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첫 의뢰 (3)
다음 날.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바우너 그랑트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약속대로 보수는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퇴치 작업은 언제쯤 시작하실 건가요?”
드레인이 대표로 말을 전했다.
“레플러는 대개 밤에 출몰하는 몬스터니까, 해가 떨어지고 난 뒤에 행동해야 해. 너는 우리한테 레플러가 자주 목격되는 장소가 어디인지만 알려 주면 되는 거고.”
“네, 알았어요. 어렵지 않은 일이네요.”
“그리고 또 하나 더.”
드레인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는 추가된 내 의견을 들려줄 차례였다.
“다리를 보고 싶은데. 혹시 지금 볼 수 있을까?”
“다리요?”
“레플러들이 노리고 있다는 그 작은 다리 말이야.”
“봐도 상관없긴 한데, 이미 손상이 많이 되어서 지금 봐도 별로 의미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보시겠어요?”
“상관없어.”
소설 속에서 주인공 일행을 위기에서 구출해 낸 중요한 다리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바우너를 따라 도시를 나와 강가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강가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던 남자 몇몇이 바우너를 알아보고 예를 표했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도련님? 뒤에 있는 남자들은…… 호위병인가요? 보아하니 그랑트가 사병들은 아닌 거 같은데.”
“제가 임시로 고용한 용병이에요. 레플러들을 퇴치해 주실 분들입니다.”
“설마 다리 때문입니까?”
“네, 아버지한테 도움을 요청해 봤자 들어주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몰래 용병단에 의뢰했어요.”
“허허, 도련님도 참.”
남자와 바우너는 꽤 친한 사이인 듯했다.
말 못 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걸 보면 대충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의 신상명세를 담은 정보 창이 떴다.
‘어디 보자…….’
네르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로, 인물 등급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엑스트라였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이런 작은 도시에서 단역급 이상을 만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네르오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도시 주민들마다 바우너에게 먼저 다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바우너는 주민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귀족 자제라. 싹수가 보이는군.
이 녀석,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겠어.
명의 사칭하는 버릇만 빼면.
* * *
바우너와 함께 도착한 곳에 작은 다리가 있었다.
바우너가 말했던 대로 파손된 곳이 꽤 많았다. 괜히 건넜다가 오히려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할 우려가 들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레플러의 짓이야?”
내 물음에 바우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도시 근처에 올 때마다 항상 다리를 건드리더라고요. 대충 조사해 보니, 숲속으로 들어온 사냥감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퇴로를 차단하려고 다리를 망가뜨리는 거라던데……. 몬스터의 지능이 원래 그렇게 높나요?”
“전부 다는 아니지만, 인간과 거의 비슷한 지능을 가진 몬스터는 생각보다 많지.”
“그렇군요. 흐음.”
나도 완벽하게 다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과 거의 비슷한 지능을 지닌 몬스터들이 가끔씩 출몰하곤 했다.
레플러는 지능 수준이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냥 ‘다리 때문에 사냥감을 자꾸 놓치니까 저걸 부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도?
딱 그 수준에 머물렀다.
그래도 몬스터들 중에선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본능에 몸을 맡긴 채 행동하는 몬스터들이 수두룩하니까.
그나저나 이 다리가 주인공 라스의 목숨을 구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단 말이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나였기에 더더욱 이 다리에 많은 의미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레인은 달랐다.
“왜 이 다리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
“저요?”
“아니, 바우너.”
난 또…… 나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우리의 말을 들은 모양인지, 바우너는 어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든요. 사실 이 다리는 대장장이셨던 제 할아버지가 만드신 거예요.”
“대장장이?”
“너, 귀족 아니야?”
“귀족 맞아요. 대신, 신분 상승은 제 아버지께서 이룩한 업적이죠.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그냥 평범한 대장장이셨어요. 반면에 제 아버지는 야망 있는 분이세요. 자작을 넘어서 백작, 공작, 그리고 나중에 그 이상 가는 직책을 얻고 권력을 거머쥐는 것이 목표예요.”
“아들 입장에서 피곤하겠네.”
나도 모르게 느낀 그대로의 감정을 말로 표현해 버렸다.
아버지가 욕심이 많으면 자식이 고생하는 법이다.
바우너는 구체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쓴웃음을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저는 제 할아버지를 존경해요. 비록 서민이었지만, 그리고 평생 망치를 손에서 떼지 않았던 분이지만, 할아버지 덕분에 이곳 나울 주민들의 불편함이 많이 해소되었거든요. 혹시 도시 입구 근처에 있던 거대한 물레방아, 기억하시나요?”
“물론. 보자마자 눈에 확 들어오더라. 워낙 커서 말이지.”
“그 물레방아, 제 할아버지가 만든 거예요. 뿐만 아니라 도시 내에 있는 시설물들은 거의 다 할아버지의 작품이죠.”
“존경받을 만한 분이네.”
“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람한테 존경받지 못한 불행한 분이시기도 해요.”
드레인은 그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알아맞혔다.
“히즈 그랑트 자작이군.”
“맞아요. 제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굉장히 싫어했어요. 뭐, 그럴 만도 하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성격이라든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상반되었으니까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했어요. 엄밀히 말하면 서민 출신이었던 당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 했죠. 흔적조차 남기기 싫어하세요. 그렇지만 도시 내에 있는 시설물들은 이미 주민들의 편의 제공에 큰 기여를 하고 있었기에 이제 와서 없애기도 뭣했죠. 하지만 이 다리는 아니에요.”
