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칠흑(漆黑)의 존재 (3)
내가 인수받겠다고 무작정 주장해 봤자 효력은 없다.
의뢰주에게 가서 의뢰를 대신 수행할 주체가 리오나에서 나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공교롭게도 느와르 남작은 이곳 메를에 직접 와 있었다.
심지어 엊그제 본인이 고용한 용병들과 함께 던전 내부까지 진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서 보스 몬스터에게 ‘참교육’을 당하고, 지금은 메를에서 재정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쪽이야.”
리오나는 나에게 손짓했다.
우르르 다 몰려갈 필요는 없어서 나하고 리오나만 움직이기로 했다.
레임스와 드레인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서 대기 중이다.
느와르 남작이 묵고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겼다.
“죽고 싶다면 혼자 죽든가 하쇼! 우리는 여기서 손 뗄 테니까!”
네 명의 남자들이 한 중년의 남성에게 무언가를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아니, 따지는 건가?’
딱 보자마자 저 남자가 느와르 남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물 정보 창도 내 말이 맞음을 나타냈다.
-느와르
-인물 등급 : 단역
-종합 능력 : D
-남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38세 남성. 주변인들에게 인품이 좋다는 평가를 자주 들을 정도로 훌륭한 인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 칠흑의 조각에 잠식당한 그는 결국 주인공 라스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는 중간 보스 역할을 하게 된다.
중간 보스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그렇다.
느와르는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차지하고, 그 힘으로 칠흑을 없애려는 주인공 일행을 방해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칠흑이 뿌린 조각에 잠식당하기 전에는 성군이라 불릴 정도로 좋은 인품을 지닌 남자였다.
하나 칠흑에 잠식되고 나서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선 인간성조차 상실하고 검은 괴물이 되어 버린다.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등장인물이다.
지금은 칠흑의 조각에 완전히 잠식당하기 전의 상태로 보였다.
느와르 남작은 용병들에게 물었다.
“의뢰를 관둘 텐가?”
“관둔다고 몇 번이나 말했소!”
“안 해, 안 한다고! 이건 미친 짓이야!”
용병들이 저리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근처에 부상자밖에 안 보였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용병도 보였다.
블루로즈단 B팀처럼 죽은 용병들도 다수 있을 터.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하기야, 그 리오나가 의뢰를 포기하겠다고 말할 정도다.
어쩌면 아시브 방어전보다 이 의뢰가 더 힘겨울지도 모른다.
용병들은 씩씩거리면서 거칠게 여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느와르 남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우리 차례인가 보다.
“남작님.”
리오나가 먼저 느와르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들도 관둘 텐가?”
“아니요,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의뢰를 이 남자에게 인수인계하려고 합니다.”
“인수인계?”
“제가 더 이상 저희 팀의 지휘권을 잡을 수 없을 거 같아서 따로 저희 블루로즈단 팀원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 남자라면 저보다 더 큰 활약을 보여 줄 겁니다.”
리오나가 나를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해 주는 날이 다 있구나.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느와르 남작은 나를 별로 탐탁지 않게 보고 있었다.
“저 용병은 그린 고블린의 몽둥이질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것처럼 약하게 생겼는데, 정말 믿어도 되나?”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흐음……!”
느와르 남작은 나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리오나에게만 눈을 고정시켰다.
‘난 쩌리라는 뜻인가?’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느와르 남작은 리오나에게 다시 물었다.
“인수인계하고 나면, 자네는 여길 떠날 텐가?”
“아니요, 저는 이 남자와 같이 계속 의뢰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남아 주겠다 이거지?”
“예.”
“좋네. 그러면 인수인계를 허락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남작님.”
결국 느와르 남작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리오나였다.
뭐, 상관없다.
느와르 남작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어쩐다? 남작의 손에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들어가는 건 막아야 하는데.’
여기서 느와르 남작을 미리 없애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다.
그리고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내가 느와르 남작을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위에서 사건 조사를 위해 나를 소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행동에 제한이 너무 많이 걸린다.
일단 사태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뭐,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해결하면 되니까.
* * *
재정비를 마쳤다고 판단을 내린 느와르 남작은 용병들을 데리고 다시 던전으로 향했다.
레임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악마 같은 놈을 다시 만나야 하다니…… 돌아 버리겠네!”
“악마 같은 놈이 누구인데? 뭐 하는 몬스터야?”
드레인은 레임스가 이렇게까지 겁에 질린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다.
레임스만이 아니었다.
던전을 향하는 용병들 대부분이 레임스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죽으러 가는 길 같았다.
이들 중에서 생기가 넘치는 사람은 나, 그리고 드레인뿐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아직 던전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두 진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뿔 나팔을 불었다.
몬스터의 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젠장! 어제보다 빨리 튀어나오네!”
레임스는 너클을 착용하면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아직 던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몬스터와의 전투라니…….’
정신을 집중했다.
수풀 속에 다수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근처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고블린이다.
1미터 정도 되는 인간형 몬스터로, 한 마리씩 놓고 본다면 그렇게 강한 몬스터는 아니다.
고블린의 진가는 바로 무리 단위로 움직이려는 습성에서 발휘된다.
사냥감을 정하면, 혼자서 덤비지 않고 단체로 공격을 감행한다.
고블린은 본인들의 숫자가 다수가 되었을 때 공격한다.
