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3화 (23/240)

# 23

영웅의 탄생 (1)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무사히 견습이라는 딱지를 떼고, 정식으로 블루로즈단 용병으로 승격할 수 있게 되었다.

견습에서 정식 단원으로 승격되는 데에 특별히 복잡한 과정은 없었다.

아, 필기시험이 하나 있었다.

블루로즈단의 단원으로서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마음가짐을 테스트하는 필기시험이었다.

시험을 보러 가는 당일, 드레인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인성은 완전 별로인데 필기시험, 무사히 잘 합격할 수 있겠냐?

그놈의 인상 나쁘다는 딱지는 아직도 나를 따라다녔다.

이게 다 레임스, 그 자식 때문이다.

진짜로 한 대 줘 패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과거의 잘못을 소급 적용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싶진 않았기에 참기로 했다.

‘옛날 잘못을 들먹이면서 정말로 패 버리면, 그거야말로 인성 쓰레기가 되는 거 아니겠어?’

여하튼 모두의 우려(?)와 달리 나는 필기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했다.

동료 용병들은 네가 어떻게 시험에 통과했냐고 수십 번 넘게 물어 왔다.

인성도 별로인 녀석이 테스트를 통과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심지어 부정행위를 한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녀석들도 튀어나왔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여하튼 아무런 부정행위도 없다는 게 정상적으로 밝혀지며 난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리고 정식 단원이 되었다.

그것이 불과 반년 전의 일이다.

블루로즈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지난 반년 동안, 나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의뢰를 수행해 왔다.

덕분에 얻은 건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 반년간의 짧디짧은 용병 경험.

그리고 두 번째로 용신단의 레벨이 5가 되었다는 것.

그러나 레벨이 5가 되었어도 액티브 스킬은 아직까진 드래곤 피어 하나뿐이었다.

다음 능력을 개방시키려면 레벨을 어디까지 올려야 좋을지 모르겠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나와 드레인은 소집령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장소는 브루텐이라는 항구도시였다.

소집령이 떨어진 이유는 사실 별거 없었다.

의뢰를 많이 접수받은 경우에는 이렇게 용병들을 소집시켜 원하는 의뢰를 골라 수행할 수 있게끔 선택지를 준다.

즉, 영업력이 너무 좋아서 발생하게 된 소집령이라는 뜻이다.

블루로즈단 입장에선 호재인 셈이었다.

100만 용병 시대에 이렇게 일거리가 자주 들어오는 용병 조직은 상위 5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음, 내가 취직 하나는 잘했다니까?’

이런 뿌듯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편, 나와 함께 이동 중인 드레인은 벌써부터 어떤 의뢰를 선택해야 좋을지 고민이 많은가 보다.

“기왕이면 안전하고, 보수가 세고, 그리고 이동 거리가 멀지 않은 의뢰로 고르면 좋겠는데. 그치, 후배?”

“그런 의뢰가 어디 있습니까? 설령 있다 하더라도 경쟁률이 엄청 심할걸요. 그러니까 포기하세요.”

“도전 정신이 없는 후배구먼! 나 때는 말이야,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일단 도전해 보고 안되면 포기하는 그런 정신으로 이 고단한 용병 생활을 버텨 냈다고. 헝그리 정신이 없어, 헝그리 정신이…….”

여기서 왜 헝그리 정신이 나오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견습 딱지를 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왜 드레인이랑 같이 다니냐?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블루로즈단은 개별 활동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유일하게 개별 활동이 허가된 직위는 각 팀의 대장, 부대장뿐이다.

그 밑의 일반 단원들은 의뢰를 수행할 때, 최소 2인 이상 1개 조를 만들어 행동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공교롭게도 드레인과 조를 짜고 싶어 하는 단원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나 때는 말이야! 헝그리 정신이 얼마나 필요했냐면…….”

특유의 꼰대 정신. 심지어 여기에 투 머치 토커 기질까지.

누가 같이 다니고 싶어 하겠나?

용병으로서의 실력은 확실히 좋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몬스터와 싸울 때 말고 드레인과 같이 다니면서 얻는 이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저 수다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드레인과 한 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견습 딱지를 뗐음에도 불구하고 드레인과 같이 다니는 것이다.

드레인은 오랜만에 본인과 같이 움직이는 조원이 생겼다면서 기뻐했다.

그 기쁨을 수다로 풀어낸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듣다 보면 가끔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있긴 했다.

수다의 기본은 바로 머릿속에 든 게 많아야 한다는 점이다.

드레인은 의외로 박식했다.

그의 수다를 들을수록 델리피나 대륙에 관한 지식이 늘어났다.

그래서 라디오 하나 틀어 놓고 간다는 심정으로 드레인과 함께 반년 넘게 조를 꾸려 용병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예상외로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견습이 된 나에게 힘든 의뢰를 넘기지 않는 분위기여서 그랬던 걸까?

할 만하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조만간 크나큰 파도가 몰려올 것이다.

위기라는 이름의 파도가.

나는 그 파도 위에서 여유롭게 서핑 보드를 탈 생각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한마디로 축약하면 이거다.

버스 타겠다고.

이름하여 소설 속 주인공 버스.

* * *

브루텐에서 가장 큰 가게 중 하나로 손꼽히는 블루 센터.

이곳에 오늘, 블루로즈단이 모여들었다.

파랑이라는 콘셉트가 서로 잘 어울렸다.

가게 안은 용병들로 바글거렸다.

전부 다 파란 장미 문양을 새긴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다.

얼추 백여 명 정도 되는 듯했다.

소집령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오진 않았다.

현재진행형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용병들도 있고, 부상을 당해 참가하기 어려운 용병들도 있다.

