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영웅의 탄생 (2)
의뢰 지정이 끝난 후, 드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진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한숨을 쉬어야 할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드레인은 이런 한탄을 늘어놓을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왜냐하면…….
“선배까지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되는데.”
드레인도 나를 따라 같이 아시브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블루로즈단은 최소 2인이 1개 조로 행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다.
의뢰를 수행할 사람이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을 경우.
즉, 나 같은 케이스였다.
자의로 15번 의뢰를 맡겠다고 나선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이런 경우가 예외 항목에 속한다.
나는 혼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드레인이 번쩍 손을 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저도 갑니다!
거기서 뜨거운 우정이나 동료애를 느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보다 ‘선배는 대체 왜?’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단체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같이 가려고요? 죽으러 가는 것밖에 더 되냐고 엄청 구시렁거렸잖아요.”
“어떻게 널 혼자 보내냐? 그래도 내가 반년 동안 가르친 후배인데.”
당신한테 가르침받은 기억은 없는뎁쇼.
그래도 의리는 확실한 거 같다.
보통은 목숨이 아까워서 모른 척하기 마련인데.
드레인은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때아닌 전우애를 발휘한 드레인 덕분에 아시브로 향하는 길이 외롭진 않게 되었다.
오히려 시끄러워졌다고 할까?
어차피 드레인은 수다로 따지면 5인분 이상의 역할은 거뜬히 해낸다.
‘심심하진 않겠네.’
가게를 나온 나와 드레인은 바로 아시브를 향해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10일 뒤라고 했으니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쉼 없이 달려도 정해진 기한에 도착할지 말지 간당간당했기 때문이다.
이동 준비를 서두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로인.”
B팀의 대장, 리오나였다.
“오랜만에 보네.”
리오나에게 반가움을 드러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B팀의 대장이긴 하지만, 리오나와 이렇게 제대로 대면하는 건 정식 단원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게. 그동안 네 명성은 많이 들었어. 초보 용병치곤 어려운 의뢰들을 막힘없이 잘해 냈다는 거.”
“그래? 다행이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무리한 거 같은데.”
리오나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었다.
“아시브 방어전은 네가 감당하기 힘들 거야. 지금이라도 좋으니까 첸버 님한테 가서 못 하겠다고 말해. 하찮은 자존심보다 목숨의 무게에 더 비중을 둬. 그게 용병으로서 오래 살아남는 비결이니까.”
“아까 드레인 선배한테도 말한 건데,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구태여 그런 걱정 해 주지 않아도 돼. 5천만 제피 챙겨서 멀쩡히 살아 돌아올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
“할 말은 끝났지?”
리오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도 나를 말릴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끝났어. 가도 좋아.”
“오케이. 그러면 나중에 또 보자고.”
리오나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뒤에서 레임스가 ‘감히 대장한테 무례하게!’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레임스와 어울려 줄 시간이 없다.
《델리피나 전기》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전투가 아시브에서 펼쳐질 것이다.
주인공, 지금 만나러 갑니다!
* * *
아시브라는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소감은 대략 이러했다.
‘넓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도시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였다.
그러나 아시브는 지금, 도시 전체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미친 마법사 아스웰이 이끄는 언데드 군단이 이곳 아시브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가 접수되고 나서부터였다.
예상으로는 2일 뒤에 이곳에 아스웰의 언데드 군단이 도착하게 될 것이다.
아시브의 영주는 이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만으로 아스웰과 언데드 몬스터들을 막아 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용병들에게 대량으로 의뢰서를 보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각양각색의 용병 조직들이 이곳, 아시브에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꽤 유명 인사 취급을 받았다.
“저거 봐! 블루로즈단이야.”
“귀하신 몸들까지 납셨네.”
“예전에 내가 블루로즈단에 지원했다가 일곱 차례인가 떨어지고 포기했었는데.”
“저 사람들은 엘리트잖아.”
용병계의 엘리트.
이 말만큼 블루로즈단을 잘 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드레인은 용병들을 쭉 훑으면서 혀를 찼다.
“내가 모르는 용병 조직들까지 다 모여들었네.”
드레인이 모르는 용병 조직이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용병들이 워낙 많이 몰려든 탓에 아시브에서 방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딱 하나 있는 2인실 방을 겨우 구했다.
말을 맡겨 놓고 방으로 향한 우리.
짐을 푸는 사이에 드레인이 내게 물었다.
“샤워는 네가 먼저 할래?”
“아니요. 전 잠깐 바깥 구경 좀 하고 오려고요.”
“구경할 게 뭐 있어? 가게 문 다 닫았구먼.”
상인들은 몬스터들의 습격을 예고받자마자 바로 문을 닫고 안전지대로 피신했다.
현재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군인, 그리고 의뢰를 받은 용병들뿐이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무튼 선배 먼저 씻어요. 잠도 먼저 자도 돼요.”
“그래? 알았다.”
많이 피곤할 것이다.
