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첫 원정대 (4)
저녁 9시.
야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10시가 되면 바로 취침에 돌입한다.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불침번을 정해서 로테이션을 돌리며 망을 보게 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계속 취침을 취한다.
이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불침번이라…….’
군대 전역 이후로 오랜만에 들어 본다. 그리고 오랜만에 서 보게 되었다.
내가 배치된 근무시간대는 새벽 1시부터 2시까지.
자다가 도중에 깨고, 다시 근무를 서고 자고.
중간에 깨는 불침번조가 개인적으로 가장 안 좋다고 생각했다.
‘초번 초나 말번 초가 좋은데…… 쩝.’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불침번 명단은 원정대장이 직접 짰으니 말이다.
블루로즈 단원들도 로테이션에 포함되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근무하는 시간대에 리오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거, 개연성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그때 게럴이 다가와 내 팔을 툭 쳤다.
“뭔데?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아까부터 블루로즈단 쪽을 보면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거 내가 다 봤는데. 너, 설마 B팀 대장한테 반했냐?”
“아니라니까.”
“아니긴 뭘 아니야. 짜식, 역시 너도 남자구나.”
리오나는 원정대에서 유일한 여성 참가자, 즉 홍일점이었다.
게다가 미모 수준 또한 뛰어났다.
만약 리오나가 우리나라 연예계에 진출했다면, 미모 하나만으로 꽤 많은 방송 분량을 확보했을지도 모른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예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난 리오나의 미모에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었다.
리오나에게 붙어 있는 인물 등급.
단역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리오나는 주인공 라스와 마주치기까지 한다.
물론 아주 잠깐 나오는 거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디인가?
드라마나 영화로 치자면 카메라 한번 집중 조명해서 받는 찬스를 거머쥐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 같은 엑스트라들은 카메라에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여기 있는 모두가 다 그렇다.
리오나만 빼고.
게럴이 다시 한번 나를 툭툭 하고 건드렸다.
“슬슬 자 둬. 괜히 불침번 근무 때 일어나서 졸지 말고.”
수다 시간은 끝.
이제는 꿈나라로 떠날 차례다.
* * *
소설 속으로 들어온 이후에 본격적인 야영은 처음 해 봤다.
벨라시오닉의 화염 폭풍에 휘말려 강제로 강물에 처박혀 1주일 동안 숲속에서 밤을 지새운 적은 있어도, 그걸 야영이라 부르고 싶진 않았다.
침낭 그리고 화톳불.
마지막으로 천장 대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잠에 빠진다.
이게 야영의 묘미다.
‘힐링’된다는 느낌이랄까?
다 좋다.
벌레들이 자꾸 달라붙어서 귀찮게 구는 것만 빼곤.
벌레들 때문에 잠을 설치다가 결국 새벽 1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이, 근무시간이다.”
“…….”
말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나와 같이 근무를 서게 된 게럴은 반쯤 감긴 눈으로 하품을 연달아 내뱉었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전번 근무자에게 특이 사항은 없는지 등에 관한 인수인계를 받았다.
블루로즈 단원 한 명, 그리고 새로 뽑힌 용병 둘.
이렇게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불침번을 선다.
게럴이 아직도 잠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동안, 나는 기회를 틈타 리오나에게 다가갔다.
말을 붙여 보기 위함이었다.
마침 나와 트러블이 있었던 거구는 세상모르게 잠들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내가 접근해 오는 걸 미리 눈치챈 모양인지 리오나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저번에 나에게 말 걸려고 했던 그 남자 맞지?”
기억하는구나.
나를 알고 있다는 건, 다시 말해서 개연성이 충족되었다는 뜻 아닐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째서?’
상대방은 나라는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이런 미친!
엑스트라 등급이었으면 금방 말을 붙였을 것이다.
상대가 단역이라서 그런 걸까?
말 한번 섞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망할 놈의 계급사회!
또다시 내가 입만 뻥긋거리자 리오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진짜로 벙어리야?”
아니라니까! 말 잘한다고! 내가 얼마나 말을 잘하냐면, 작가를 상대로 미팅을 진행할 때 5시간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던 사람이라고1
그렇다고 한들 무엇 하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데.
설마설마했더니 역시나 저번과 같은 경고 문구가 떴다.
-리오나(단역)와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대화를 나누려면 친밀도가 최소 10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친밀도를 올리세요.
친밀도를 올려야 한다.
그래야 말을 붙일 수 있다.
그게 아니면 계속해서 벙어리로 오해받을 것이다.
중요한 건 역시 친밀도다.
참고로 현재 나와 리오나의 친밀도는 제로다.
‘여기서 10을 올려라 이거지?’
어떻게 하면 친밀도를 올릴 수 있을까?
나는 그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방이 내게 관심을 보이면 된다.
이건 이미 아스툰 마을에서 확인했다.
마을 주민들은 내가 벤디를 구한 영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많은 관심을 보내왔다.
