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첫 원정대 (2)
소설 속에 존재하는 인물 등급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가장 아래 단계가 엑스트라, 그다음으로 단역, 조연, 주연, 마지막으로 주인공 등급까지.
이렇게 다섯 단계로 분류됨을 최근 알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 묘사조차 안 되는 시골 도시, 아스툰.
그리고 딱 한 줄 언급되는 도시, 갈로아.
솔직히 이곳에서 엑스트라보다 더 높은 인물 등급을 지닌 캐릭터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막상 여기에 오긴 했지만, 기대감이 크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눈앞의 여성을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올림머리 스타일을 고집하는 전형적인 미인.
여성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복장이 범상치 않았다.
플레이트 보호대를 팔과 다리 그리고 가슴 부분에 착용한 상태.
허리춤에는 단검 한 자루와 레이피어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일반인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성은 내게 물었다.
“블루로즈 B팀 대장, 리오나입니다. 제 부하와 트러블이 있었던 거 같은데……. 어떤 상황이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잘못한 쪽이 나로 판명되면, 그 즉시 나에게 검이라도 겨눌 기세를 뿜어 댔다.
하지만 내 관심은 이 협박 아닌 협박보다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리오나
-인물 등급 : 단역
-종합 능력 : B
-라바인 전투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B팀 대장으로 승격된 여성.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름을 보고 이제야 알아차렸다.
리오나.
그녀는 1권 중반부에서 라스와 오해가 생겨 서로 검을 겨눴던 인물로 등장한다.
라스가 자신들이 쫓던 타깃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녀가 소속되어 있는 ‘블루로즈단’이라는 건 소규모 용병 조직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라바인 전투에서도 꽤나 활약한 엘리트 용병 조직이다.
리오나에 관한 정보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리오나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놓쳐서는 안 되는 만남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신고받고 출동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갈로아 치안 부대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리오나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남자들은 거구를 들쳐 메고 자리를 떴다.
리오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리오나를 불러 세웠지만, 이미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지.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는 수밖에.
* * *
병사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고 나서야 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노점상이 증인이 되어 준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렸다.
치안을 위해 노력하는 건 좋지만, 그래도 방금 전의 일은 내게 있어선 악재로 작용했다.
블루로즈단을 쫓아야 한다.
후에 블루로즈단은 소설 속에서 생각보다 자주 언급되는 용병 조직으로 나온다.
저들과 같이 다니면 주인공 일행과 엮일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갔는지 알면 좋을 텐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중, 아까 낮에 겪었던 일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나에게 쓰러진 거구의 남자는 본인들이 소속되어 있는 용병단, 블루로즈에 맞게 파란 장미를 사려 했다.
장미를 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터블에 꽃을 놓기 위해서.
그렇다는 건 그들은 다시 이터블로 돌아온다는 뜻이 아닐까?
곧장 갈로아 마을의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와 거구의 실랑이가 벌어진 지 3시간이 지난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그런지 사람들은 실랑이가 벌어지기 이전처럼 조용히 이터블 앞에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리오나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서 ‘저기요!’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을 수차례 벙긋거려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리오나가 나를 눈치채기 전에 일단 후퇴했다.
뒤로 물러선 다음에 다시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이 ‘아아.’라고 목소리를 내 봤다.
“아아아. 뭐야, 정상이잖아?”
그런데 아까는 왜 목소리가 안 나왔대?
처음 단역 등급을 가진 인물을 만나서 당황한 걸까?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리오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하나 문제는 되풀이되었다.
“…….”
이번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왔다 갔다 하는 내 기척을 알아차린 리오나.
나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는 반응으로 보아 내가 누군지 기억나는 모양인 듯하다.
“당신, 아까 그 사람이죠?”
“…….”
‘맞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탓에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젠장, 갑자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입은 움직이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리오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
그건 내가 묻고 싶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설마 용신단과 관련이 있나? 아니면 단역 캐릭터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페널티라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 무렵.
이런 문구가 내 앞에 등장했다.
-리오나(단역)와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친밀도를 올리거나, 리오나와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서 개연성을 높이세요.
이런 빌어먹을!
누가 소설 속 아니랄까 봐 개연성을 겁나게 따지네!
‘하긴, 솔직히 리오나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내가 여기서 그녀에게 말을 걸게 되면 개연성에 어긋나는 행동이긴 하다.’
만약 내가 작가로부터 원고를 받아 교정 교열 작업을 한다고 칠 때, 이런 장면이 나온다면 분명 개연성 문제를 지적했을 것이다.
아르헨이나 벤디, 아스툰 마을 사람들의 경우에는 내가 벤디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일 덕분에 이미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진 상태였다.
관심은 곧 호감, 즉 친밀도다.
덕분에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다.
하지만 리오나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가 단역 캐릭터라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말을 걸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납득은 간다.
