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6화 (16/240)

# 16

첫 의뢰 (1)

발라라는 소국에 위치한 작은 도시, 나울.

드레인과 내가 갈 목적지가 이 나울이라는 도시였다.

내가 있던 곳에서 나울까지 이동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을 타고 이동해서 2일 남짓 걸린 것 같았다.

이동하는 동안, 드레인은 내게 야영에 대한 기본 스킬들을 알려 줬다.

“들짐승이 많은 곳은 가급적이면 불을 피워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녀석들은 불을 무서워하거든. 그리고 뱀이나 독을 가진 녀석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근처에 잿물을 뿌려 놓고. 많이 뿌릴 필요는 없어. 네가 자는 곳, 그리고 불 주변, 짐 놓아 놓은 근처. 이렇게만 동그랗게 원을 그리듯 뿌려 놓으면 돼.”

“그렇군요.”

“아, 참고로 이 풀은 먹으면 안 돼. 독초거든. 먹으면 마비와 구토 증세를 유발하지. 내가 견습생 때 뭣도 모르고 이거 먹었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사수가 이런 것도 알려 주고. 나 때는 말이야…….”

“…….”

또 시작이다.

드레인과 2일 동안 같이 행동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이 남자, 은근히 꼰대 기질이 있다.

아니,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있다. 뭐만 했다 하면 ‘나 때에는 말이야.’라는 말부터 꺼낸다.

“로인, 너는 운 좋은 줄 알아. 나 같은 천사를 만났으니 말이야. 나 때에는 말이야, 악마 같은 선임 만나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다 터득했다니까? 뭐, 용병 생활에 대한 재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된 인재이다 보니 금세 적응했지만. 하하핫!”

꼰대식 서두로 시작해서 자기 자랑으로 완벽한 마무리까지.

환상의 컬래버레이션이었다.

게다가 투 머치 토커다.

내가 한마디 하면 이 사람은 열 마디 한다.

이제는 대강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드레인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야영에 대한 노하우 같은 건 확실히 귀담아들을 만했다.

수프를 마시는 사이에 띠링! 하는 알람이 들렸다.

-드레인과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드레인의 열렬한 청자’ 칭호를 얻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드레인과의 친밀도가 +10 가산됩니다.

또 시작이다.

드레인과 친밀도를 올리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했다.

보다시피 녀석이 하는 말을 들어 주기만 해도 친밀도가 알아서 오른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드레인의 말을 얼마나 무시해 왔던 걸까?

오죽하면 듣는 것만으로도 친밀도가 무섭도록 상승하다니.

하긴, 이런 식의 말하기 방식이면, 적어도 후배들은 드레인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을 것이다.

‘3달 전에 퇴사한 김 실장님이 생각나는군. 그 사람도 한 꼰대 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딱히 그립진 않지만, 그냥 드레인을 보니 생각이 났다.

“혹시 혼자서 불 피울 줄 알아?”

드레인이 내게 물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드레인은 내게 붉은 돌 하나를 건넸다.

“파이어 스톤인데, 이것만 있으면 불 피우는 방법을 몰라도 화톳불을 만들 수 있어. 어떻게 사용하냐면…….”

“돌을 1분 동안 움켜쥐었다가 화톳불 만들 자리에 내려놓고, 그 위로 나뭇가지들을 올려놓으면 불이 붙는다는 논리잖아요.”

“오, 잘 아네. 어디서 배웠어?”

“사일런트 포레스트에서요. 누구한테 배운 건 아니고, 혼자 터득했습니다.”

“크! 장하네. 역시 이 드레인의 제자야!”

누가 누구 마음대로 제자라고.

사일런트 포레스트에 들어갔을 때, 리오나가 준 가방 안에 파이어 스톤이 몇 개 있었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소설 속에서 주인공 라스가 파이어 스톤으로 불을 피우는 장면이 묘사된 문구를 떠올리고 그대로 따라 했더니, 알아서 불이 피워졌다.

편집자로 일해 오다 보니 소설 속 문장 하나하나가 다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은 최대한 이용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취침 시간이 되기 전까지 드레인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정말 말이 많은 사람이야. 그래도 심심하진 않아서 좋네.

“슬슬 자야 하는데. 불침번은 누구부터 설까? 내가 먼저? 아니면 네가 먼저?”

드레인은 내게 선택권을 줬다.

두 명밖에 없지만, 그래도 불침번은 서야 했다.

갈로아 원정 때처럼 몬스터의 야습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목숨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잠이 부족하다 해도 불침번은 필히 세워 두는 게 좋다.

“제가 먼저 서겠습니다.”

“그래, 특이 사항 있으면 바로 나 깨우고.”

“예, 그러죠.”

여기서 드레인의 또 다른 일면을 보았다.

눕자마자 바로 코를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신기하다.

‘사람이 저렇게 빨리 잠이 들 수 있나?’

최면에 걸린 것도 아니고 말이다.

드레인이 잠들었을 때, 나는 수첩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소설 내용을 최대한 적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가 향할 나울이라는 작은 도시는 1권 후반부에 나온다.

-라스 일행은 위기에 몰렸다.

그들을 쫓는 몬스터 군단들.

강을 건널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그때, 세일리아가 외쳤다.

“나울이라는 도시 근처에 다리가 있어. 그 다리를 이용하면 강을 건널 수 있을 거야. 날 따라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작은 다리가 라스 일행의 목숨을 건졌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울에 있는 작은 다리는 한 민간인이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8개월 뒤, 라스 일행은 나와 드레인이 걷는 이 길을 똑같이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몬스터의 습격을 받는다.