“어흠!”

단상으로 올라온 첸버가 우리들을 향해 헛기침을 크게 냈다.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소집령에 응해 줘서 정말 고맙군. 자네들을 부른 건 뭐…… 다들 알고 있으리라 믿어도 되겠지?”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앞줄에는 각 팀의 대장, 부대장이 자리 잡았다.

드레인, 나 같은 말단은 맨 뒷줄에 앉았다.

단장인 제나드는…… 보이지 않았다.

소집령이 떨어졌는데 정작 단장의 모습이 안 보이다니.

그러나 다른 용병들은 단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뭐야, 원래 단장이 안 나오는 게 이곳 용병 조직의 전통인가?’

이럴 때 필요한 게 뭐다?

물어보는 거다.

모르면 물어봐야지, 암!

때마침 내 동료가 투 머치 토커다. 이럴 때 드레인 찬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선배, 왜 단장은 안 오나요?”

“원래 우리 단장은 낯가림이 심한 편이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곳은 잘 안 나와. 어차피 실질적인 용병 조직 운영은 첸버 씨가 다 하니까, 우리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

단장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다니.

알면 알수록 정말 특이한 용병 조직이다.

뭐, 아무렴 어떠랴.

중요한 건 단장의 존재가 아니다.

마침 첸버가 커다란 두루마리를 펼쳤다.

“이번에 의뢰를 꽤 많이 받아 와서 말이야. 장사가 너무 잘돼도 탈이더군. 그래서 자네들에게 선택권을 주도록 하지. 선택 가능한 의뢰는 총 15개. 무조건 하나를 고르라는 뜻은 아니고, 하고 싶은 의뢰가 있다면 먼저 고르면 되네.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 거기에 대해선 특별히 터치할 생각이 없으니까 자유자재로 하면 돼.”

꽤 많다.

굉장한 영업력이다.

첸버, 저 사람을 우리 출판사로 영입했었다면 작가들 꽤나 많이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용병들은 15개의 선택지를 두고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어떤 거 고르지?”

“난 이번엔 쉴래. 저번 달에 너무 많이 뛰었어.”

“5번이 좋은 거 같은데? 같이 할 사람!”

“7번은 내가 찜해 뒀으니까, 고르는 새끼들 있으면 다 뒈질 줄 알아!”

역시 용병은 용병이다.

본인이 먼저 찜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 용병들에게 협박을 날린다.

그중에서 아무도 택하지 않는 의뢰가 하나 있었다.

-15. 아시브 방어전

-보수 금액 : 5천만 제피

-내용 : 10일 뒤로 예고된, 미친 마법사 아스웰과 언데드 몬스터들의 공습을 막아 내시오.

-목표 : 아시브 도시를 무사히 방어해 내는 데 성공할 것.

모두의 기피 대상 1호.

그것이 바로 아시브 방어전 의뢰였다.

아시브 방어전은 15개의 의뢰 중 가장 보수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그 누구도 5천만 제피를 노리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미친 마법사 아스웰의 존재 때문이었다.

델리피나 대륙을 벌벌 떨게 만드는 마법사 아스웰.

그는 본인이 만든 언데드 몬스터들을 이끌고 도시를 하나하나 함락해 가고 있었다.

도시를 많이 차지할수록 그의 언데드 군단은 더욱 막강해져서 돌아온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자신의 군대로 부리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델리피나 전기》 초반에 나온다.

그리고, 《델리피나 전기》 프롤로그에서 영웅이 탄생한다.

바로, 주인공 라스다.

첸버는 용병들을 보면서 물었다.

“15번 의뢰에 도전할 용병은 없나? 만약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다면 이 의뢰는 없던 걸로 하…….”

“여기 있습니다.”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음, 이렇게까지 뜨겁게 바라봐 줄 필요는 없는데. 괜히 부담스럽네.’

그래도 할 말은 하기로 했다.

“15번,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주변이 크게 술렁였다.

“방금 저 녀석이 한 말, 들었어?”

“미친. 15번을 지원하겠다고?”

“아스웰과 싸운다는 발상을 하는 멍청한 녀석이 우리 용병단에 있을 줄이야…….”

다른 녀석들은 나를 미쳤다고 한다.

물론 드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너 미쳤어? 저걸 왜 한다는 거야!”

“선배는 하기 싫어요?”

“당연하지!”

“5천만 제피인데도요?”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싸잖아!”

“우리, 죽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돈 벌려고 가는 거예요.”

“저 정도면 ‘나 죽으러 가겠습니다.’라고 외치는 거랑 같은 거야, 짜식아!”

말이 안 통하는군.

그래도 상관없다.

드레인을 반드시 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내 목적은 아시브에 가서 주인공을 만나는 거다.

아니, 만나는 건 포기다.

가서 주인공에 어떻게 생겨 먹은 녀석인지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어차피 내가 저길 간다 해도 난 죽을 일이 절대로 없다.

왜냐고?

주인공이 알아서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나는 그냥 거기에 앉아서 몬스터 구경이나 하면서 주인공이 활약하는 장면을 구경만 하다가 오면 된다.

구경도 하고, 덩달아 5천만 제피도 얻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나?

주인공 버스 타러 가는 거다.

이걸 드레인에게 말해 줄 순 없었다.

안 믿어 줄 게 뻔하니까.

첸버는 내게 다시 물었다.

“정말로 15번에 지원할 텐가?”

“예.”

“한번 이름을 올리면 취소는 불가능해.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 봐.”

“심사숙고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제 이름을 등록시켜 주세요.”

“…….”

첸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붓을 들어 두루마리에 직접 적기 시작했다.

-15. 아시브 방어전 담당자 : 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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