납득은 가지만…… 뭔가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다.
‘어쩔 수 없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도중에 리오나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한테 볼일이 있어서 절 찾은 거 아닙니까?”
“…….”
맞는데요.
그런데 지금은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목소리를 봉인당해 버렸네요.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해결책을 마련하고 올 테니까요.
* * *
블루로즈단과 엮일 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 거구의 남자와 트러블을 일으킨 것만으로는 개연성이 부족한 듯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보다 블루로즈단은 왜 이곳에 와 있는 걸까?’
블루로즈단은 라바인 전투에서 대활약한 대표적인 용병 집단 중 한 곳이다.
소규모 용병 조직이긴 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곳 변두리 도시까지 온 것일 텐데…….’
그 이유를 알아내기로 했다.
혹시 몰라 친분을 다져 둔 인물이 있었다.
제육볶음 아저씨.
그 사람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서 오…… 음? 아까 그 청년 아닌가?”
“맞아요. 아저씨가 만들어 준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또 왔네요. 안 그래도 곧 저녁 시간이기도 하고요. 근데 자리가 많이 비네요?”
“우리 가게가 저녁 타임에는 인기가 없는 편이거든. 술을 안 팔아서 그런가……. 흠.”
우리 가게는 왜 손님이 없을까.
가게를 꾸려 가는 데 있어서 늘 있는 고민이다.
뭐, 아저씨의 고민 따위를 들으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니까.
곧바로 본론을 꺼내도록 하자.
“혹시 여기에 블루로즈 단원들이 온 적이 있나요?”
“있지. 엊그제 점심때 왔었을 거다.”
역시나였다.
그나저나 엊그제 점심때라 함은…… 적어도 블루로즈단은 이곳 갈로아에 최소 3일 이상은 머무르는 중이란 뜻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 필요가 있나?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일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혹시 그 사람들이 왜 갈로아에 머물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뭐냐, 정보가 필요한 거야?”
“아니에요. 밥 먹으러 온 김에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에요. 아니면 먼저 주문부터 할까요?”
“상관없어. 그보다 대답부터 해 주마.”
친절한 아저씨다.
친밀도를 높인 보람이 있다.
“라바인 전투 때 벨라시오닉이 부리던 몬스터 군단이 있는데, 벨라시오닉이 사라지고 난 뒤에 몬스터 몇 마리가 여기저기서 막 날뛴다는 소문이 돌더라.”
벨라시오닉이라는 통제 수단이 없어졌으니,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몬스터가 생기기 마련이다.
실제로 《델리피나 전기》 초반에 주인공 라스가 미쳐 버린 몬스터들을 제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라바인 전투가 《델리피나 전기》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갈로아에도 그런 몬스터가 있는 겁니까?”
“나는 직접 본 적은 없는데 목격담은 많더라고. 영주가 알아서 군대를 몰고 토벌하려고 했다가 몬스터들한테 호되게 당하고 돌아왔다는 말도 들었어. 영주가 생각한 것보다 몬스터가 많다고 하더라고.”
“감당이 안 되니까 용병 조직을 고용한 거로군요.”
“정황상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어디까지나 이건 내 추측이고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없어. 내 인맥이 넓은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미안해.”
“아니에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걸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표현이었다.
아저씨 덕분에 개연성 확립을 위한 작전이 머릿속에 절로 구상되었다.
* * *
다음 날.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이른 아침, 벽보 하나를 발견했다.
몬스터 퇴치를 위한 원정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이었다.
공고문에는 블루로즈단 B팀도 함께한다는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었다.
블루로즈단이 함께한다는 말 덕분에 원정대에 지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이 늘었다는 말을 지나가면서 몰래 들었다.
블루로즈라…….
리오나라는 용병과 어떻게든 개연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야 리오나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도착한 곳은 바로…….
원정대 인원 모집 현장이었다.
미리 작성한 지원서를 내밀었다.
“원정대에 참가하고 싶어서 왔습니다만.”
이것은 내게 있어서 출사표였다.
동시에 리오나와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첫걸음이었다.
그녀와 같이 작전에 임한다.
그러면서 친밀도를 점차적으로 올려 간다.
이러면 개연성이 확보되지 않을까?
그러나 지원서를 받는 직원의 눈길은 심상치 않았다.
마치 나를 멸시하는 듯한 그런 눈빛을 했다.
왜 나를 이런 눈으로 보는지.
이유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무기는 휘두를 수 있나요? 검 한번 휘둘러 본 적 없는데 그냥 호기심으로 참가하려는 건 아니겠죠?”
생긴 게 이렇다 보니 자주 오해를 받곤 했다.
귀족 자제처럼 생긴 미청년이 이런 곳에 지원을 하니까 접수 담당으로서 한 번쯤은 의심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해는 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이런 무시를 받으니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