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41화 (41/240)

# 41

혼돈이 시작된 날 (1)

용암 지역에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파이어 스톤들은 나와 라그너가 만든 상단의 성공으로 향하는 훌륭한 초석이 되었다.

라그너와 함께 상단을 만든 지 3개월 째.

우리가 유통한 파이어 스톤은 델리피나 대륙 전체의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파이어 스톤의 보급화!

이제 파이어 스톤은 더 이상 돈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서민들도 원하면 파이어 스톤을 사서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15만 제피를 자랑하던 파이어 스톤의 시장가는 현재 10만 제피로 떨어졌다.

거의 3분의 1가량 떨어진 셈이었다.

그래도 우리 상단은 오히려 파이어 스톤으로 많은 돈을 만졌다.

공급량으로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나마 수량을 조절해서 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더 풀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시장이 완전히 붕괴될 수 있기에 일부러 조절을 해서 수량을 풀기로 했다.

술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로인 님!”

“어, 왔어?”

라그너가 내게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몰라보게 달라진 라그너.

그때만 하더라도 술에 전 폐인이었는데, 지금은 면도도 깔끔하게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자른 미남이 되어 있었다.

라그너는 나와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3개월 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설마 제가 로인 님과 이런 관계가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하하하!”

라그너는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그냥 말을 놓아도 된다고 했었으나, 라그너는 생명의 은인에게 말을 편하게 할 수 없다면서 3개월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만약 로인 님이 저에게 상단을 같이 차리자는 제안을 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마 바닥에 나뒹굴면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객사했을지도 모릅니다.”

“뭐, 그거야 어디까지나 ‘만약에’였으니까.”

사실 내가 아니었더라도 라그너는 혼자서 잘 먹고 잘살았을 것이다.

그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곱 번째 사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소설 속 법칙을 지닌 캐릭터였으니 말이다.

그 일곱 번째 기회를 내가 이용한 셈이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라그너가 아닌 나였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은 후에 라그너에게 물었다.

“설마 나한테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부른 건 아닐 테고……. 서두가 너무 긴 거 같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하하, 예! 다름이 아니라 상단명 때문에 뵙기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여태껏 임시 상단명으로 상단을 운영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슬슬 정해야 할 거 같아서요.”

상호명이라……. 중요하지, 암!

“혹시 생각해 두신 건 있습니까?”

물론 있다.

아마 라그너도 흔쾌히 허락할 거다.

“로그 상단. 어때?”

“오! 어감은 나쁘지 않군요. 특별한 의미라도 담겨 있습니까?”

“로인의 로 자하고 라그너의 그 자를 따와서 만든 단어지. 로그. 마음에 들어?”

“매우 마음에 듭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로인 님이 만약 저에게 상단명을 짓는 일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저도 왠지 로그 상단으로 지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감이 좋은 친구다.

사실 로그 상단은 라그너가 일곱 번째 사업 시도를 할 당시에 사용했던 실제 상단명이다.

그냥 그걸 알려 준 것뿐이었다.

상단명도 그렇게 정해졌다.

또 다른 용무가 있나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좋은 제안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무슨 제안인데?”

“다음 주에 귀족들끼리 모이는 파티가 벌어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친목 도모가 목적인 사교 모임이라고 하더라고요. 저와 로인 님을 그곳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린 귀족도 아니잖아. 상단도 이제 막 성장하는 단계에 불과하고.”

“대신 자본력이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돈 많은 서민은 귀족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귀족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도 우리의 사업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로인 님하고 저를 초대할 정도니까요. 로인 님이 저번에 말씀하셨던 사업 확장에 관한 계획안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 있었지.”

“거기에 몇몇 귀족이 관심을 보이는 거 같습니다. 거기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견도 초대장에 덧붙여서 왔더라고요.”

내가 돈 좀 만지기 시작하니까 이런 제안들이 이따금씩 오기 시작하나 보다.

돈은 만능이다.

소설 속 세계에서도 이 법칙은 여전히 적용되었다.

그래서 나는 용병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나만의 상단을 차리려고 했다.

돈만 있으면 곤란한 일이 닥쳐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

‘사교 모임이라…….’

사실 구미가 당기긴 했다.

이곳의 귀족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소설 속 지문이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은 욕심이 나긴 했다.

“다음 주라고 했지?”

“예.”

“바쁜 일정은 없는데 장소가 문제겠어. 너무 멀면 내가 가기 힘드니까.”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진 않습니다.”

“어디인데?”

“파리마라는 도시입니다.”

“……!”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파리마. 파리마라…….

“가만,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예? 켈타력 211년 4월 18일입니다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역시 그동안 용병 생활하랴, 상단 꾸리랴 하느라 나도 모르게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4월 21일.

그날은 파리마 사건이 발생하는 날이다.

소설 속에서도 꽤나 비중 있게 다뤄진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파리마에서 시행되는 귀족들의 사교 모임은 히디아라는 귀족이 주최한다.

문제는 이 귀족의 정체다.

히디아는 칠흑의 조각에 잠식당한 귀족이다.

귀족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칠흑의 조각에게 완전히 삼켜지게 되고, 히디아는 그 자리에서 귀족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다.

파리마 사건이 발생한 후, 마법사 길드 소속 테일은 칠흑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이후부터 델리피나 대륙은 큰 혼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중요한 사건인 만큼 기억을 해 두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할 일은 없다.

