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칠흑(漆黑)의 존재 (2)
리오나의 지원 요청을 받고 메를로 향하게 된 나와 드레인.
길을 가는 도중에 나는 내가 읽었던 소설 속 문구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카이딘은 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탐나는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메를이라는 도시 근처에 작은 던전이 있거든. 거기가 사이즈는 작은 던전이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갈래?”
“관심 없어. 그리고 우리는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찾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칠흑을 없애러 가는 거잖아. 아이템 욕심은 잠시 접어 둬.”
“쳇. 쩨쩨하긴. 여기서 말 타고 가면 왕복으로 하루밖에 안 걸리는데. 기왕이면 한번 들르지.”
섭섭함을 드러내는 카이딘이었지만, 라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카이딘과 라스의 대화 중에 메를이 언급되었다.
어떤 보물인지까진 서술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일단은 다른 이들이 보물을 차지하기 전에, 특히 칠흑의 조각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차지하기 전에 내가 먼저 가로채야 한다.
한편 드레인은 내가 왜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보수가 센 것도 아니고, 굳이 목숨을 걸어 가면서 메를에 갈 이유가 있어?”
블루로즈단 소속 용병이 자그마치 네 명이나 죽었다.
블루로즈단 용병은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다.
즉,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그런 자들이 넷이나 죽었으니, 우리가 향하는 곳이 보통 던전이 아님을 뜻했다.
그런 위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드레인이 불만을 늘어놓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방치했다가 칠흑이 차지하게 되면 그만큼 더 어려운 상대와 싸우게 될 것이다.
싹은 자를 수 있을 때 미리 잘라 두는 편이 좋다.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이봐, 후배님, 이유가 뭐야? 나한테는 말해 줄 수 있잖아?”
‘칠흑 때문이라니까요…….’라는 말이 목구멍 언저리까지 튀어나오려는 걸 도중에 겨우 꿀꺽 삼켰다.
칠흑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부정한 기운을 먹고사는 어둠 그 자체의 존재.
얌전했던 벨라시오닉이 갑자기 폭주한 이유 또한 칠흑 탓이었다.
그러나 칠흑이 벨라시오닉을 미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드레인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서 그냥 다른 핑계를 둘러대기로 했다.
“대장이 걱정되어서요.”
“대장? 리오나 대장 말하는 거지?”
“네.”
“뭐냐? 너, 리오나 대장한테 반했냐?”
이 말 저번에 누구한테 들었던 거 같은데…….
게럴이었나?
발상이 어쩜 이리도 똑같은지 모르겠다.
뭐만 했다 하면 다 남녀관계로 연결 지으니…….
뭐, 남자니까 이해한다.
만약 나도 게럴이나 드레인 같은 위치였다면 분명 같은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기로 했다.
“반한 거 아니고요, 그냥 신경 쓰여서 그래요. 얼마 전에 R팀 대장인가, 부대장인가? 그쪽 팀도 간부가 크게 다쳤다면서요?”
“대장, 부대장 둘 다. 지금은 잠정 휴식 중이지.”
“이런 와중에 리오나 대장까지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근데 너, 원래 네 생각만 하던 녀석이었잖아? 블루로즈단을 걱정한 적은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끔 해요.”
“그 가끔이 하필 이런 때에 발동되다니, 타이밍 참…….”
드레인과 의미 없는 수다를 떨면서 메를을 향해 나아갔다.
* * *
파랑새의 말대로 편도로 꼬박 3일이 걸렸다.
메를은 그래도 아시브에 비해 활기가 넘쳤다.
아스웰 같은 미친 마법사가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습격해 올 일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니까 훨씬 나아 보이긴 했다.
‘자, 어디 보자……. 리오나 일행이 머물고 있는 숙소가 요 근처일 텐데?’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면서 그들이 머무르고 있을 숙소를 찾아 헤맸다.
그런데 드레인이 나보다 먼저 숙소를 발견했다.
“저기 있네.”
찾았다.
그곳은 ‘베리베리’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숙소였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피곤함에 찌든 레임스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어이, 레임스!”
드레인이 레임스에게 말을 걸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드레인을 올려다보는 레임스.
잠을 못 자서 눈이 부었다고 보기에는 뭔가 달랐다.
‘이건 펑펑 운 흔적인데.’
레임스는 우리를 아니꼽게 바라봤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드레인이 나를 대신해 대표로 답했다.
“너희가 지원 요청했잖아. 그래서 오게 되었지. 그보다 대체 얼마나 울었기에 눈이 퉁퉁 부었냐?”
“누, 누가 울었다고 그래?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확 패 버릴라!”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진정해.”
드레인은 레임스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소중한 동료들을 잃어서 눈물로 밤을 지새웠나 보다.
블루로즈단에 들어오면서 알게 되었지만,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레임스는 굉장히 여리고 섬세한 마음씨를 지닌 남자다.
인물 정보를 통해 겉과 속이 많이 다른 남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뭐, 그래도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어 주는 남자는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레임스를 미워할 수 없나 보다.
레임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리오나는?”
“……너는 또 왜 왔냐?”
“드레인 선배가 말해 줬잖아, 지원 요청받고 왔다고. 그리고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먼저 결정한 건 나야.”
