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칠흑(漆黑)의 존재 (5)
로턴 크라운의 능력을 다시 한번 발동시키는 느와르 남작.
그가 로턴 크라운의 능력을 손에 얻자, 내가 밝혀낸 10미터의 법칙조차 통용되지 않았다.
20미터, 아니 50미터까지는 손쉽게 능력을 발동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위력도 상당하다.
변이 고블린이 로턴 크라운을 다룰 때에는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일부 신체를 뭉개는 정도의 선에서 끝났다.
그러나 느와르 남작은 사람 하나를 통째로 짓뭉개 버릴 수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느와르 남작을 없애야 한다.
아직 내 손에는 드래곤 클로의 효과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속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분! 그 안에 끝장을 봐야 해, 어떻게 해서든!’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무려 칠흑의 조각이다.
아무리 내가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칠흑 앞에서는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칠흑은 작중 최종 보스니까.
느와르 남작이 용병들을 학살하는 동안, 나는 빠르게 접근을 시도했다.
나를 보는 순간 남작은 오른손을 휘둘러 내게 중력 조절 능력을 발동시켰다.
다시 한번 감당하기 힘든 무게감이 나를 짓눌렀다.
변이 고블린 때와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무게감이었다.
“크윽……!”
용신단의 레벨이 낮아서 그런 걸까?
로턴 크라운의 능력을 버텨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 발이 묶인 사이에, 레임스와 드레인이 남작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뒈져라, 괴물 녀석아!”
그러나 레임스의 주먹이 남작에게 닿기도 전에 그의 팔이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였다.
“끄아아악!”
오른팔이 부러졌다.
보는 내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드레인이 남자의 뒤를 노렸지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드레인의 검만 부러졌다.
“선배! 뒤로 물러서요!”
내 경고를 듣자마자 드레인은 뒤로 몸을 날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움푹 파였다.
레임스와 드레인이 남작의 관심을 끌어 준 덕분에 나를 짓누르던 중력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약해졌다.
드래곤 클로의 유효 시간이 아직 30초 남았다.
나는 모든 힘을 두 다리에 쏟아부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남작은 다시 한번 내게 중력 조절을 시전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뎅겅!
내 쪽으로 뻗었던 남작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
남작이 눈치채지 못한 일격을 날린 주인공은 리오나였다.
그가 다른 쪽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리오나가 레이피어를 빼 들고 남작에게 치명상을 가한 것이다.
하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계집년이 감히……!”
남작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유효타를 날린 건 좋지만 그녀는 남작과 너무 가까이 있다.
이래선 내가 구해 줄 수도 없다.
중력 조절이 발동되었다.
리오나의 온몸을 짓누르……는 줄 알았건만.
예상 못 한 일이 발생했다.
리오나의 왼쪽 팔목 보호대가 강한 빛을 뿜어 댔다.
-세르잔의 팔목 보호대
-등급 : 레어
-방어력 +25
-안티매직 효과가 걸려 있는 팔목 보호대. 마법 공격을 1회 방어할 수 있다.
리오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쩌적!
세르잔의 팔목 보호대에 금이 갔다.
아이템은 비록 파괴되었지만, 덕분에 리오나는 죽을 뻔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리오나가 시간을 많이 벌어 줬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돼!’
있는 함을 다해 남작의 앞까지 빠르게 도달했다.
남작은 내 움직임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존재를 없애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드래곤 클로의 효과가 남아 있는 오른손을 뻗었다.
‘푸욱!’ 소리와 함께 내 손은 남작의 가슴을 관통했다.
오른손을 다시 빼냈다.
손에는 검게 물든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다.
칠흑의 조각은 주로 심장에 자리를 잡는다.
라스가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존재를 쓰러뜨릴 때, 이와 같은 정보가 나왔다.
심장을 파괴하지 않으면 칠흑의 조각은 계속해서 손상된 육체를 재생한다.
내가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까 리오나에게 잘렸던 팔도 금방 복구했을 것이다.
힘을 살짝 주자 심장이 ‘콰직!’ 소리와 함께 터졌다.
남작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짐승의 울부짖음과 흡사했다.
심장을 제거하자, 남작의 몸은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푸른 불꽃은 남작의 몸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리오나는 내게 물었다.
“끝난 거야?”
“아마도.”
“대체 뭐야, 이거. 새로운 전염병이야?”
“아니.”
오히려 전염병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리오나에게 들려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세계 멸망의 징조.”
* * *
로턴 크라운을 얻기 위해 먼 곳으로 달려왔지만, 결국 소득은 없었다.
대신, 칠흑의 조각과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는 경험은 얻었다.
이게 좋은 경험이 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소설 속 최종 보스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해 봤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로인.”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리오나.
“아까 던전에서 했던 말, 그게 무슨 뜻이야?”
“…….”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심취해서 ‘세계 멸망의 징조’라는 발언을 해 버렸다.
리오나는 내가 한 이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느와르 남작 사건은 어제 끝났다.
그러나 리오나는 던전에서 돌아오고 나서 지금 이 순간까지 나를 따라다니면서 계속 물었다.
‘하여튼 이놈의 입이 방정이야, 당분간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칠흑의 존재는 테일이라는 젊은 마법사에 의해 머지않아 밝혀지긴 한다.
