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첫 의뢰 (6)
레플러 퀸이 죽은 시점에서 레플러들은 흔적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놈들을 쫓아가 일일이 제거할 필요까진 없었다.
주인공 일행이 위기에 몰렸던 이유는 그동안 레플러 퀸이 다수의 레플러들을 낳은 탓이었다.
숫자에서 밀렸기에 어쩔 수 없이 도주를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플러 퀸은 이제 더 이상 없고, 기존에 있던 레플러들의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주인공이 죽을 위기는 사라진 셈이었다.
“엘라시아 님, 슬슬 가셔야 합니다.”
베라의 말에 엘라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자취를 감추려고 할 때, 나는 오지랖을 한번 부리기로 했다.
“여기서 12시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작은 다리가 있어. 혹여나 레플러들에게 쫓기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 다리를 이용해. 그리고 내가 한 말, 반드시 잘 기억해 두고! 방금 내가 한 말, 엘라시아한테 전달해 줘! 반드시 전달해야 해! 알았지?”
“…….”
베라는 노골적으로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주인공 일행을 위해서라도 꼭 알려 줘야 할 정보였으니 말이다.
레플러들의 숫자가 많이 죽었다 하더라도 언제 또다시 제2의 레플러 퀸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주인공에게 새로운 위기가 발생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엘라시아에게 다리의 위치를 알려 줬다.
‘베라가 잘 전달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이 엘프들은 내 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설마 이곳에서 엘라시아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선 붙잡고 싶었지만, 개연성 부족으로 인해 말도 못 붙이는 내가 어떻게 엘라시아를 이곳에 붙잡아 둘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다.
라스의 등장.
그리고 《델리피나 전기》의 시작.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해야 7개월 남짓.
‘7개월 후에 보자고.’
지금은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 * *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를 흡수하는 일이다.
-아이템을 흡수하시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나?
“흡수할게.”
붉은 더듬이는 이내 가루가 되어 작은 환약으로 변했다.
이걸 삼키면, 레벨이 과연 얼마나 오를까?
꿀꺽.
맛은 별로 좋지 않았다.
저번에 삼켰던 블랙 다이아몬드에 비해서 신맛이 좀 더 강하다고 해야 할까?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를 삼켰습니다.
-용신단의 레벨이 오릅니다.
-3레벨을 달성했습니다. ‘드래곤 피어’ 스킬이 개방됩니다.
-이제부터 드래곤 피어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3레벨이 되니까 새로운 액티브 스킬이 생겼다.
드래곤 피어라…….
스킬 설명을 보아하니 드래곤의 살기를 터트려 일정 영역 이내에 있는 타깃들에게 공포라는 상태 이상 효과를 부여한다고 되어 있었다.
어떤 건지 실험해 볼까?
“아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윽고 입에서 어마무시한 괴성이 튀어나왔다.
“크르르르르릉!”
사자 울음소리? 아니지, 드래곤 피어라고 했으니까 드래곤의 울음소리라고 해야 하나?
하울링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근처에 몰래 숨어 있던 동식물들은 내 외침에 놀라 부리나케 도망쳤다.
범위가 꽤 넓다.
어느 때에 사용할지는 아직 감이 잘 안 잡혔지만, 일단 스킬을 하나 공짜로 얻었으니 나쁘진 않다.
붉은 더듬이 하나는 내가 삼켰다.
그러나 아직 붉은 더듬이는 하나 더 남았다.
‘어쩐다……. 이것도 삼킬까? 아니지. 일단은 챙겨 두도록 하자.’
보관하기 쉽게 아이템을 흡수할 때처럼 환약으로 만들어 주머니 속에 쏙 넣어 뒀다.
나중에 다시 원래 외형으로 복원이 가능하다고 한다.
‘편하네, 이 흡수 기능. 뭐, 이제 마지막 일을 하러 가자.’
“드레인이 어디 있으려나?”
살아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 * *
레플러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놈들이 내뱉은 녹색의 체액은 나무고 바위고 가릴 것 없이 전부 녹여 버렸다.
‘드레인이 과연 무사히 살아 있을까? 아니면 혹시 죽었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근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나 동식물은 아니었다.
내가 찾던 타깃, 드레인이었다.
“후, 후배잖아?”
“왜 그래요, 선배.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제가 살아 있는 모습이 그토록 놀랍나요?”
“방금 너, 그 소리 못 들었냐?”
“무슨 소리요?”
“드래곤이 울부짖는 소리! 이 근처에 드래곤이 있나 봐!”
드레인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몸을 파르르 떨 정도였다.
아무래도 드래곤 피어 효과 때문인 듯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용 범위가 훨씬 넓었다.
“드래곤 없어요. 그냥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였겠죠.”
“아니, 무슨 짐승이 드래곤처럼 울어?”
“선배는 드래곤 본 적 있어요?”
“딱 한 번. 라바인 전투에 참가했을 때, 벨라시오닉이라는 드래곤을 봤었지. 너도 라바인 전투에 참가했었다며? 그러면 알 거 아냐?”
드레인도 그 전투에 있었나?
‘운이 좋군, 이 사람. 화염 폭풍 때문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을 텐데.’
아니지, 후방에 위치한 병사들은 그래도 생존 확률이 높았으니까 아마 거기에 있었을지도.