이제 막 아시브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드레인을 놔두고 도시의 거리를 따라 쭉 걷기 시작했다.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문을 연 가게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민간인들이 여기 남아 있어 봤자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개죽음만 당할 뿐.
‘어디 보자.’
《델리피나 전기》 1권 1장.
영웅의 탄생 초반부 내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주인공 라스가 머물기로 한 여관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그린애플이었지.’
주인장이 그린 애플이라는, 이곳 아시브의 특산품을 좋아해서 지은 여관 명칭이었다.
그린애플이 어디 있는지. 찾기까지 많은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린애플은 아시브에서 가장 큰 여관이었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제일 큰 건물이 그린애플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용병들이 자리를 잡은 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이들, 밥을 먹는 이들, 수다를 떠는 이들, 그리고 무기를 정비하는 이들까지…….
그중에서 내가 관심을 보인 쪽은 단연 술자리였다.
조용히 구석 쪽 자리를 차지했다.
맥주 한 잔을 주문한 다음에 가장 넓은 쪽 테이블을 예의 주시했다.
자, 머지않은 시간 내에 소란이 벌어질 것이다.
일부러 구경하기 좋은 자리에 앉았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용병 중 한 명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가만, 어디서 많이 본 형씨 같은데…… 어라?”
남자는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었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 역시 남자와 같은 반응을 했다.
“너, 설마…… 게럴?”
“로인이잖아!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 아니었어?”
“죽긴 누가 죽어? 멀쩡히 살아 있구먼.”
이런 오해를 당해도 사실 할 말은 없었다.
갈로아 원정대 당시, 나는 홀로 디울프들을 상대하기 위해 뒤에 남았다.
설마 내가 살아서 돌아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리오나조차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럴은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바슬라! 일로 와 봐! 여기에 누가 있는지 보라고!”
익숙한 얼굴이 또 한 명 추가되었다.
“딸꾹질 마법사잖아?”
내 말에 바슬라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때만 딸꾹질했을 뿐이지, 지금은 안 그래.”
그러나 게럴은 바슬라의 뒤에서 격렬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보아하니 중요한 순간에 주문 영창하다가 딸꾹질하는 버릇은 여전한가 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같은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쌍검의 문양.
드레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트윈소드에 들어간 거야?”
바슬라가 대표로 내 질문에 답했다.
“응, 아무래도 용병 활동을 하려면 혼자서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보다 소속 팀이 있는 것이 편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트윈소드에 들어갔는데, 마침 바슬라가 있었지. 갈로아 때의 인연도 있고 해서 지금은 같이 돌아다니고 있어. 그나저나 네가 살아 있는 줄 알았더라면, 갈로아에서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떠날 걸 그랬네.”
아쉬움을 드러내는 게럴.
뭐, 인생이라는 게 늘 본인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니니까.
게럴과 바슬라는 자연스럽게 내가 있는 테이블에 합류했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바슬라와 다르게 게럴은 내게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멋있어졌네. 특히 그 블루로즈 문양. 눈부시다, 눈부셔! 어떻게 거길 들어간 거야?”
“입단 테스트 보고 들어갔지.”
“우와…… 대단한데? 블루로즈 입단 테스트는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그걸 뚫었다고?”
“별로 어렵지도 않던데?”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나 게럴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허세는 여전하네. 근데 왜 여기에 혼자 있는 거야? 블루로즈단은 개인행동은 금지 아니야? 설마 이번 의뢰, 너 혼자 받은 건 아니겠지?”
“일행이 있어. 숙소는 다른 곳이고. 여기는 구경거리가 생길 거 같아서 온 거야.”
“구경거리?”
“마침 시작했네. 저기.”
손으로 가운데 테이블을 가리켰다.
산만 한 덩치를 지닌 남자들이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다시 한번 말해 보시지!”
“다른 사람들 조용히 술 마시는 거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뭐 잘못됐나?”
“어쭈? 우리가 누군지는 아냐?”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남자는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가리켰다.
오각형의 방패 문양.
스톤실드라는 용병 조직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블루로즈만큼은 아니지만, 용병 조직 중에서 꽤 실력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이 답했다.
“몰라. 난 용병이 아니니까.”
“그래? 모른단 말이지…….”
스톤실드 용병들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용병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런 식의 충돌이 발생하곤 한다.
다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으니 말이다.
그런 자들이 남자의 도발에 곱게 물러설 리 없었다.
남자는 스톤실드 용병들의 이런 모습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경고했다.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다치기 싫다면.”
“제발 우리 좀 다치게 해 보시지!”
용병들은 남자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오른손을 내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뜨거운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 바슬라는 놀라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주문 영창도 없이 고클래스 공격 마법을 단번에 시전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는 특별하니까.
불길은 스톤실드 용병들을 위협했다.
만약 남자가 조금만 더 힘을 가했더라면, 용병들은 전신 화상을 넘어서 목숨까지 잃었을지도 몰랐다.
기겁하는 용병들을 향해 남자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물러서라. 다음에는 봐주는 거 없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스톤실드 용병들을 제압한 남자.
그가 바로 《델리피나 전기》의 주인공, 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