

“벌써부터 어른이 되는 걸 논할 단계는 아니야. 그보다…….”

말끝을 흐렸다.

나와 드레인 그리고 가르시아가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다.

“히즈 님의 일은 안타깝게 됐구나. 뭐라 할 말이 없다.”

“아닙니다. 슬픈 일이긴 한데, 그래도 풀 죽어 있어 봤자 죽은 아버님이 다시 살아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슬픔에 잠길 시간이 없어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곳 나울을 다시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바우너 그랑트는 본인이 말했던 것과 다르게 예전에 비해 어른이 되어 있었다.

바우너는 외동아들이다.

히즈 그랑트의 뒤를 이을 사람은 오로지 바우너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바우너는 본인이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한편으로는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2층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우너! 식사 시간 다 되었는데 어딜 가 있는 게냐!”

“죄송합니다, 어머니. 손님이 와서요.”

어머니?

처음 알게 되었다.

바우너가 어릴 적에 그의 어머니는 이른 생을 마감했다.

바우너에게 어머니는 없을 터.

‘그런데 어머니라니?’

내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바우너는 힘없는 미소를 선보였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군요. 일단은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30분 후에 다시 찾아뵐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어, 알았어.”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 * *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랑트 가문은 소소한 문제에 휩싸여 있었다.

히즈 그랑트가 죽고 난 뒤, 미우리라는 여인이 바우너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을 데리고 갑자기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미우리는 자신이 데리고 온 소년이 히즈 그랑트와 본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임을 주장했다.

자신과 본인의 아들에게도 히즈 그랑트의 유산을 물려받을 권한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날 이후로 미우리는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그녀의 아들과 함께 이 저택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했다.

이 문제를 듣고 나는 절로 리오나를 떠올렸다.

리오나는 오히려 본인이 귀족으로서의 모든 혜택을 박차고 나왔는데 이쪽은 완전 반대였다.

이야기가 끝난 뒤 드레인은 혀를 찼다.

“진짜로 아들 맞아?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하고 있는 거 같은데.”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미우리가 데려온 소년을 슬쩍 봤는데, 히즈 그랑트와 닮은 점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우너는 미우리 모자를 쉽게 내치지 못했다.

“정말로 아버지의 핏줄이라고 한다면, 제게 있어선 배다른 동생이 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매몰차게 대하질 못하겠더라고요.”

이제 알았다.

이 문제를 키운 건 미우리라는 여인의 존재가 아니었다.

바우너 그랑트가 냉철하지 못해서였다.

어쩔 수 없군.

“이 형이 해결해 주마.”

“형이요? 하지만 이건 민감한 문제인데…….”

“형이 누구냐? 돈만 주면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결해 주는 용병 아니냐?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러니까 넌 돈만 줘.”

“하하, 돈은 빠지지 않는군요.”

“그래야 내가 움직일 명분이 생기지.”

“알았어요. 형한테 맡길게요.”

바우너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

그래, 나에게 맡기라고. 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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