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첫 의뢰 (4)
원래 레플러를 상대할 때에는 두 명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 두 명으로 레플러들을 박멸시키려고 나선다는 말을 꺼낸다면, 분명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다.
하나 블루로즈단의 용병이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로인! 머리 위에 한 마리 있다!”
“선배님 뒤에도 한 마리 더 있어요.”
“알고 있어!”
드레인은 단검 하나를 거꾸로 들더니 그대로 레플러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푸욱!
정확히 레플러의 미간에 단검이 꽂혔다.
-끼에에에엑!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대는 레플러.
그사이에 드레인은 레플러와 거리를 좁히면서 롱 소드로 놈의 머리를 잘라 내 버렸다.
뎅겅.
그저 수다쟁이일 줄만 알았는데.
드레인은 나름 실력 있는 용병이었다.
하긴, 실력이 없으면 견습 용병 사수 역할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드레인이 한 마리를 처리할 때, 나 역시 내 머리 위에서 같잖게 내려다보고 있는 레플러에게 달려들었다.
공중으로 크게 점프한 나는 주먹을 휘둘러 그대로 녀석의 턱을 가격했다.
머리가 터지면서 레플러의 거대한 덩치가 아래로 추락했다.
“선배! 레플러 사체 떨어집니다. 알아서 잘 피하세요.”
“얀마! 너는 피아 식별도 안 하냐? 적어도 아군이 아래 있으니까 조심해야겠다는 마음가짐 정도는 가지고 있으라고!”
“지금 그럴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레플러들은 끝도 없이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 놈들의 둥지가 어디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냈다.
드래곤의 육신 능력을 지니게 되면 시력도 좋아지나 보다.
멀리 있는 레플러의 둥지도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 이제 여왕을 찾아볼까!’
여왕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레플러는 계속해서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올 것이다.
때마침 붉은 더듬이를 지닌 녀석이 보였다.
‘여왕이다!’
슬슬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선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엉? 뭔데!”
“여기에 혼자 남아 있어도 잘 살아남을 자신 있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여왕을 발견했습니다. 선배가 레플러들의 주의를 끌어 주세요. 제가 레플러들이 둥지를 떠났을 때를 노려서 여왕을 사냥하겠습니다.”
“얀마! 잠깐만!”
“그럼 부탁 좀 할게요!”
나무 위로 도약해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점프, 또 점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길을 죽어라 달리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이동하는 편이 훨씬 빨랐다.
그리고 레플러들의 탐지망에 잘 걸리지 않았다.
놈들은 머리 위가 사각지대다.
난 이걸 미리 알고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라스의 동료 중에 엘라시아라는 엘프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 중에서 레플러의 감시망을 피해 이동하는 묘사가 있었다.
그 부분에서 레플러는 자신의 머리 위를 잘 못 본다는 문구가 나왔다.
그것을 떠올린 것이다.
실제로 레플러들은 내가 지나가고 난 뒤에 소리를 듣고 나서야 머리 위에 뭔가가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꿀팁이네.’
설마 이 팁을 내가 실제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아직 만나 본 적도 없는 캐릭터, 엘라시아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
* * *
레플러의 둥지에 도착했다.
여왕을 쓰러뜨리면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
아티팩트는 아니고, 재료템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도 엘라시아가 레플러를 피해 이동하는 장면에서 나왔던 토막 정보 중 하나였다.
여왕 레플러를 쓰러뜨리면 놈이 지닌 붉은 더듬이를 재료템으로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레플러 퀸의 붉은 더듬이를 무기와 합성하면 독성 공격이 패시브로 붙는 옵션을 얻을 수 있다.
이름하여 속성 강화다.
재료템이라 할지라도 포이즌 대미지 옵션을 바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일 만큼 비쌌다.
이걸 얻어서 팔까 하고 생각해 봤다.
그러나 팔기 전에 우선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재료템도 용신단의 흡수 능력으로 삼킬 수 있을까?’
이게 가장 궁금했다.
아티팩트를 흡수할 수 있다는 건 디울프의 푸른 송곳니와 블랙 다이아몬드를 통해 이미 증명되었다.
하지만 재료템은 과연?
아직 실험을 해 보지 못했기에 이번 기회에 해 보고 싶었다.
보수도 완수할 겸, 내 개인 욕망도 채울 겸.
마지막으로 주인공 일행에게 도움을 줄 겸.
그야말로 일석삼조다.
주인공이 죽어 버리면 안 된다.
내가 소설 속에 강제로 들어오게 된 목적은 이야기의 올바른 정립이니까.
제대로 된 교정 교열을 해내지 못하면 난 이 세계에서 평생 썩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주인공은 일단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근데 그 전에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뒤늦게 내 기척을 알아차린 레플러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열 마리는 훌쩍 넘어갔다.
놈들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했다.
‘여왕은 안 보이네. 내가 올 줄 알고 도망친 건가?’
충분히 그럴 만하다.
레플러들에게 있어서 여왕은 체스 판에서 킹과 같은 존재다.
잡히면 게임 오버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여왕을 보호하려 들 것이다.
나는 굳이 비유하자면……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든 외로운 나이트라고 할까?
룩이나 비숍도 괜찮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상대 진영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나이트가 좋다.
레플러들은 갑자기 입을 쩍 벌렸다.
덩치에 비해 입은 굉장히 작다.
놈들은 나를 향해 침을 뱉었다.
독성 충만한 녹색 체액이 나에게 쏟아졌다.