인간의 냄새를 잘 맡는 몬스터, 레플러들이 성큼성큼 다가옴을 느꼈다.

6개의 다리.

거미를 닮은 곤충 몬스터였다.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갑다 싶더니, 너희들이었구나.”

이미 소설 속에서 한번 봤던 놈들이다.

대충 보이는 걸로만 따지면 세 마리 정도 된다.

숫자가 얼마 안 된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라스 일행을 궁지로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다.

튼튼한 거미줄로 모험가들을 묶어 놓고 입에서 나오는 독성 체액으로 먹이를 녹여 먹는다.

라스 일행이 레플러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그때는 수백 마리를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상황이 달랐다.

고작해야 세 마리.

“몸풀기로는 딱이겠어.”

일말의 고민 없이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혹시 또 모르지 않나? 삼킬 만한 보물이 있을지.

* * *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 드레인.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선배, 일어나 보세요.”

“……5분만 더…….”

“불침번 설 차례에요. 지금 새벽 2시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어휴…….”

무거운 한숨을 토하면서 상반신을 일으키는 드레인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자리 잡았다.

하품을 내쉬던 드레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응? 너, 어깨 위에 있는 그거, 뭐냐?”

“어깨요?”

“어. 초록색 액체 같은 게 묻어 있는데.”

드레인은 손을 뻗어 액체를 만지려 했다.

위험하다.

뒤로 빠르게 몸을 뺐다.

그러자 드레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이 선배께서 직접 닦아 주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닦을게요.”

“혹시 너, 남이 네 몸에 손대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타입이냐?”

“그런 건 딱히 아니지만요. 아무튼 전 잡니다. 고생하세요.”

더 깨어 있으면 수다쟁이 드레인의 집요한 질문을 받을 것 같았기에 그냥 침낭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깨에 묻어 있던 건 레플러의 체액이었다.

강력한 독성을 품고 있었기에 만지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을 입는다.

만약 드레인이 레플러의 체액을 만지게끔 방치해 뒀다면, 손가락 하나는 금세 녹아내렸을 것이다.

그나마 용신단을 흡수한 나이기에 신체에 레플러의 체액에 닿아도 무사한 거다.

그나저나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는데도 어떻게 드레인은 잠 한번 안 깰까?

다른 걸 다 떠나서 숙면 취하기 능력 하나만큼은 정말 존경스럽다.

그보다 삼킬 만한 아이템을 못 얻었다는 게 많이 아쉽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 * *

날이 밝자마자 행군을 재촉했다.

점심때쯤이 되었을 무렵, 우리는 나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의 풍경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비교적 단조로웠다.

아스툰, 갈로아 그리고 나울.

소설 속 세계로 들어온 이후 나는 대도시라 불릴 만한 장소에 단 한차례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슬슬 판타지 속 대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 궁금증은 이번 의뢰를 마치고 나서 해결해야 한다.

“이쪽이다. 바짝 붙어서 따라와. 그러다가 미아 될라.”

나름 나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미아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드레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도시 내에서 꽤 큰 저택이었다.

보자마자 부잣집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었다.

입구를 지키던 사병 둘이 우리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그랑트 자작님의 사유지입니다.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보고 존댓말을 사용한다.

좀 놀랐다.

물론 경비 매뉴얼에 그렇게 적혀 있어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블루로즈단에 의뢰를 해 온 인물은 히즈 그랑트 자작이었다.

드레인은 우리가 이곳까지 찾아온 자초지종을 사병들에게 들려줬다.

“그랑트 자작님의 의뢰를 받고 온 블루로즈단 B팀 소속 용병 드레인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제 조수고요.”

조수라는 말에 순간 나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도 여기서 부정하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거 같아 얌전히 고개만 까딱였다.

사병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랑트 자작님께서 용병단에 의뢰를?”

“들은 적 없는데.”

“나도.”

사병들은 생전 처음 들었다는 반응이다.

‘뭐지, 이건?’

사병 중 한 명이 사실 확인을 위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병은 잔뜩 얼굴을 굳힌 채 대뜸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작님께선 용병단을 찾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잘못 찾아온 거 같으니 썩 돌아가시길.”

“예? 그럴 리가요. 분명 그랑트 자작님께서…….”

“한 번 말하면 똑바로 알아들으시지.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그런 적 없다고 했잖아!”

“…….”

사병들의 태도가 격해졌다.

우리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해는 된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그것도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데 용병 나부랭이 둘이 찾아와서 거짓말을 치고 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혹시 몰라서 드레인에게 다시 확인을 해 봤다.

우리의 착오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정말 여기 맞아요?”

“맞다니까 그러네. 이상하다.”

드레인은 수다쟁이지만, 중요한 임무를 잊을 사람은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소설 속에는 이런 사소한 에피소드 같은 게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답답하다.

소설의 포커싱은 오로지 주인공에게만 맞춰지는 법이니까.

엑스트라의 삶 따위가 묘사될 리 없었다.

‘갑자기 서러워지네.’

소란이 벌어지자, 키 작은 소년 한 명이 다가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이지?”

동네 꼬마로 보이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꼬마를 보자마자 사병들이 갑자기 거수경례를 했으니 말이다.

“블루로즈단이라는 용병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잠시 정리 중이었습니다.”

“거짓말?”

“예, 그랑트 자작님이 의뢰를 했다고 하는데. 확인 결과 사실무근이었습니다.”

순간 꼬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내가 놓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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