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첫 의뢰 (5)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은 내 쪽을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다.
푸른 눈동자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숫자는 정확히 다섯. 덩치는 제각각 달랐다.
그러나 공통적인 부분은 있었다.
다들 비율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모델인가 싶을 정도로 몸의 비율이 상당했다.
판타지 속 모델들은 활도 잘 쏘네.
그들 중 한 명이 나무 아래로 내려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인원들은 기겁하며 만류하려 했다.
“다가가면 위험합니다.”
“…….”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는 아니었다.
‘그녀’라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했다.
기다란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입은 옷들 위로 글래머러스한 몸매 라인이 펼쳐졌다.
이런 자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하면, 그건 문제 있는 거다.
여성은 내게 물었다.
“근처에 지진이 일어난 거 같아서 왔는데…… 보아하니 당신과 연관이 있는 거 같네요. 설마 땅을 들어 올리고 있기라도 한 건가요?”
정답이라고 말을 하려 했었다.
그러나 도중에 문제가 발생했다.
“……?”
말을 못 한다.
또다시 벙어리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여태까지 딱 한 번 겪었던 현상.
상대방의 인물 등급이 엑스트라인 나에 비해 지나치게 높을 때 발생했다.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친밀도를 올리거나,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서 개연성을 충족시키세요.
‘빌어먹을! 내 이럴 줄 알았다! 아니, 내가 말도 못 붙일 정도로 귀한 신분이라는 거야? 뭔데, 도대체 누구야!’
한편, 내가 입만 벙긋거리는 벙어리인 걸 확인한 여성은 눈살을 한번 찌푸리더니, 이내 이렇게 물었다.
“말을 못 하시나요?”
말 더럽게 잘하는데요.
하지만 이 여성 앞에서만 유독 말을 못 하고 있었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럴 때는 해결책이 있다.
“이봐!”
있는 힘껏 목소리를 냈다.
눈앞에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건 것이 아니라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네 명의 일행에게 소리친 것이었다.
음, 저 녀석들한테는 역시 말을 붙일 수 있군.
그 말은, 저놈들은 나와 같은 인물 등급 엑스트라라는 뜻이었다.
엑스트라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거기! 아무나 한 명 와 봐!”
“…….”
놈들은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상황에서 더 어이없는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금발 여성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
내 목소리는 여전히 금발 여성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답답해 죽겠네.’
결국 마지못해 저쪽에서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금발 여성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성별은 여성이었다.
“너, 내 통역사가 되어라.”
“뭐라고?”
소환당한 여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서로 언어 잘 통하는데 뜬금없이 통역사라니.
내가 여자 입장이었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금발 여성한테 말을 못 붙이는데. 제3자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해야지.
“내가 말이야, 금발 여자한테 말을 못 붙이는 저주에 걸려서 그러는데, 그쪽이 내 말을 듣고 이 여자한테 대신 전해 줬으면 좋겠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새로 추가된 여자는 복면을 벗었다.
“나도 금발인데.”
“…….”
뭐냐, 이 녀석들은.
금발이 트렌드라도 되나?
“아무튼 대신 말 좀 전해 줘.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거 같으니까. 아, 그쪽 이름은 뭐야? 참고로 내 이름은 로인. 용병이지.”
“……베라.”
“베라? 통역 잘할 거 같은 이름이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게 요즘 인간계에서 유행하는 칭찬인가?”
자세히 보니 베라라는 여자, 평범한 인간과 다르게 생김새가 특이했다.
예쁘다.
예쁜 건 아는데, 귀가 길고 뾰족했다.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엘프!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엘프라는 존재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여자도 엘프라는 뜻인가?
나도 모르게 처음 내게 다가온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잠시 후, 베라와 마찬가지로 복면을 벗었다.
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엘라시아
-인물 등급 : 조연
-종합 능력 : S
-주인공 라스의 든든한 조력자. 하이 엘프들을 이끌 차기 리더로, 엘프 종족으로서 드물게 인간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여성 하이 엘프다. 정령술과 민첩한 움직임, 뛰어난 활솜씨를 자랑한다.
보고 말았다.
인물 등급, 조연.
주인공 파티원 중 한 명인 엘프녀, 엘라시아다!
* * *
내가 엘라시아에게 말을 못 붙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엑스트라가 어찌 감히 조연님과 말을 섞으려고!
이번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라시아는 라스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조력자다.
그녀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마치 연예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을 붙여 보고 싶었지만, 그놈의 개연성 부족 때문에 여전히 난 벙어리 신세였다.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레플러 퇴치부터 하고 보자.’
베라는 마침 엘라시아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내게 이렇게 물었다.
“엘라시아 님이 당신에게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보라네요.”
“보다시피 땅을 들어 올리고 있었어.”
이런 말을 했다고 실제로 때리거나 하진 않았다.
음, 착한 엘프 아가씨들이야.
“왜요?”
“밑에 레플러의 둥지가 있으니까. 여왕이 둥지로 숨어 버렸거든. 찾으려고 땅굴 속으로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그냥 둥지를 통째로 들어 올리는 편이 더 찾기 쉬울 거 같아서. 그게 내가 땅을 들어 올리고 있는 이유야.”
“정말 무식한 방법이라고 전해 달라네요.”
이건 부정 못 하겠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정령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령술이 필요한가요?”
