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첫 의뢰 (7)
‘주인공 일행의 목숨을 위해.’
그러나 이렇게 말해 봤자 바우너가 이해해 줄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냥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네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씨에 감동을 받아서. 됐지?”
“아저씨, 의외로 착한 사람이었네요.”
의심 많은 꼬맹이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러자 이런 메시지가 떴다.
-바우너 그랑트와의 친밀도가 +20 상승합니다.
-‘좋은 아저씨…… 아니, 좋은 형!’ 칭호를 얻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엑스트라 등급을 지닌 아이들로부터 쉽게 호감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시스템조차도 나를 아저씨라고 놀리네? 그나저나 뭐냐, 이 칭호 효과는…….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이제 됐지? 빨리 들어가 있어라. 이 형은 바쁘니까.”
바우너 그랑트를 방으로 들여보낸 후에 나는 빠르게 다리 쪽으로 이동했다.
히즈 그랑트가 이끄는 용역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리에 도착했다.
수풀 안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선배, 준비 다 됐죠?”
“……어으, 죽겠다, 죽겠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지금 오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빨리 좀 오라고 해!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코가 마비될 거 같아!”
고충을 토로하는 드레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생이 참 많다.
미안하지만, 일이 마무리가 될 때까지 더 고생을 해 줘야 한다.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멀지 않았다.
“조만간 신호 보낼 테니까, 맞춰서 등장해 주시면 돼요. 반드시 기억하세요. 제가 신호를 줄 때 등장해야 합니다. 아니면 선배가 여태까지 감내한 그 고통,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거예요.”
“알았으니까 빨리 하기나 해!”
좋아, 준비는 다 완료되었고…… 슬슬 시작해 볼까?
다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히즈 그랑트와 우연히 마주친 척 연기를 했다.
“그랑트 자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자네는 누구지?”
히즈 그랑트는 나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누군지 모를 만도 했다.
그때, 히즈 그랑트와 함께 온 남자 한 명이 그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달했다.
이후, 내 정체를 언급했다.
“블루로즈단 용병인가?”
“예, 그렇습니다.”
“레플러를 퇴치하고 난 뒤에 떠난 줄 알았건만. 아직 남아 있었군.”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요.”
“문제?”
“앞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손을 뻗어 수풀 쪽을 가리켰다.
히즈 그랑트뿐만 아니라 그가 대동한 사람들도 수풀 너머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눈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기겁을 했다.
“서, 설마……?”
“그, 그랑트 님!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세요!”
“뭔데 그러나?”
히즈 그랑트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감이 나쁜 건지, 아니면 눈이 안 좋은 건지…….’
쿵! 소리를 내며 수풀 안쪽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거대 생명체.
레플러였다.
“……!”
그제야 히즈 그랑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병들은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사전에 난 그랑트 자작의 사병들이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정보를 이미 전해 들었다.
레플러 정도 되는 몬스터와 전투를 펼친 적은 당연히 없었다.
레플러의 등장에 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랑트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작전을 걸어 볼까?
“다리 너머로 물러서세요. 그러면 안전합니다.”
그들은 내 말대로 다리를 넘었다.
이들 중에서 몬스터와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은 일단 내가 하는 충고를 귀담아듣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 말 잘 들으니까 보기 좋네.’
한편, 레플러는 천천히 이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히즈 그랑트는 내게 외쳤다.
“거기 용병!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저 녀석 좀 어떻게 해 보게!”
“자작님,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다리 너머로 물러서면 안전하다고요.”
“고작 다리 하나 건넌 것으로 뭐가 안전하다는 겐가!”
“보시면 압니다.”
레플러는 쿵쿵 소리를 내면서 점점 다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이후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자작 일행을 노리던 레플러는 갑자기 다리에 접근하는 것을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뒤를 돌아 다시 수풀 안쪽으로 사라졌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 왜 다리를 못 건너지?”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이름 없는 작은 다리에 불과하다.
이 다리 하나를 두고 레플러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맛 좋은 먹잇감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사라졌다.
히즈 그랑트 자작조차 지금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여기서 내가 설명충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해야 한다.
“어흠! 자, 다들 주목!”
일단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지금부터 제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실은 이 다리를 만드신 분이 여기에 ‘장치’를 하나 해 뒀습니다. 이름하여 레플러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장치인 셈이죠.”
“그게 무슨 소리지?”
히즈 그랑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본인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니까 바로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불타는 효자, 줄여서 불효자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양반이었다.
“간단합니다. 여기 부분을 잘 보세요.”
다리에 칠해져 있는 초록 분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머시여?”
“기린초라는 풀을 갈아서 다리에 바른 흔적입니다. 기린초는 레플러가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 약초죠. 특유의 독한 냄새가 레플러의 후각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레플러들은 이 다리에 접근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에 거짓말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사실 다리에 기린초를 바른 건 나다.
이전에는 그런 게 없었다.
하나 나는 일부러 바우너의 할아버지가 기린초를 발랐다고 주장했다.
