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칠흑(漆黑)의 존재 (1)
엘라시아가 기어이 나를 알아본 것 같다.
‘어쩌지?’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여태껏 잘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막판에 와서 들킬 줄이야…… 운도 지지리도 없지!’
물론 내가 엘라시아를 지금 만난다고 해 봤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한번 꼬이게 되면 굉장히 귀찮아진다.
그리고 엘라시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 봤자 나는 엘라시아에게 말도 못 붙인다.
왜냐하면 난 엑스트라니까.
아직 엘라시아와 친분이 깊지 않았다.
오히려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 때문에 친밀도가 마이너스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까?
바로 그때, 생각지도 못한 구세주가 등장했다!
“로인,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드레인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이 기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이제 빨리 이동하죠. 다음 의뢰가 있잖아요?”
“잉? 다음 의뢰? 그런 게 어디 있…….”
“하하, 선배! 벌써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누굽니까, 용병계에서 바쁘기로 소문난 블루로즈단이잖아요! 이미 다음 의뢰가 잡혀 있으니까 빨리 이동합시다. 자! 빨리!”
드레인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해명을 요구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말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시아는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잠깐만요!”
심지어 내가 있는 곳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이런 미친……. 하이 엘프는 다들 저렇게 호기심이 왕성한가?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면 안 되냐?’
어쩔 수 없다.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용신단의 능력을 사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육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면 제아무리 엘라시아라 하더라도 따라잡지 못할 테니까.
드레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 혼자 도망치면 안 된다.
동료인 드레인도 같이 데려가야 한다.
순간 드레인은 기겁을 했다.
“으헉? 너, 갑자기 왜 그래?”
바로 그때였다.
“엘라시아, 라스가 다른 도시로 이동하자고 하니까 빨리 와. 여기에 더 이상 볼일은 없잖아.”
주인공 동료인 카이딘이 엘라시아에게 합류를 재촉했다.
엘라시아는 마지못해 카이딘 쪽으로 향했다.
‘휴, 살았다.’
한숨을 쉬는 나.
그러나 엘라시아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내 팔에서 벗어난 드레인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듯 내게서 멀리 떨어졌다.
“너, 설마…… 그런 취향이었냐?”
“……!”
인성 쓰레기에 동성 취향까지!
날이 갈수록 내 이미지는 점점 하락하고 있었다.
* * *
아시브 방어전이 끝난 후에 나와 드레인은 아시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시로 향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시브 방어전 의뢰를 훌륭하게 소화한 덕분에 우리 앞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보상 금액이 떨어졌다.
단, 의뢰금 전부가 내 것은 아니었다.
블루로즈단에서 일정 금액 수수료를 떼어 간다.
그러나 수수료는 많지 않았다.
보수 금액의 5퍼센트.
다른 용병 조직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많게는 30퍼센트까지 수수료를 떼어 간다는 곳도 존재했다.
그에 비해서 블루로즈단은 굉장히 양심적인 편이었다.
5퍼센트면 상당히 양호했다.
수수료를 적게 받자는 건 단장인 제나드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블루로즈단의 운영 방식은 제나드의 말이 곧 법이다.
제아무리 첸버가 운영 권한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제나드의 말은 거역할 수 없었다.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블루로즈단의 심부름꾼이라 불리는 남자가 찾아왔다.
본명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들 그를 ‘파랑새’라 부르고 있었다.
“여기들 있었군.”
파랑새는 우리들의 위치를 바로 확인했다.
손을 들어 파랑새에게 환영의 의사를 내비치는 드레인.
그는 파랑새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파랑새가 우리에게 수수료를 제외한 의뢰 보수 금액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고생했어. 사실 난 자네들이 이번 아시브 방어전 의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군.”
“그러게. 나도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해.”
드레인은 지난날의 참상이 아직도 떠오르는지 몸서리를 쳤다.
‘한 것도 없으면서 호들갑은…….’
사실 내가 다 막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첫 침공을 먼저 알아차린 것도 나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 뻔한 위기에서 구해 낸 것도 나고.
뭐, 아스웰을 처리한 건 결국 주인공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내 활약 또한 적지 않았다.
비록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나의 활약상을 자랑거리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믿어 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설령 믿어 준다 하더라도 돈이 더 많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파랑새는 우리 둘에게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자, 이건 자네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보수금.”
묵직했다.
천만 단위의 제피를 한꺼번에 받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번 의뢰가 굉장히 위험했던 것임을 나타내는 지표인 셈이었다.
드레인은 잔뜩 신이 났다.
“좋았어! 이걸로 한 3개월은 놀고먹어야지!”
“선배는 용병 활동 당분간 쉬게요?”
“응, 그동안 너무 고생한 거 같아서 슬슬 쉴까 생각했었는데, 좀처럼 타이밍이 안 나더라. 그리고 돈도 없었고. 근데 이번에 돈 많이 받았으니 푹 쉬었다가 활동 재개하려고. 후배, 너는?”
“전…….”
대답하기 전에 파랑새가 잠시 내 말을 끊었다.
“그보다 내 말을 듣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뭔데? 의뢰라면 안 받을 거야.”
먼저 선을 긋는 드레인이었다.
파랑새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우리에게 가져온 새로운 소식지를 전달했다.
“지원 요청이 있어.”
“의뢰가 아니라 지원 요청이라고?”
“꽤 급해 보이더라고.”