사교 모임을 무효로 돌릴 힘도 없을뿐더러, 명분 역시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는 수밖에.

“그 초대는 무시해라.”

“예? 하지만 로인 님,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참가해서 그들과 친분을 다져 놓으면, 후에 우리 상단에게 큰 도움을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미리 인맥을 다져 놓아야…….”

인맥보다 목숨의 무게가 훨씬 더 무겁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라그너, 네가 상단을 꾸려 가는 동안 늘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이 하나 있었지. 뭔지 기억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로인 님을 신뢰하라고 하셨습니다.”

“날 믿어라. 거기 가면 큰 손해를 보게 될 거야. 그리고 네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파리마 사교 모임에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슨 말로 둘러대서라도 그곳에 가지 말라고 전해 둬.”

“대체 이유가 뭡니까?”

지금 내가 라그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내 촉이 가지 말라고 외치고 있거든.”

* * *

만약 내가 라그너의 입장이었더라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촉’ 하나 때문에 탄탄한 인맥을 다져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대로 날려 먹으라고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도 라그너는 다행스럽게도 내 말에 따르기로 했다.

좋게 말하면 나를 신뢰하고 있고, 나쁘게 말하면 맹신하고 있다.

여하튼 이 믿음 덕분에 나는 라그너를 파리마 사건 희생자 명단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 밖에 라그너는 앞으로 상단을 운영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내게 들려줬다.

현재 가장 필요한 건 상단 본사다.

어디에 본거지를 잡을지, 이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여기에 맞물려 나는 우리 블루로즈단 R팀의 본거지도 정할 생각이었다.

원래 블루로즈단은 본거지 없이 움직이는 것이 대세였다.

나는 이 규칙에 대해 항의하고자 첸버를 찾아갔다.

대판 싸울 생각을 하고서 첸버와 만났건만, 첸버가 들려준 말은 짧고도 강렬했다.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처음 이 말을 들은 순간, 내 반응은 ‘엥?’이었다.

첸버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본거지를 두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S팀의 규율일 뿐, B팀이나 R팀은 대장의 의사에 따라 마음대로 운영해도 돼. 자율 운영이라고 했을 텐데. 혹시 벌써 잊은 건가?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해 달라고!

여하튼 로그 본사와 R팀의 본거지로 삼을 장소를 슬슬 정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어디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아스툰?

그곳의 영주인 아르헨과 친분이 있으니까 나쁘진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아스툰은 너무 외진 곳에 있다.

기왕이면 교통이 편한 곳이면 좋겠다.

“이건 나중에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고.”

나는 숙소를 빠져나왔다.

늦은 저녁, 사람들은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자네! 방금 소식 들었나?”

“파리마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며?”

“글쎄, 히디아 백작이 갑자기 괴물로 변해서 사람들을 막 잡아먹었다고 하던데?”

“어머머, 세상에! 그게 정말이에요?”

“우리 영주님은 무사하시려나? 거기 간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오늘은 4월 21일.

드디어, 델리피나 대륙을 혼돈으로 빠뜨리는 날이 다가왔다.

* * *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향해 다급히 뛰어온 드레인.

“후배! 아니, 대장! 긴급 속보! 긴급 속보가 있어!”

“파리마 사건이죠? 이미 다 들었습니다.”

“……뭐야, 알고 있었어?”

드레인은 갑자기 흥이 깨진 모양인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 내가 파리마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드레인은 이거 가지고 1시간 동안 내 앞에서 수다 타임을 가졌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나저나 참 희한하단 말이야. 저번에 그 뭐였더라…… 느와르 남작이었나? 그 귀족도 갑자기 막 괴물로 변했잖아. 이거랑 거의 일맥상통하는 사건 아니야? 게다가 이번에도 귀족이 주체고.”

가끔 느끼는 거지만, 드레인은 은근히 감이 좋다.

이런 것들을 바로바로 알아차리다니.

레임스보다는 훨씬 눈치가 빨랐다.

“아마 두 사건이 뭔가 연관이 있는 거 같네요.”

“그러게 말이야. 아, 맞다. 저번에 우리랑 만났던 테일이라는 마법사 있잖아? 수사관 양반 말이야. 그자가 조만간 마법사 길드 대표로 뭔가 큰 발표를 할 거라던데? 파리마 사건이랑 연관되어 있는 거니까 꼭 챙겨 들으라고 하더라고.”

난 발표 내용까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켈타력 211년 4월 21일. 파리마 사건을 통해 마법사 테일은 칠흑의 존재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포착하게 된다.

그는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 저녁, 대대적으로 칠흑의 존재를 공표한다.

칠흑의 정체가 드러난 4월 22일.

혼돈이 시작된 날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내용이다.

파리마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잘 안다.

이 사건을 통해 주인공은 귀족이 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파리마 사건에서 많은 귀족들이 사라진 탓에 각국은 귀족들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귀족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준다.

라스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젊은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딱 이때 파리마 사건이 터짐으로 인해 라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진다.

라스는 처음엔 귀족이라는 자리에 관심은 없었지만, 신분을 통해 얻는 이점을 무시할 수 없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서민 라스에서 영웅 라스로, 영웅 라스에서 남작 라스로 진화하게 된다.

그 밖에 새로운 인물들이 라스와 마찬가지로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로인이란 소년은 듣보잡이라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거머쥘 수조차 없다.

‘좋겠네, 주인공.’

세상은…… 아니, 소설 속 세계는 참 불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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