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7화 (17/240)

# 17

첫 의뢰 (2)

소년은 우리를 예사롭지 않게 바라봤다.

이 눈빛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읽기 쉽지 않았다.

그때, 사병 한 명이 소년의 이름을 거론했다.

“바우너 도련님, 놈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상한 자들입니다.”

바우너?

우리에게 의외를 맡긴 히즈 그랑트의 아들 이름 아닌가?

물론 소설 속에선 거론되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드레인에게 미리 들었기 때문이다.

히즈 그랑트에겐 외동아들이 하나 있다.

바우너 그랑트.

외견상 15~16살 정도로 보였다.

바우너는 사병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쫓아내라.”

“예, 알겠습니다.”

바우너의 말에 드레인이 강한 반발을 보였다.

“자, 잠깐만요! 정식 의뢰를 받고 온 용병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식 의뢰는 개뿔! 썩 꺼지지 못할까!”

사병들은 우리에게 무기를 겨눴다.

날카로운 창끝을 바라보며, 순간 드레인은 허리춤에 꽂힌 롱 소드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나설 차례가 된 듯하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금방 물러나겠습니다. 가죠, 선배.”

“야, 로인! 우리가 뭘 잘못 알아? 너도 확실하게 들었잖아!”

“선배.”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드레인에게 말했다.

“여기서 소란 일으켜 봤자 문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평화적으로 해결해야죠. 무턱대고 문제를 일으키면 리오나 대장이 분명 뭐라고 할 겁니다.”

“…….”

드레인을 말리려면 리오나라는 이름 세 글자만 대면 금방 조용해진다.

비단 드레인뿐만이 아니었다.

레임스를 비롯해 B팀 멤버들에게 리오나란 존재는 특효약 그 자체였다.

이상하리만치 B팀은 리오나를 향한 충성심이 높았다.

이 충성심을 이용해 드레인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일단은 머리를 좀 식히고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든가 하죠.”

“오. 너, 방금 좋은 말했다.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 이 말이지? 나도 써먹어야겠네.”

드레인을 회유하는 건 참 간단한 일이었다.

여하튼 일단 한발 물러서기로 결정을 내렸다.

사실 내 힘을 사용하면 금방 사병들을 제압할 수 있다.

입구를 지키는 사병뿐만이 아니라 저택 안에 대기 중인 사병들 전부를 나 혼자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무력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우너 그랑트라고 했나? 저 꼬맹이가 수상해.’

내 머릿속엔 ‘설마’라는 생각이 감돌고 있었다.

사병들에게, 그리고 바우너에게 일부러 들리게끔 크게 말했다.

“근처에 있는 세이렌이라는 카페에 가서 회의 좀 하죠, 선배!”

“어, 그러자. 회의 좋지!”

누가 들으면 술 한잔하러 가자는 줄 알겠네.

* * *

세이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에서 차를 한 잔씩 주문한 나와 드레인.

왜 가게 이름이 세이렌인지 알 것 같았다.

노란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카페 한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부른다.

우리나라였더라면 음원 차트는 한동안 싹 쓸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음색을 지닌 음유시인이었다.

잠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내 사수는 태평하게 노래나 듣고 있을 순 없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확인해 봤는데, 역시 맞았어. 의뢰인 이름이 히즈 그랑트 자작으로 되어 있다니까!”

“그럴 줄 알았어요.”

“응? 알았다고?”

“네, 안 그래도 의뢰서를 다시 한번 확인해 봤거든요. 히즈 그랑트라고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더라고요.”

“아니, 그러면 왜 일단 물러서자고 한 거야?”

“아까도 말씀드렸죠?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고요. 돌아가다 보면 전혀 다른 루트가 발견되거든요.”

“……?”

드레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이 남자는 사람 심리 읽는 법을 전혀 모르나 보다.

어쩔 수 없지.

눈치 나쁜 선배를 위해서 직접 말해 주는 수밖에.

“우리에게 의뢰를 맡긴 진짜 의뢰인은 히즈 그랑트가 아니라 바우너 그랑트예요. 아까 만났죠, 그 꼬맹이?”

“엥? 그럴 리가! 분명히 히즈 그랑트라고 쓰여 있다며?”

“그 꼬맹이 도련님이 명의를 몰래 도용한 거겠죠.”

바우너 그랑트로 보낼 수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여기서 조금만 시간 때우다 보면 꼬맹이 도련님이 알아서 올 거예요.”

“그……래?”

“저를 믿으세요.”

올 확률은 100퍼센트라 자부한다.

머지않아 내 예상대로 바우너 그랑트는 우리가 있는 이곳을 찾아왔다.

손을 번쩍 들어 우리의 위치를 알렸다.

“여기.”

바우너 그랑트는 내 위치를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다가왔다.

자리에 앉은 바우너는 드레인이 아닌 나를 보며 물었다.

“제가 여기로 찾아올 거라는 사실, 미리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일부러 세이렌에서 기다리겠다는 식으로 말한 거고요.”

“응, 맞아.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그쵸, 선배?”

“어? 어…… 그, 그렇지.”

오히려 드레인이 당황하고 있었다.

반면 바우너 그랑트는 매우 침착했다.

꼬마치고는 제법이었다.

“의뢰인이 히즈 그랑트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견습 말로는, 히즈 그랑트가 아니라 도련님께서 보낸 의뢰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아저씨, 견습이었어요?”

대답 대신 바우너는 내 신분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보다 아저씨라니.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에게.