그때, 히즈 그랑트가 날카로운 질문을 꺼냈다.
“그럼 어째서 레플러들이 이 다리를 망가뜨렸던 거지? 접근조차 못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실 다리를 망가뜨린 주범은 따로 있습니다. 멧돼지들의 소행입니다.”
“레플러가 아니라 멧돼지가 다리를 망가뜨렸다?”
“예.”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다른데.”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계신 겁니다. 저, 블루로즈단 용병입니다. 엘리트 용병 조직이라 불리는 블루로즈단이 설마 어쭙잖은 거짓말로 자작님을 속이려 들겠습니까. 저는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거짓말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꽤 번듯한 거짓말이었기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내 말을 믿기 시작했다.
의심이 많은 히즈 그랑트조차도 내 말에 쉽게 반론을 가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에 관한 정보는 내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실전으로 다져진 경험인데, 몬스터와 싸워 본 적도 없는 이들이 감히 내 말에 반박을 가할 수 있을까.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만으로 쉽게 반론을 펼칠 순 없을 것이다.
내 예상은 정확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다리가 레플러들을 쫓는 데 효과가 있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웅성이기 시작했다.
히즈 그랑트의 원래 목적은 다리를 부수는 거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개인의 욕심을 앞세워 무리하게 다리를 부수려 해도, 이미 사람들의 여론은 내 쪽으로 많이 기울어 버렸다.
억지로 다리를 부순다면 사람들의 원성을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권력에 욕심이 많은 히즈 그랑트는 마을 주민들의 여론을 상당히 신경 쓰는 남자다.
만약 주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진작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작들을 전부 다 파괴했을 것이다.
‘자, 어쩔 텐가, 히즈 그랑트.’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리를 부수겠다고 난리 블루스를 춘다면, 그다음 대안을 펼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작전, 그냥 무력으로 제압해 버린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동반될 수 있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말이 안 통하는 상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주먹이다.
물론 두 번째 작전은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고 싶었다.
기왕이면 첫 번째 작전이 그대로 성공했으면 좋겠다.
“…….”
히즈 그랑트 자작은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는 마지못해 대답을 내놓았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군.”
그는 용역들에게 손짓했다.
“돌아가자. 더 이상 여기에 볼일은 없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히즈 그랑트가 무리를 해서라도 다리를 부수려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모양이다.
일은 쉽게 잘 풀렸다.
히즈 그랑트 일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바로 수풀 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레플러가 납작 엎드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생했습니다, 선배.”
“이제 끝났냐? 진짜지?”
“네, 나오셔도 돼요.”
“어휴, 냄새!”
레플러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 밑에서 드레인이 피 칠갑이 된 채 기어 나왔다.
아까 등장했던 레플러는 살아 있는 게 아닌 사체였다.
그 사체를 조종한 사람은 바로 내 눈앞에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드레인이었다.
레플러의 체액은 독성으로 가득했기에, 체액을 싹 다 제거하고 난 뒤에 드레인에게 조종을 맡겼다.
그럼에도 드레인의 불만은 한가득이었다.
“아니, 뭐 이딴 작전이 다 있어! 나는 무슨 죄가 있다고 몬스터 사체 안에서 고통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거냐! 그것도 장장 30분 동안!”
“30분밖에 안 있었잖아요?”
“뭐? 30밖에? 그러면 네가 하든가!”
“저는 설명하는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요. 아무튼 고생 많았어요. 약속대로 나중에 크게 한턱낼게요.”
“두고 봐라. 네 지갑 거덜 날 정도로 얻어먹을 테니까!”
드레인은 작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계속 씩씩거렸다.
그에게는 참으로 미안했다.
사실 쉬운 역할은 아니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도 히즈 그랑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싸구려 연극을 펼쳐서라도 히즈 그랑트에게 다리의 필요성을 어필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성과라 생각한다.
구시렁거리는 드레인이지만,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그가 주인공 일행의 목숨을, 아니 델리피나 대륙의 운명을 구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사실을.
* * *
이제 완벽하게 의뢰를 끝냈다.
슬슬 떠날 채비를 갖춰야 했다.
“선배, 다음은 어디로 가나요?”
드레인에게 우리가 향할 행선지를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지도를 보기 시작하는 드레인.
그사이에 나는 가져온 짐들을 말안장에 실었다.
정신없이 짐을 꾸리는 사이에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떠나나요?”
바우너 그랑트였다.
“어, 할 일 다 마쳤으니까 가려고. 그리고 어제 말했듯이 이제 네 아버지는 더 이상 저 다리를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들었어요. 저 다리에 기린초가 발려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다리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천만에, 네 부탁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 웃차!”
말에 올라탔다.
드레인도 마침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가자, 후배. 가야 할 길이 꽤 멀어.”
“예, 갑니다요.”
바우너 그랑트가 뒤에서 우리에게 외쳤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형들!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그래도 마지막엔 형이라고 제대로 불러 주네.’
뭐, 나쁘지 않은 첫 의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