그러나 그건 1권 후반 때부터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내가 미리 칠흑의 존재를 발설해 버린다면 괜히 이야기의 흐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그동안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하나 리오나는 굉장히 끈질겼다.
“세계 멸망의 징조라며. 그러면 중요한 이야기 아니야?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야?”
“그냥 폼 한번 잡아 보고 싶어서 말해 본 것뿐이야. 별다른 의미는 없어.”
“내가 보기에는 아닌 거 같은데?”
리오나의 집착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어쩔 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리오나의 호기심을 역이용하기로 하자.’
“좋아, 말해 줄게.”
그제야 리오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응. 이 조건을 수락한다면 내가 아는 정보를 말해 줄게.”
리오나의 표정은 급격하게 굳어졌다.
“나 돈 없어.”
용병대장 주제에 돈이 없는 거냐?
의외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하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이기도 했다.
“정보료를 요구하는 게 아니야. 두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돼.”
“뭔데?”
“첫 번째, 내가 알려 주는 정보는 당분간 모른 척할 것.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지 마.”
“이유는?”
“불명확한 정보니까. 괜히 허위 정보로 혼란을 초래하고 싶진 않아. 그래서 일부러 너한테도 비밀로 했던 거야.”
“……하긴.”
리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말에 납득했다.
깐깐할 것같이 보이면서 은근히 사람 말을 잘 믿는다.
내가 일시적으로 벙어리였을 당시에 둘러댔던 핑계도 곧이곧대로 믿었고.
“좋아, 그 조건은 받아들일게. 두 번째 조건을 말해 봐.”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그동안 남몰래 숨겨 왔던 내 야망을 드러냈다.
“나를 R팀 대장직 후보로 추천해 줘.”
이것이 리오나에게 딜을 걸게 된 진짜 목적이다.
리오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R팀 대장직은 공석이다.
원래 대장을 맡던 남자가 있었으나, 부상이 심해 결국 대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용병 일 자체를 은퇴해 버리고 만 것이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덕분에 블루로즈단 R팀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대장 후보로 거론되는 이는 많았다.
그러나 아직 누가 R팀 대장을 맡을 것인지 정해지진 않았다.
후보는 열다섯 명 이상의 추천, 혹은 부대장급 이상의 직위를 가진 자의 추천을 받으면 등록될 수 있다.
솔직히 내가 열다섯 명의 용병들에게 추천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인성 문제로 계속 거론되고 있는 게 나인데, 누가 나를 추천하겠어?’
그래서 치트 키를 쓰기로 했다.
이름하여 ‘리오나에게 추천받기’ 작전이다.
리오나는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부대장은 한 명만 추천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 리오나는 아직 추천권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네가 R팀 대장직을 노릴 줄은 몰랐는데?”
“이래 봬도 난 야망가거든.”
R팀 대장을 노리는 이유는 하나다.
내 입맛에 맞는 부대를 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듬직한 동료들이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나만의 세력을 굳히고 싶었다.
리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추천은 해 줄게. 대신, 네가 대장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하지 마. 난 거기까지 책임져 줄 생각은 없어.”
“추천만 해 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것으로 우리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 * *
레임스는 팔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기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드레인은 레임스를 간병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자, 그럼 말해 봐.”
리오나는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어필을 해 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오나에게 모든 정보를 털어놓진 않았다.
각색을 거친 정보를 전달해 줬다.
이럴 때 편집자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라바인 전투에 끌려갔을 때 어둠에 잠식되어 조종당하는 벨라시오닉을 본 적이 있다.
그 어둠의 존재는 나도 잘 모르지만, 어제 느와르 남작을 집어삼킨 어둠과 비슷했다…….
딱 이 정도만 말했다.
리오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어둠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이거지?”
“응, 난 목격하기만 했으니까.”
내 말에 리오나는 더 이상 검은 존재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알았어. 일단 이건 비밀로 해 둘게. 그리고 내일 이곳으로 마법사 길드에서 사람을 보내올 거야. 우리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까 알아 둬.”
“묻고 싶은 게 뭔데?”
“느와르 남작의 죽음에 대해서라고 그러던데?”
“그건 이미 보고가 끝난 거 아니야?”
느와르 남작과 같이 왔던 그의 사병들은 느와르 남작이 갑자기 괴물로 변해서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었다고 상층부에 보고를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나도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마법사 길드에서 요청해 온 거니까 받아들이기로 했어. 어쩌면 네가 말한 검은 존재에 대해 물어보려고 그러는 것일지도 몰라.”
“혹시 여기에 오기로 한 마법사 이름이 뭔데?”
“한 명은 테일이라는 마법사고, 다른 한 명은 모르겠어. 테일의 보좌관이라고만 들었고, 이름까진 들은 적 없어.”
테일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칠흑이라는 존재를 가장 먼저 세상에 공표한 마법사다.
리오나의 예상이 맞았다.
그들은 벨라시오닉 사건 때부터 칠흑의 존재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느와르 남작 사건에 개입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테일이 칠흑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건 반년 뒤다.
현시점에서 칠흑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나, 그리고 주인공 라스밖에 없다.
칠흑의 존재를 쫓는 수사관 테일.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이야기의 흐름은 벌써 1권 중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