“여하튼 드래곤은 없습니다. 제가 다 확인했어요. 그리고 레플러 퀸도 죽었습니다.”
“엉? 정말? 설마 네가 사냥한 거냐?”
“엄밀히 말하면 근처에 순찰 돌던 엘프들이 도와줬어요.”
“엘프라…… 그러고 보니 하이 엘프들이 근처에서 자주 목격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었나 보네. 하여튼 운 좋네, 우리 후배. 하이 엘프들에게 도움을 다 받고. 원래 그 종족은 인간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드레인의 말이 맞다.
《델리피나 전기》의 설정상 엘프들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이 엘프든, 보통 엘프든.
그러나 극소수의 엘프들은 인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엘라시아였다.
엘라시아가 없었더라면,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엘프들에게 공격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레플러 퀸도 죽었고, 남은 레플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것으로 임무 완료인가.”
한숨을 돌리는 드레인.
그러나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다리를 노리는 강력한 적이 남아 있잖아요.”
“누군데. 레플러들?”
“아니요.”
드레인은 이런 방면에선 눈치가 없었다.
뻔하지 않은가?
“의뢰인의 아버지요.”
히즈 그랑트.
아직 그가 남았다.
* * *
“…….”
히즈 그랑트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집사를 통해 그의 아들인 바우너 그랑트가 블루로즈단 용병들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용병을 고용한 이유가 다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레플러들을 퇴치하기 위함이라는 사실 또한 오늘 낮에 알아냈다.
똑똑.
히즈의 방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히즈는 누가 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들어와라.”
조금씩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그의 아들, 바우너 그랑트.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다리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
바우너 그랑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최대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로인과 드레인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부터 이미 바우너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바우너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다리가 무의미하게 박살 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리는 레플러에게 습격당하는 모험가들의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
“애초에 레플러들이 득실거리는 숲으로 알아서 들어가는 놈들이 잘못된 거다! 병사들을 통해 분명 경고했다, 그곳에 레플러들이 잔뜩 있으니 출입하지 말라고! 경고를 무시한 채 들어가는 놈들까지 우리가 보살펴 줘야 할 이유가 있더냐?”
“하지만 이 일대에 처음 오는 모험가들 대부분은 모르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닥쳐라!”
히즈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자신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작을 옹호하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우너는 충분히 능력이 있는 아들이었다.
후에 자신의 뒤를 이어 훌륭한 귀족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히즈 그랑트의 아버지이자 바우너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을 존경한다는 점이었다.
히즈는 이 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런 욕심 없이 베풀기만 할 줄 알던 바보 같은 남자.
히즈는 그런 아버지를 본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흔적을 전부 지워 버리려 했다.
“바우너, 당분간 너는 밖에 나갈 생각 하지 마라. 만약 내 명령을 어길 시, 아무리 너라 해도 참지 않겠다.”
히즈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불안감을 느끼는 바우너.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창밖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히즈 그랑트가 용역들을 대동해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어디로 갈지 빤히 예측된다.
이름 없는 작은 다리.
바우너 그랑트가 할아버지를 생각해 어떻게든 지켜 내려 한 그 다리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대론 안 돼!”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바우너는 히즈의 명령을 무시한 채 집 바깥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어디 가려고?”
문을 열고 복도를 나서는 순간, 의외의 인물이 바우너를 막아섰다.
“아저씨?”
“야, 몇 번을 말하냐?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형!”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남자.
로인의 등장이었다.
* * *
혹시 몰라 야밤에 히즈 그랑트의 저택을 몰래 방문했다.
역시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히즈 그랑트는 다리를 없애 버리기 위해 용역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몰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던 도중에 때마침 바우너와 마주쳤다.
“아저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왜, 내가 오면 안 되냐?”
“보수 받고 떠난 줄 알았어요.”
나와 드레인이 바우너에게 의뢰받은 내용은 레플러의 퇴치였다. 퇴치는 끝났고, 오늘 낮에 우리는 바우너에게 상당한 금액을 보수로 받았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나와 드레인은 바우너에게 서비스를 해 주기로 했다.
“아까 여기서 네 아버지랑 하는 이야기, 뭔지 다 들었다. 제 아버지가 너에게 집 바깥으로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가만히 있으면 할아버지가 만든 다리가 없어질 거예요. 아저씨하고 말 많은 아저씨가 애써 지켜 낸 다리인데, 없어지면 헛수고한 셈이잖아요.”
참고로 말 많은 아저씨는 드레인을 가리킨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리는 못 부술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네 방으로 돌아가 있어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다. 히즈 그랑트는 허탕만 치고 돌아올 거야. 그리고 앞으로 다리에 손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니까 그렇게 믿고 있어.”
“저 안심시켜 주려고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죠?”
꼬맹이가 의심이 많네.
“나, 살아생전 거짓말 한번 해 본 적 없는 남자야.”
이것으로 189번째 거짓말이 추가되었군.
바우너도 내 말은 못 믿는 눈치였다.
안 통할 줄 알았다.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내 말대로 안 되면, 받은 보수는 다시 너한테 돌려주마. 그러면 됐지?”
“아저씨는 어째서 그 다리를 지켜 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왜긴? 주인공 일행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무조건 해야지.
주인공이 죽어 버리면 큰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