심지어 로인은 강시언일 때의 모습보다 훨씬 젊다고.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다, 형. 그보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맞아요. 제가 아버지 이름 사칭해서 보낸 거예요.”

드레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 꼬맹이가 귀족 자제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당장 참교육을 시켜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색이 실질적인 의뢰인이다.

일단은 말이나 들어 보도록 하자.

“사칭한 이유는?”

“어린애가 보낸 의뢰라고 무시할 거 같아서요.”

간단한 이유였다.

그리고 이해가 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의뢰 내용은? 보니까 간단하게 ‘몬스터 퇴치’라고만 적혀 있던데. 구체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굴릴지 말해 줘.”

“왜요?”

“상황에 따라서 거절할지 말지 결정하게.”

“용병은 돈만 주면 다 해 주는 그런 사람들 아니었나요?”

“돈이라는 건 신뢰를 내비치는 수단 중 하나야. 돈을 주는 대신 우리는 그에 합당한 일을 하지. 이런 걸 계약이라고 해. 그런데 넌 이미 네 아버지 이름을 사칭한 단계에서부터 신뢰를 잃어버렸어. 이런 사람과 계약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신뢰를 되찾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솔직함’이야. 뒤늦게라도 솔직해져. 네가 얼마나 성의를 보이느냐에 따라 결정할 테니까.”

드레인은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마치 ‘이 녀석이 이렇게 말발이 좋았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가들이랑 미팅을 자주 하다 보니 화술 능력이 올랐다.

말발에 엄청난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꼬맹이 정도는 쉽게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다.

바우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말이 맞네요.”

“형이라니까.”

“알았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 녀석이.

형이라고 정정해 줘도 무시해 버리네.

바우너 그랑트가 우리를 부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말 그대로 몬스터를 퇴치해 주셨으면 해서요.”

“좀 더 구체적으로.”

“레플러라는 몬스터가 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가끔 등장하는 거미 몬스터인데, 혹시 오다가 마주친 적 있나요?”

바우너의 물음에 드레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나는 마주친 적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녀석들이 자꾸 다리를 부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의뢰를 하게 되었어요.”

“잠깐만. 설마 다리라는 거, 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우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도시 밖에 있는 작은 다리. 하나밖에 없는 다리니까 아마 아저씨가 말한 그거 맞을 거예요.”

왜 안 좋은 예상은 매번 적중하는지 모르겠다.

* * *

바우너는 일단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우리끼리 따로 상의를 한 뒤에 오늘 안으로 결정해서 결과를 알려 주겠다는 말을 들려줬다.

드레인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레플러라…….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몬스터인데.”

블루로즈단은 나름 실력 있는 용병단으로 정평이 난 조직이다.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있는 용병인 드레인이 어렵다는 말을 꺼낼 정도면, 확실히 레플러가 까다로운 몬스터가 맞긴 한가 보다.

물론 난 레플러들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은 기억은 없었지만 말이다.

레플러는 둘째 치고, 사실 난 바우너가 다리에 신경을 쓰는 진의가 궁금했다.

“무엇 때문에 자기 아버지한테 비밀로 하면서까지 다리를 지키려고 하는 걸까요?”

“글쎄다, 나도 모르지. 대충 알아보긴 했는데, 그 다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지형물이더라.”

“그래요?”

“어, 여기 마을 상인들이 말하는데, 강 건너려고 구태여 그 다리가 있는 곳까지 갈 필요가 없대. 멀쩡하게 육로가 연결되어 있는데 뭐 하러 다리를 이용하느냐고 하던데?”

하지만 그 다리는 훗날, 라스 일행의 목숨을 구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한다.

드레인은 내게 물었다.

“의뢰, 거절할까?”

“아니요. 받아들이도록 하죠.”

“꼬맹이가 왜 다리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모르는데도?”

“네,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라스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다.

만약 다리가 없으면, 라스 일행은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죽어 버리면 큰일이다.

나는 《델리피나 전기》의 교정 교열, 이야기의 올바른 수정을 위해 이곳으로 보내졌다.

주인공이 죽어 버리면 수정이든 뭐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바우너가 다리에 집착하는 이유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건 나에겐 별로 의미 없었다.

바우너가 아버지에겐 비밀로 이번 일을 진행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갈로아 때처럼 따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우리끼리 레플러 무리를 퇴치해야 한다.

드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일이야. 레플러가 몇 마리나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얼마 없습니다. 가서 딱 한 마리만 확실하게 제거하면 돼요.”

“한 마리?”

“네, 여왕 레플러가 있을 겁니다. 마침 레플러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 있어요. 이 틈을 노려 여왕 레플러를 사냥하면, 놈들은 숫자를 불릴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얻은 거야?”

소설에서 나왔던 지문과 더불어 내가 레플러들과 싸우면서 얻은 것들을 취합해서 만든 고급 정보다.

“믿음직한 소식통이 있거든요. 그쪽을 통해서 들은 거니까 확실할 겁니다.”

“여왕 레플러 사냥이라……. 하긴, 딱 여왕만 죽이고 빠지면 되긴 하겠다. 좋아, 네 말대로 이번 일 받아들이자. 듣자 하니 그 도련님 돈 많다고 보수 빠방하게 준다며? 그렇다면 무조건 해야지!”

바우너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금액을 제시했다.

원래 명시되어 있던 금액에 2배를 더 얹어 준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드레인은 늘어난 보수로 인해서, 그리고 나는 라스 일행의 순탄한 앞길을 위해서 꼬마 도련님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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