덕분에 나는 별도의 플래그 성립 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마을 사람들과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나 리오나는 좀 달랐다.
난이도가 높다.
단순히 관심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는 친밀도를 높이기 어려웠다.
일단 급한 대로 목소리 대신 내 생각을 전달시킬 만한 특별한 수단을 보여 주기로 했다.
바로 만국 공통어, 보디랭귀지였다.
손짓, 발짓을 동원해 가며 지금의 내 생각을 표현했다.
이번 원정이 끝나고 둘이서 대화 나눌 시간을 내 달라고.
하나 리오나는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
답답해 돌아가실 지경이다.
말을 못 하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이었다니.
차라리 글씨를 적어 보여 주는 게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레임스하고 싸웠던 적 있지?”
레임스? 그게 누구냐.
내 눈빛을 보고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리오나가 배를 드러낸 채 코를 골며 자는 남자를 가리켰다.
광장에서 나와 마찰을 일으켰던 바로 그 거구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리오나는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레임스에게 대충 사정은 들었어. 파란 장미를 사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사려고 한 것을 레임스가 가로채려고 했다는 것도 들었고. 미안해. 부하 관리를 못한 내 잘못이야.”
“…….”
사과를 들으려고 말을 건 게 아닌데.
블루로즈단이라는 명칭에 맞게 레임스는 파란 장미에 욕심을 냈다.
문제는 먼저 사려던 사람이 있었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리오나가 거구…… 아니, 레임스라는 녀석을 대신해 나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넨 순간.
-친밀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5초간 일시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친밀도를 올리세요. 친밀도가 오르지 않을 경우, 다시 벙어리 상태로 돌아갑니다.
‘오, 나이스 찬스!’
안 그래도 보디랭귀지로는 한계가 존재했다.
내 뜻을 온전히 다 전달할 수 없어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때마침 이런 기회가 찾아오니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보다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5, 4…….
기다려 줄 생각이 없나 보다.
‘자비가 없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나도 레임스하고 대화로 먼저 해결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는데, 나도 잘못한 게 있어. 그쪽만 잘못한 건 아니야.”
오오오! 목소리가 나온다!
정상적인 내 반응에 리오나는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할 줄 알아?”
-리오나와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친밀도가 +12 상승했습니다. 친밀도의 일정 기준치를 넘었습니다.
-부족한 개연성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리오나와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드디어!’
목을 가다듬어 보기로 했다.
“아, 아아. 마이크 테스트.”
“……?”
리오나는 내가 뭘 하는지 모를 것이다.
목소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확인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음, 이상 없군.’
졸지에 목소리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리오나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놀랄 만도 하다.
벙어리라 생각했던 남자의 말문이 갑자기 트였으니까.
의아해하는 리오나에게 짧게 답을 해 줬다.
“원래부터 말할 수 있었어.”
“그럼 왜 벙어리인 척 연기한 거야?”
“낯을 가려서.”
“……뭐?”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쑥스러워서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되거든.”
“전혀 쑥스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
나도 알아,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거.
그래도 좋은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된 배경부터 주야장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너랑 이야기를 하려면 친밀도라는 걸 올려야 하는데, 그 친밀도를 올리기 전까지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믿을까?
믿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말해 봤자 정신병자 취급만 할 거 같았기 때문에 일부러 말을 아꼈다.
초면부터 정신병자 취급받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침묵이 마냥 답은 아니다.
여기선 그냥 어영부영 넘기는 편이 좋아 보였다.
“그냥 체질이 그래. 이해 안 되겠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겨.”
“뭐…… 세상에는 여러 가지 현상이 있으니까. 알았어.”
그러려니 하고 넘겨 버리는 리오나였다.
리오나가 꼼꼼한 성격이 아닌 걸까?
여하튼 큰 의심 없이 그냥 넘어가 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땡큐’였다.
“그래서, 나한테 말을 걸어온 이유가 뭔데?”
곧바로 본론을 꺼내는 리오나.
전부터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계속 표한 이유가 궁금했었나 보다.
하긴, 말도 못 하는 내가 자꾸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니까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나 같았어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아니, 그냥…….”
무엇 때문에 리오나에게 말을 걸게 되었는지 생각을 안 해 둔 것이다.
리오나에게 접근한 이유는 명확히 존재했다.
그녀가 단역이라는 인물 등급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1년 뒤, 라스와 만나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걸 내가 말해 준다고 한들 리오나가 믿어 줄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럼 다른 이유를 말해야 하는데……. 또 핑계에 둘러대기인가? 오늘따라 엄청 바쁘네.
“……그냥 말을 건 건 아닐 테고.”
리오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험하다.
괜히 이러다가 친밀도가 하락하기라도 한다면, 난 다시 리오나 한정으로 벙어리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생각해라, 나야.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캐릭터가 어떤 대사를 할지 상상해!
넌 편집자잖아!
읽었던 판타지 소설책은 셀 수도 없을 정도라고!
“……!”
그래, 그거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