의뢰와 지원 요청은 다르다.
먼저 의뢰를 받은 용병 팀이, 이 의뢰는 우리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손이 남는 용병들에게 지원 요청이라는 것을 보낼 수 있다.
의뢰를 완수할 경우에는 보수 금액을 균등하게 분배받는다.
할지 말지는 오롯이 용병들의 선택이다.
드레인은 딱 잘라 말했다.
“난 안 해. 후배, 너도 거절해라. 우리, 막 아시브 방어전 의뢰 해결하고 돌아온 길이라고. 그런데 여기서 지원 요청까지 나가라고? 차라리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지! 나 때는 말이야, 어려운 의뢰 해결하고 온 용병은 그래도 터치 안 하고 푹 쉬라고 배려를 해 줬어! 그런데 요즘 용병 녀석들은 배려라는 걸 몰라! 옛날이 그립다, 그리워!”
또 시작된 옛날 타령.
파랑새는 드레인의 옛날 타령을 많이 들어 온 모양인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자네들이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거 같아서 말이나 한번 꺼내 본 거야.”
“위치가 어디인가요?”
사실 나도 드레인의 말마따나 거절할 생각이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말이지.’
그리고 이 일대에서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주인공 일행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냥 예의상 물어본 것뿐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메를. 여기서 육로로 3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도시인데.”
“‘메를’이라고요?”
“어. 아는 곳이야?”
불행하게도 내가 아는 장소다.
가 본 적은 없다.
그럼 어떻게 아느냐?
소설에서 봤기 때문이다.
“설마 지원 요청이라는 게, 던전을 클리어 못해서 그런 겁니까?”
“오, 잘 아네! 거기에 B팀 대장이 가 있는데……. 알지, 리오나 대장? 근데 솔직히 놀랐어. 리오나가 지원 요청이라니. 내가 블루로즈단에서 일하면서 처음 있는 일인 거 같은데.”
그럴 수밖에 없다.
메를에 위치한 던전.
그 던전은 주인공급이 아니면 클리어하기 힘든 곳이다.
왜냐?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아이템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아이템이 거기에 있다.
그것을 손에 얻어야 한다.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나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드레인은 불안감을 느낀 모양인지 말이 많아졌다.
“야야야, 후배!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이건 무조건 거절이야! 리오나 대장조차도 해결 못하고 쩔쩔매는 걸 우리가 간다고 해결할 수 있을 거 같냐? 안 돼! 절대로 안…….”
“그 지원 요청, 받아들이겠습니다.”
“야, 이 미친놈아!”
드레인의 의사를 존중한다.
하지만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은 델리피나 대륙 전체에 많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아이템이다.
아이템을 노리는 존재는 한둘이 아니다.
카이딘 같은 아이템 헌터도 있지만, 사리사욕을 위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찾아 헤매는 세력들도 있다.
그리고 가장 견제해야 할 상대가 있다.
벨라시오닉을 타락으로 이끈 존재.
칠흑(漆黑).
숙주로 삼았던 벨라시오닉이 죽고 난 뒤, 칠흑은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새로운 숙주를 통해 다시 한번 이 세계를 집어삼킬 계획을 꾸미고 있다.
라스가 상대하려는 주적이 바로 칠흑이라는 존재다.
벨라시오닉이 삼켰던 보물을 많이 되찾을수록 칠흑의 힘은 더 강해진다.
그 전에 나는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미리 찾아내고 싶었다.
칠흑의 힘을 약화시킬 겸, 그리고 내 능력을 강화시킬 겸.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놓치면 섭하지 않겠나.
파랑새는 내게 재차 물었다.
“정말로 갈 텐가?”
“네.”
“다시 한번 묻지. 이번이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의뢰를 받아들일 텐가?”
“예.”
“그럼 여기에 사인하게.”
의뢰서였다.
군말 없이 펜을 들고 서명란에 사인했다.
옆에서 드레인의 한숨이 계속 들려왔지만 전부 다 무시해 버렸다.
지원 요청은 조 단위로 움직일 필요가 없다.
드레인은 본인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당분간 쉬면 될 일이다.
나 혼자만 가면 그만이다.
하나 드레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동료애가 넘치는 용병이었다.
“아, 씨! 그래. 나도 간다, 가!”
“오, 정말로?”
파랑새는 먹잇감을 문 드레인을 바라보며 나에게 했던 것처럼 두 번째로 물었다.
“진짜 갈 텐가? 로인에게도 말했지만, 결정하면 더 이상 무를 수 없어.”
“펜이나 줘, 사인하게!”
“좋네, 역시 자네야. 동료애가 넘치는 모습, 보기 좋군.”
설마 드레인이 메를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옆에서 굳이 안 따라와도 된다고 말을 했지만, 드레인은 한사코 자기도 가겠다고 말을 늘어놓았다.
본인이 선택한 일이니까 더 이상 태클 걸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둘은 리오나의 지원 요청을 수락하기로 했다.
파랑새는 우리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리오나 대장의 지원 요청에 아무도 응하지 않았었는데.”
“응? 왜?”
드레인은 의외라는 듯이 반응했다.
다른 용병들이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파견 나간 용병 일곱 명 중 리오나 대장하고 레임스 부대장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사망했어. 과반수가 던전에서 목숨을 잃었지.”
순간 난 듣고 말았다, 드레인의 혼잣말을.
“아, 사인하지 말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