레플러에 의해 훼손된 다리.
이 다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애매한 존재였다.
그러나 주인공 라스 일행의 목숨을 구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바우너의 할아버지가 만든 그 어떠한 시설물보다 가치 있고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구하는 데에 일조한 셈이니까.
물론 이 사실을 아는 건 오로지 소설 내용을 알고 있는 나밖에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 다리를 지켜 내야 한다.
바우너의 작은 어깨를 토닥여 줬다.
“걱정하지 마라. 이 형이 지켜 줄게.”
“고마워요, 아저씨.”
“…….”
방금 한 말, 취소해 버릴까 보다.
* * *
레플러의 알을 까는 여왕은 딱 한 마리다.
다른 레플러들에 비해 덩치가 1.5배가량 크고 붉은 더듬이를 지닌 녀석이다.
그 여왕만 없애면 레플러들은 더 이상 숫자를 불리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성과라 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레플러들도 때려잡으면 되는 일이고.
해가 저물었을 때, 나와 드레인은 레플러의 둥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했다.
“우왓, 이게 뭐야?”
드레인은 앞서가다가 레플러의 거미줄에 닿은 모양인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칠칠치 못한 선배네.
“조용히 해요, 그러다가 레플러들한테 들키면 어쩌려고요.”
“미, 미안.”
사수가 부사수에게 사과하는 희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사실 드레인은 마을에 두고 나 혼자 와서 다 때려눕힐까 생각도 했다.
싸울 때 드레인이 근처에 있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짜잔, 레플러들이 알아서 박멸되었습니다!’라고 뻥을 칠 수 없었기에 본의 아니게 드레인을 데리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첸버에게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본 기억이 없다고 설명했다.
갈로아나 사일런트 포레스트에서처럼 계속 너무 나댔다가는 내가 용신단의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들통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일이 골치가 아파질 거 같아서 당분간은 힘을 숨기기로 했다.
왜 소설이나 만화 같은 곳에 보면 이런 패턴, 자주 나오지 않는가?
주인공이 힘을 숨기는 패턴 말이다.
물론 내 신분은 주인공이 아니라 일개 엑스트라지만 말이다.
엑스트라가 힘을 숨김.
……어감 참 마음에 안 드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군데군데 펼쳐진 거미줄의 양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불 없이 이동하는지라 온몸에 거미줄이 칭칭 감겼다.
거칠게 거미줄을 떼어 냈다.
뭐랄까……. 거미줄이 아니라 거의 접착제 수준이다.
드레인도 거미줄 때문에 이리저리 해매는 모습을 보였다.
단검을 꺼내 거미줄을 잘라 낸 드레인은 혀를 찼다.
“레플러들이 이렇게 자리 잡는 동안 도대체 왜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네.”
“어쩌면 그랑트 자작은 레플러들이 다리를 박살 내 주기를 기다렸다가 그 뒤에 군대를 동원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 정도로 자기 아버지를 싫어한다는 거야?”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데 혈연이나 지연을 따지진 않잖아요? 아무리 친한 관계였다 해도 언제든 틀어질 수 있는 게 인간관계란 건데.”
“오늘따라 너, 왜 이렇게 맞는 말만 하냐. 짜증 나게.”
“착실한 후배를 뒀는데 왜 짜증이 나요. 그보다 앞에 조심하세요.”
“앞? 거미줄이라도 있어?”
“아니요.”
거미줄보다 더 문제되는 녀석이 나타났다.
“레플러요.”
“히익?”
화들짝 놀라는 드레인.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
리액션이 커서 재미있다.
6개의 눈이 드레인에게 고정되었다.
거대한 거미 몬스터가 턱을 움직이며 드레인을 잡아먹기 위해 빠르게 다가왔다.
드레인은 바로 롱 소드를 꺼내 들었다.
“후, 후배! 내가 주의를 끌 테니까 너는…….”
“머리를 노리라는 뜻이죠? 알고 있습니다.”
레플러의 약점은 작은 머리다.
다른 곳은 껍질이 단단해서 쉽게 공략할 수 없다.
이건 소설 속에서 나오는 내용이었다.
라스 일행과 동행한 병사 몇몇이 레플러의 몸만 때리다가 잡아먹히는 장면이 있었다.
그 부분을 기억해 냈다.
놈들의 약점은 머리다.
드레인이 레플러의 관심을 독차지한 동안, 나는 뒤로 돌아가 레플러의 등에 올라탔다.
나울에서 구매한 단검을 꺼내 든 다음에 놈의 머리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끼에에에엑!
귀를 찢는 소음을 내면서 레플러의 거대한 덩치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런 식으로 한 마리 한 마리 처리해 가면 된다.
단, 주의할 게 있었다.
“선배,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놈의 입에서 나오는 녹색 체액 있잖아요. 그거 만지면 안 됩니다.”
“알고 있…… 가만. 이거, 저번에 네 어깨에 묻었던 그 액체랑 동일하게 생겼는데. 아니야?”
“아, 그거는 선배가 막 잠에서 깨서 잘못 본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흐음, 그런가. 이상하네. 맞는 거 같은데…….”
이럴 때는 참 감이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