“…….”
“리오나는 어디 있어?”
두 번을 묻고 나서야 그제야 리오나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레임스였다.
“위층. 대장 방에 들어가 있어. 자고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오케이, 알았어.”
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임스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 외쳤다.
“설마 방으로 가려는 거냐?”
“걱정 마. 제대로 노크하고 허락을 구한 다음에 들어갈 거니까.”
난 그 정도 매너는 갖춘 남자다.
리오나가 있는 201호실로 향했다.
똑똑.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자,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어서 와. 네가 올 줄 알았어.”
리오나가 나를 맞이했다.
레임스에 비해 리오나의 얼굴은 멀쩡했다.
“올 줄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파랑새가 와서 직업 이야기해 줬거든.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한 바보 두 명이 여기에 오기로 했다고.”
“바보라니. 기껏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헛걸음했으니까 바보라고 하는 거지. 드레인도 같이 왔지?”
“어.”
“내려가자. 가서 이야기해 줄게.”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리오나는 나와 드레인 그리고 레임스를 불렀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의뢰는 포기할 거야.”
리오나가 왜 나에게 헛걸음했다고 말한 건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 *
받은 의뢰는 언제든 포기할 수 있다.
대신 포기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한다.
위약금 지불뿐만 아니라 의뢰인과의 신뢰도 저버리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블루로즈단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
대장 자리가 위태해질 우려도 존재한다.
리오나는 이것들을 전부 다 짊어지기로 했다.
의뢰를 포기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레임스는 리오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레임스는 그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다.
리오나가 결정한 사항이라면 레임스는 군말하지 않고 따른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포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의뢰니까.”
“그것뿐이야?”
“이미 우리는 많은 손해를 봤어. 용병 네 명을 잃었지. 이것만 봐도 알잖아?”
역시 벨라시오닉의 보물 때문인가? 흠, 이건 곤란한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반면, 드레인은 리오나의 의뢰 포기를 오히려 반기는 듯했다.
“느와르 남작한테 이번 의뢰는 포기하겠다고 말 전해 두면 되는 거야?”
……잠깐,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선배, 다시 말해 봐요.”
“다시? ……이번 의뢰는 포기하겠다고…….”
“아니요, 앞에 주어부터요.”
“느와르 남작한테 이번 의뢰는…….”
이런 망할! 하필이면 느와르, 그자가 의뢰주였나.
느와르 남작은 칠흑의 조각에 침식당한 존재다.
겉으로 봤을 때에는 별문제 없어 보일 테지만, 이미 칠흑의 조각에게 지배당한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벨라시오닉이 남긴 보물을 되찾고 싶어 할 것이고.
다른 아이템에 비해 유독 벨라시오닉이 삼켰던 아이템에 탐을 내는 이유는 바로 칠흑의 이러한 본능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절대로 녀석에게 아이템을 넘겨선 안 된다.
칠흑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다시 모으는 걸 방치하면, 놈은 본래의 힘을 되찾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비장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리오나, 의뢰는 포기할 거지?”
“어.”
“다시 한번 물을게. 두 번째 질문이니까 신중하게 대답해. 포기할 거지? 확실하지?”
“파랑새한테 이상한 거 배웠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포기할 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좋아, 그러면 그 의뢰, 내가 인수받을게.”
“뭐어?”
리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건 레임스와 드레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드레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아니, 대장이 의뢰 포기하겠다는데 그걸 네가 이어받겠다고?”
“네, 선배.”
“진짜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야, 인마, 대장이 못하는 걸 네가 어떻게 해 낸다고!”
“방법이 있어요. 위험할 거 같으면 선배는 안 해도 돼요.”
“…….”
설마 여기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그 생각을 했다.
그러나 드레인의 동료애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갈 데까지 가 보자! 나도 한다!”
어허, 이건 진짜 예상 못 한 건데.
드레인이라는 사람, 의외로 좋은 선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레인이 끼면 방해만 되는데…….’
이렇게 말을 해 주고 싶어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자.
한편 레임스는 우리 둘을 보면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였다.
“그럼 나도 갈게.”
두 번째 폭탄선언은 리오나의 입에서 나왔다.
레임스는 입을 쩍 벌렸다.
“대, 대장? 방금 의뢰 포기한다고 했잖아요!”
“포기할 거야. 대신 내가 저 두 사람 서포터 역할로 들어갈게. 원래 내 의뢰였으니까. 인수인계 마치고 우리만 빠지긴 좀 그렇잖아. 이래 봬도 나 대장인데…….”
이런 우정 넘치는 상황, 너무 낯설다.
‘하아, 그냥 본인 살겠다고 이기심을 마구 발휘해 줬으면 참으로 좋겠는데 말이지.’
설마 레임스까지 들어오려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저도 대장을 따르겠습니다!”
이로써 의도치 않은 네 명의 파티가 결성되었다.
이 인간들, 용병 주제에 전우애가 너무 넘쳐서 탈이다.
‘내가 아는 용병 설정이 아닌데…….’
이 세계관 속 용병들은 뭐 이리도 우정이 돈독한지 모르겠다.
귀찮아 죽겠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