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칠흑(漆黑)의 존재 (4)
변이 고블린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놈이 나를 보게끔 일부러 내 존재감을 알렸다.
“야! 거기 코쟁이!”
변이 고블린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하긴 했지만, 코쟁이라는 말에 바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변이 고블린은 내가 근처까지 다가왔음을 알아차리고 로턴 크라운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가던 길을 멈추고 선회해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내가 있던 자리의 지면이 푹 꺼졌다.
공격이 빗나가자 변이 고블린은 오기가 생긴 모양인지 내게 중력 공격을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계속 몸을 뒤로 날리면서 회피 동작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대략 5분 동안 이런 무의미한 술래잡기가 계속되었다.
리오나가 틈을 노려 변이 고블린의 뒤로 돌아들어 롱 소드를 휘둘렀다.
변이 고블린은 공중으로 튀어올라 리오나의 공격을 피해 냈다.
리오나는 중력 공격이 무섭지 않은가 보다. 다른 용병들은 무서워서 접근도 못 하고 있는데.
‘담력이 장난이 아니네!’
역시!
단역답게 엑스트라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 줬다.
공교롭게도 리오나 덕분에 잠시 숨통이 트였다.
다시 남작과 용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물러섰다.
드레인은 내게 말했다.
“어서 와. 그나저나 너 원래 이렇게 빨랐냐?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가 없던데?”
“봉인되어 있는 오른손의 흑염룡을 해방시키면 이런 초인적인 능력이 발동되곤 해요.”
“흑염…… 뭐?”
“농담이에요. 그냥 웃자고 한 소리니까 흘려버리면 됩니다.”
생각해 보니 좋은 핑곗거리는 아니었다.
나중에 괜찮은 걸로 미리 생각해 둬야겠어.
그보다 5분간의 술래잡기 덕분에 나는 로턴 크라운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중력 조절이 가능한 범위는 반경 10미터다.
몬스터가 아이템을 사용해서 범위가 저렇게 좁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10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답은 두 가지다.
10미터 밖에서 변이 고블린을 쓰러뜨리든가, 아니면 놈이 능력을 발동하기 전에 죽이든가.
전자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화살을 아무리 날려 봤자 변이 고블린에게 닿기도 전에 땅바닥에 처박힌다.
그렇다면 마법은 과연?
“우리들 중에 마법사 있습니까?”
혹시 몰라 용병들에게 물었다.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꽝인가 보다.
그때였다.
리오나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마법이 필요하면 말해. 해 줄게.”
“마법 쓸 줄 알아?”
의외다.
나는 리오나가 당연히 검사라고 믿고 있었는데, 마법까지 사용할 줄이야!
그러나 리오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마법을 쓸 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공격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1회용 아이템이 있다고 말한 것뿐이야.”
“아, 그래?”
“이거 받아.”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작은 돌을 건네는 리오나.
“파이어볼 주문이 담겨 있는 마법석이야. 돌을 던지면 파이어볼로 변할 거야.”
“마법 공격 맞지?”
“응.”
좋았어!
안 그래도 궁금한 게 있었다.
물리 공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법 공격까지 중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소싯적 사회인 야구단에 잠시 몸을 담았던 나다.
포지션은 투수……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투수는 아니었다.
여하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마법석을 던졌다.
리오나가 말한 것처럼 마법석은 파이어볼로 변해 변이 고블린에게 날아들었다.
변이 고블린은 중력으로 파이어볼을 찍어 누르려 했다.
그러나 파이어볼은 멈추지 않았다.
마법은 중력 조절로 못 없애는 건가?
결국 변이 고블린은 바닥에 있는 돌들을 끌어 올려 벽을 만들었다.
파이어볼은 벽에 부딪치자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 공격은 못 막는다는 걸 알아냈다.
크나큰 성과다.
“마법석 있는 대로 나한테 다 줘. 잘하면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미안, 너한테 준 게 끝이었어.”
“…….”
괜히 기대했네. 힘 안 들이고 변이 고블린을 쓰러뜨릴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마법석이 없다니. 이게 말로만 듣던 희망 고문이라는 건가?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직접 놈을 쓰러뜨리는 수밖에.
“놈의 관심을 끌어 줘. 내가 저놈한테 접근해서 왕관을 빼앗을게.”
“가능하겠어? 한 번이라도 잘못 걸리면 끝이야.”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선배도 좀 도와줘요! 저 녀석이랑 굳이 싸우지 않아도 돼요. 10미터 밖에서 관심만 끌어 주면 됩니다. 거기 덩치! 너도 그만 떨고 후딱 도와!”
드레인과 레임스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리오나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여 줬다.
놈의 관심을 끄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다.
나는 리오나와 드레인, 레임스에게 마법의 단어를 알려 줬다.
리오나는 눈을 흘겼다.
“그런 걸로 놈이 우리한테 관심을 쏟을까?”
“방금 확인해 본 거니까 날 믿어.”
이래 봬도 철저한 검증을 통해 얻어 낸 실험 결과다.
리오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의심을 했지만,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했다.
리오나와 드레인, 레임스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세 남녀는 동시에 이렇게 외쳤다.
“코쟁이!”
“코쟁이 녀석아!”