“어. 소설에서…… 아니, 내가 아는 사람한테 들은 건데, 땅의 정령을 이용하면 레플러의 여왕이 숨은 곳을 금방 알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알아내서 어쩔 건가요?”
“없애야지. 아, 우리가 나누는 대화, 엘라시아에게 계속 전달하고 있지?”
베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엘라시아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레플러 무리 속에서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웃기긴 했다.
그러나 엘라시아와 베라는 꽤나 담력이 좋은 편이었다.
내 뒤쪽에서 레플러들이 언제든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이런 딜을 해 왔다.
“엘라시아 님이 전해 달라고 하십니다. 엘라시아 님께서 여왕의 위치를 알려 줄 테니까 빠른 시간 내에 없애라고.”
“어떻게 찾게?”
“방법은 당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요? ……라고 하시네요.”
엘라시아는 손가락을 튀겼다.
딱!
소리가 나자 발밑에서 흙덩이가 솟아올랐다.
흙덩이는 작은 난쟁이의 형태를 취했다.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직감했다.
“노움……?”
“네, 맞아요.”
역시 엘라시아.
정령술의 달인이라고 묘사되었는데. 금방 이렇게 정령을 소환하니 ‘역시 조연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정령을 바라봤다.
그러자 베라가 또다시 엘라시아의 말을 대신 전달해 줬다.
“방해되니 잠시 비켜 달라고 하시네요.”
암, 비켜 드려야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장 자리에서 물러섰다.
그러자 내가 들고 있던 땅바닥이 다시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바닥이 크게 진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라시아는 무게중심을 잃지 않았다.
엄청난 균형 감각이다.
‘역시 엘프답군. 대단하네.’
한편, 소환되었던 땅의 정령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이후 30초가량 흘렀을까?
갑자기 레플러의 둥지 한가운데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균열은 점점 더 크기를 더해 갔다.
이윽고 거대한 생명체가 지면 위로 올라왔다.
고래가 수면 위로 점프하는 모습을 연상케 만들었다.
물론 고래보다 레플러가 더 징그럽게 생겼다는 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 만한 사실이리라 믿는다.
땅바닥에서 튀어 오른 녀석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붉은 더듬이.
여왕이다.
“자, 이제 됐죠? ……라고 전해 달라고 하시네요. 근데 이런 대화 방식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요? 당신, 도대체 뭐예요?”
“깊은 사정이 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 줘.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 이젠 내가 알아서 할게.”
이들에게 엄지를 추켜올려 준 뒤에 공중으로 크게 도약했다.
레플러 퀸은 약점이 일반 레플러와 다른 곳에 있었다.
머리에 올라탄 후에 한 쌍의 붉은 더듬이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자 레플러 퀸은 발악하기 시작했다.
여왕을 상징하는 붉은 더듬이가 녀석의 약점이다.
“날뛰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그런다고 살려 주진 않는다.
그저 고통 없이 빠르게 죽여 줄 뿐.
푸우욱!
힘을 주어 붉은 더듬이를 뽑아냈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나머지 더듬이 하나도 마저 뽑았다.
레플러 퀸은 미친 듯이 발악을 했지만, 이내 목숨을 다한 모양인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왕을 잡자 다른 레플러들은 겁에 질린 채 여기저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컨트롤 타워를 잃었으니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된다.
붉은 더듬이를 들어 올렸다.
말이 더듬이지, 곤봉같이 두껍고 컸다.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
-등급 : 유니크
-독 저항력 +130
-무기 합성 시 독 대미지 추가
-만지는 것조차 금기되어 있다고 알려질 정도로 강한 독성을 품고 있는 희귀 재료 아이템. 사용 방법에 따라 강력한 독성 대미지를 지닌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때로는 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약으로도 사용한다는 문구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하기야, 독을 더 강한 독으로 제압해 치료에 성공했다는 사례가 있으니까.’
예전에 모 기사에서 본, 독 내성을 기르기 위해 일부러 독사에게 주기적으로 물리는 원주민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도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싶었다.
붉은 더듬이는 2개다.
난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슬며시 엘라시아를 바라봤다.
개연성을 올리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친밀도를 올리면 된다.
나와 엘라시아의 친밀도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조연급과 말을 섞을 정도가 되려면 도대체 친밀도를 얼마나 높여야 할까?
감이 안 잡혔다.
왜냐하면 조연급은 처음 만나는 거니까.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는 매우 희귀한 재료다.
이걸 선물로 주면 엘라시아에게 호감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레플러 퀸의 사체에서 내려온 나는 이들에게 다가가 붉은 더듬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선물로 줄게.”
엘라시아는 내가 아닌 베라를 바라봤다.
통역해 달라는 뜻이었다.
“저 인간이 이걸 엘라시아 님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하네요.”
“어머, 그래?”
엘라시아는 붉은 더듬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혹시 몰라 사람 좋아 보이는 스마일까지 선보였다.
근데 뭐랄까?
레플러의 피를 뒤집어쓰고 이렇게 씨익 웃으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 같았다.
실제로 엘라시아의 대답은 내 의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기분 나쁘니까 안 받는다고 전해 줘.”
“네, 엘라시아 님.”
-엘라시아가 당신을 경멸합니다.
-친밀도가 급속도로 하락합니다.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