수로 밀어붙이는 놈들이다.
얼핏 봐도 놈들의 숫자는 백 마리가 넘어갔다.
반면, 우리는 고작해야 마흔다섯 명뿐이었다.
2배에 달하는 숫자다.
게다가 용병들은 사기가 크게 꺾인 상태였다.
고블린 모습만 봐도 벌벌 떠는 용병도 보였다.
이럴 때에는 방법이 있다.
“선배, 제 말 좀 잘 부탁드릴게요.”
말 위에서 뛰어내린 나는 가장 앞에 있는 고블린 한 마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에 힘만 살짝 주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고블린의 머리는 마치 풍선처럼 퍼엉! 하고 터져 버렸다.
죽은 고블린이 쥐고 있던 나무 몽둥이를 뺏어 들고 뒤에 있는 놈들을 두드려 팼다.
10초도 안 돼서 나 혼자 세 마리나 쓰러뜨렸다.
호흡을 고른 후에 용병들에게 말했다.
“아직 던전에 도착하지도 않았잖아요. 이딴 녀석들 후딱 정리하고 빨리 갑시다, 시간 없으니까.”
먼저 고블린에게 ‘선빵’을 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내가 그 역할을 자처했다.
덕분에 용병들의 사기는 미약하게나마 점점 오르기 시작했다.
* * *
내가 화끈하게 스타트를 끊어 준 덕분에 용병들은 무난하게 고블린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부상자가 몇몇 있었지만,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던전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동굴같이 생긴 던전인데, 이름도 안 붙어 있는 초급 던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용병들이 이곳에 살고 있는 보스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했다.
리오나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일반 고블린보다 덩치만 좀 더 큰 변이 고블린인데, 도대체 뭐로 강해진 거지?”
아직 리오나는 이곳의 보스 몬스터, 변이 고블린이 어쩌다가 강해졌는지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모를 수밖에 없다.
5분 정도 걸었을까?
천장이 뚫려 있는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그곳에는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리오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조심해. 이제부터가 본게임이야.”
리오나의 경고가 끝나자마자 변이 고블린이 움직였다.
우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엄청난 점프력이다.
여태껏 상대해 온 고블린에 비해서 확실히 뭔가 달라 보였다.
쿠우우웅!
변이 고블린의 착지에 지면이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과반수의 용병들은 흔들림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레임스와 드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변이 고블린을 주시했다.
아니, 놈이 쓰고 있는 금색의 왕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로턴 크라운
-등급 : 레전드
-도약력, 이동속도, 공격 속도 3배 상승
-로턴이라는 국왕의 권위가 담겨 있는 투구 아이템. 일정 범위 이내의 중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드디어 찾았다.
‘틀림없어. 벨라시오닉이 삼켰던 보물 중 하나다!’
등급이 레전드인 아이템은 용신단 이후로 처음 접한다.
‘저걸 빼앗으면 된다 이거지!’
한편, 뒤에서 느와르 남작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저놈이 지닌 왕관을 빼앗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와야 한다! 네놈들을 괜히 고용한 게 아니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비싼 돈 주고 고용한 거니까 어서 찾아라! 후딱 움직이지 못할까!”
저 남작 아저씨, 정말 원래 인품이 훌륭했던 귀족 맞나 모르겠다.
용병도 사람인데 마치 소모품 취급을 하다니.
아무리 칠흑의 조각에 잠식당했다 해도 그렇지, 저건 너무한 거 아닌가?
하지만 남작보다 더 너무한 녀석이 있었다.
바로 변이 고블린 녀석이었다.
놈은 마치 우리를 농락하려는 듯이 바로 앞까지 왔다가 뒤로 쭉 뛰어올라 물러서는 행동을 반복했다.
‘잡아 볼 테면 잡아 보시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용병들은 화살을 꺼내 들었다.
다수의 화살들이 변이 고블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변이 고블린의 몸에 닿기도 전에 화살들은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처박혔다.
로턴 크라운의 능력, 중력 조절 때문이었다.
드레인은 혀를 찼다.
“뭐 저런 고블린이 다 있어? 그보다 도대체 저놈은 머리에 뭘 쓰고 다니는 거야?”
드레인이나 다른 등장인물은 나처럼 아이템 정보 창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저게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라는 걸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느와르 남작은 아이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멍청한 녀석들! 화살만 쏘지 말고 가서 달려들어! 어서!”
등살을 떠미는 느와르 남작의 재촉에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변이 고블린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이 행동은 헛된 노력으로 돌아가 버렸다.
빠각!
“끄아악!”
용병들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다리가 꺾여 버린 탓이었다.
변이 고블린은 키득키득 웃었다.
중력을 일시적으로 조절해 용병들의 다리를 전부 다 부러뜨려 버린 것이다.
‘잔인한 녀석 같으니라고.’
드레인은 레임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무서워하는 이유를 알 거 같다, 야.”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이 의뢰는 미쳤다고.”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드레인.
‘어이, 선배,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만담이나 늘어놓을 때야?’
아무튼 여기까지 온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었다.
우선 로턴 크라운의 중력 조절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먼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슬슬 가 볼까!’
용신단이 강할지, 아니면 로턴 크라운이 강할지.
어느 쪽 아이템이 더 강한지 겨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