“못생긴 코쟁이! 여기 봐라, 여기!”
변이 고블린은 잔뜩 화가 난 모양인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통할 거라고 했잖아!’
변이 고블린이 우리 블루로즈단 용병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나는 빠르게 녀석에게 접근했다.
10미터 반경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위험지역이다.
아무리 내가 몸이 튼튼하다 하더라도 놈의 중력 조절을 버텨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상대는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지니고 있는 몬스터다.
용신단과 같은 등급을 지닌 아이템과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서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변이 고블린이 뒤를 돌아봤다.
내 인기척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것이다.
“빌어먹을……!”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운 한번 더럽게 없지!’
변이 고블린은 곧장 중력 조절을 시전했다.
‘나를 압사시킬 생각이군!’
쿠우웅!
일순간 내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위에서 뭔가가 내 몸을 찍어 누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론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것이…… 로턴 크라운의 능력인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 같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용신단 레벨 좀 더 올리고 도전할걸!’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녀석을 향해 내디뎠다.
변이 고블린은 기겁을 했다.
중력 조절 공격에도 멀쩡하게 두 다리로 버텨 낸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서 그럴 것이다.
“으랴아아아아아!”
기합을 내지르면서 변이 고블린을 향해 뛰어갔다.
변이 고블린은 마법 공격을 막아 낼 때처럼 중력으로 지면을 끌어 올려 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깟 벽으로 나를 막을 순 없었다.
주먹으로 벽을 박살 내 버렸다.
변이 고블린은 다시 한번 벽을 세웠다.
중력으로 흙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높은 강도를 지닌 벽을 형성했다.
아까보다 더 단단했다.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무기가 남아 있었다.
‘드래곤 클로!’
내 오른손에 용의 발톱이 깃들었다.
살짝 휘둘렀을 뿐인데도 변이 고블린이 만들어 낸 압축 벽을 조각내 버렸다.
다시 한번 주먹을…… 아니, 드래곤 클로를 휘둘러 변이 고블린을 공격했다.
놈의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끼에에에에엑!
기괴한 울부짖음을 토해 내는 변이 고블린.
놈이 발버둥 친 탓에 머리에 쓰고 있던 로턴 크라운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이런!”
로턴 크라운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나보다 한발 앞서서 로턴 크라운을 낚아챈 이가 있었다.
“이것이…… 벨라시오닉이 삼켰다던 그 보물인가!”
느와르 남작이었다.
* * *
“드디어…… 드디어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내 손에 들어왔군!”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어쩐다……? 남작에게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넘겨주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 남작님?”
“뒤, 뒤에……!”
용병들은 기겁을 하면서 느와르 남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손에 얻은 순간, 느와르 남작의 몸에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블랙 다이아몬드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가 훨씬 더 음침했다.
그리고 더 기분이 나빴다.
단순한 검은 연기가 아니었다.
사기(邪氣)다.
불길한 기운은 느와르 남작을 더욱 타락시켜 가고 있었다.
동시에 느와르 남작의 피부가 점점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남작님!”
나는 급하게 느와르 남작을 불렀다.
“지금 당장 그 아이템에서 손을 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남작은 내게 물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남작에게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당신을 죽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농담이 아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살고 싶다면 당장 손 떼라!’
내가 강하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작은 내 말에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느와르 남작은 시간이 갈수록 변해 가고 있었다.
검은 존재로 변해 가는 느와르 남작.
저것이 바로 칠흑의 존재라는 건가?
소설 속에서만 봤을 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용병들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리오나도 마찬가지였다.
“로인, 저건 대체 뭐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줘!”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리오나의 모습은 난생처음 봤다.
알긴 아는데, 장황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벨라시오닉의 보물, 로턴 크라운을 한 손에 움켜쥔 느와르 자작은 손에 힘을 팍 주더니 로턴 크라운을 박살 내 버렸다.
조각난 로턴 크라운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마치 과자처럼 로턴 크라운의 조각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우적우적!
칠흑의 존재도 나처럼 보물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후우, 후우……!”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는 느와르 남작.
이제 그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괴물이다.
검은 괴물.
칠흑의 조각에 완전히 잠식된 느와르 남작은 근처에 있는 용병들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용병들의 몸이 순식간에 뒤틀렸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무언가에 짓눌려 압사당했다.
용병들은 비명을 질러 댔다.
변이 고블린을 쓰러뜨렸다 싶었더니, 더 강한 존재가 등장했다.
심지어 그 존재는 자신들을 고용한 의뢰주, 느와르 남작이다.
용병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공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결론은 뻔하지 않은가?
“느와르 남작은 죽었다. 여기서 저 녀석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우리가 죽어!”
내 말에 용병들은 결심이 선 모양인지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용병들이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겁에 질려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느와르 남작은 1권 중간 보스로 등장하는 악역 캐릭터다.
원래대로라면 라스 일행에게 퇴치당해야 할 등장인물이지만,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나의 개입으로 로턴 크라운이 느와르 남작에게 들어간 상황에서 라스 일행에게 뒤를 맡긴다든지 그런 흐름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주인공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디 한번 붙어 보자, 망할 녀석아!”
중간 보스는 내가 먼저 쓰러뜨리기로 했다.
쓰러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