저걸 맞으면 인간은 독성에 버티질 못하고 그대로 녹아 버린다.
하지만 용신단을 지닌 나는 달랐다.
독성 체액을 뒤집어써도 나는 멀쩡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저놈들의 침으로 샤워를 하고 싶진 않았다.
뒤로 몸을 물렸다.
내가 서 있던 자리가 녹아들었다.
지면이 녹을 정도였다.
얼마나 강력한 독성을 지녔는지 잘 보여 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잠깐만…….’
체액으로 녹아내린 아래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개미굴처럼 땅굴이 얽혀 있었다.
레플러의 둥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미친……. 저 미로 속에서 어떻게 여왕을 찾지?’
여왕이 마음먹고 도망치면 정말 못 찾을 것 같았다.
‘이럴 때 내가 마법이라도 사용할 줄 알면 참으로 좋을 텐데……. 아니면 용신단에 몬스터 탐지 기능이라도 붙어 있기라도 했으면…….’
땅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레플러 몇몇이 뚫린 땅굴 입구를 몸으로 막아 버렸다.
머리를 노려 놈들을 죽여도 사체는 여전히 입구를 덮고 있었다.
‘귀찮은 녀석들! 이걸 어쩐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 *
아무리 나라 해도 계속해서 몰려드는 레플러들을 일일이 다 상대할 수는 없었다.
사일런트 포레스트에서는 남는 게 시간이어서 상관없었지만, 여기선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가급적이면 빨리 끝내는 게 좋다.
게다가 드레인이 언제까지 둥지 근처에 머무르는 레플러들의 주의를 끌어 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수다쟁이에다가 꼰대 기질을 지닌 선배 용병이긴 하지만, 그래도 드레인이 죽는 건 원치 않았다.
소설 속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라스 일행이 레플러들의 추격을 피해 도망칠 때, 엘라시아는 레플러들이 땅속 어느 곳에 매복하고 있는지 길라잡이가 되어 다 알려 줬다.
그녀의 활약 덕분에 일행은 무사히 레플러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엘라시아는 정령술을 다룰 줄 알았다.
땅의 정령, 노움을 통해서 레플러들의 매복 위치를 확인하고, 그곳만 피해 도주 루트를 짠 것이다.
땅의 정령이라…….
‘용신단에는 땅의 정령 소환 스킬 같은 거 안 붙었나…….’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는 사이에 지면이 가볍게 진동했다.
갑자기 땅속에서 세 마리의 레플러들이 튀어나왔다.
쿠웅!
앞서 상대했던 일반 레플러에 비해 놈들은 뭔가 달라 보였다.
딱 봐도 체급 차이가 난다.
일반 레플러에 비해 지금 등장한 레플러는 2배 정도 큰 덩치를 지녔다.
게다가 움직임도 날렵했다.
앞발을 휘두르는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놈들은 정예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나 하나 잡아 보겠다고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발악을 해!”
정예 레플러 세 마리는 동시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걸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맨 처음에 떨어지는 녀석의 몸통에 주먹을 날렸다.
놈의 배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몸이 터져 버렸다.
레플러의 피가 사방이 튀었다.
이제는 피를 봐도 그냥 무덤덤하다.
하도 몬스터들을 많이 죽이고 다니다 보니 그런가 보다.
방금 죽인 레플러의 날카로운 발톱을 뽑아 좌측에 있는 녀석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푸우욱!
기분 나쁜 감촉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남은 한 녀석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들어 돌팔매질로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정예 레플러라 해도 별거 아니네.’
그나저나 다시 머리를 굴려 보자.
여왕을 어떻게 바닥에서 끄집어낼지에 대해서 말이다.
난 엘라시아처럼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생각해 볼까?
“어쩔 수 없지. 네가 이러고도 안 나오는지 한번 보자!”
양손을 지면에 푸욱 꽂아 넣었다.
방법이 떠올랐다.
엄청나게 무식한 방법이.
“으라차차차차차!”
대지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예 레플러 세 마리가 튀어나올 때보다도 훨씬 더 큰 진동이 펼쳐졌다.
거의 지진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 뭐냐고?
뻔하지 않은가.
“내가 땅속으로 못 들어간다면, 네놈들을 둥지째로 끌어 올려 주마!”
* * *
“후으읍!”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아직 용신단 레벨이 2밖에 안 된다.
추가로 붙는 스텟도 별로고.
이렇다 보니 땅을 들어 올리는 게 힘에 부쳤다.
아니지, 사실 ‘힘에 부친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웃기다.
원래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효과는 보였다.
우지끈!
지변에 큰 균열이 발생했다.
녀석들이 만든 땅속 둥지가 조금씩 위로 들려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레플러들은 당황했다.
놈들에게 표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거미 몬스터니까.
그러나 움직임만 봐도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위기를 직감한 레플러들은 나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피융!
뭔가가 날아들었다.
내 쪽이 아니었다.
나를 급습하려 드는 레플러들에게 날아들었다.
자세히 보니 뭔지 알 것 같았다.
화살이었다.
쏘아진 화살은 정확히 레플러들의 머리에 꽂혔다.
레플러들은 화살을 맞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화살 한 방으로 레플러를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존재가 있다니.
신기하다.
수십 발의 화살이 레플러들을 노렸다.
의문의 공격에, 레플러들은 내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뭐 하고 있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땅 들어 올리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말하면 농담하지 말라며 한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