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5화 (5/240)

# 5

소설 속으로 (4)

마을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기에 1시간이면 웬만한 건 다 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주민들은 나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 후, 벤디를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왠지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엑스트라 영웅이라…….’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중간에 이상한 모양새를 한 건축물이 보였다.

마치 고온에 녹아내린 듯한 그런 형상이었다.

“저 집들은 왜 저런 겁니까?”

벤디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화재라도 났었나?’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주변 경관이 뭔가 맞물리지 않았다.

집만 녹아내렸다.

만약 화재가 벌어졌다면, 주변에 그을린 자국이 여기저기 발견되었을 것이다.

불에 탄 게 아니라 마치…….

“고온의 물체에 닿아서 녹은 것처럼 보이네요.”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입 바깥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벤디가 작게 감탄했다.

“역시 로인 님입니다. 바로 알아맞히셨군요.”

“네? 뭐를요?”

알아맞히다니. 내가? 하나도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라바인 전투가 있었잖아요? 정확히는…… 1주일 전이었죠.”

“1주일이나 흘렀어요?”

“네, 거기서 발생한 화염 폭풍의 여파가 이곳 아스툰까지 미치더라고요. 갑자기 마을 외곽 벽이 녹아내려서 놀랐어요. 그 때문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제법 심한 화상을 입었죠.”

인명 피해까지 속출했구나.

화염 폭풍의 여파가 크긴 컸나 보다.

그보다 라바인 전투 이후 1주일이나 지난 상태라니…….

그렇다면 나는 그 화염 폭풍에 휘말린 채 1주일 동안 정신을 잃은 채 산속에 쓰러져 있었다는 뜻 아닌가?

만약 용신단을 먹지 않았더라면 난 틀림없이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1주일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버텼으니 말이다.

아니지, 강물 위에 둥둥 떠 있었으니까 물은 원 없이 많이 마셨겠구나.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가장 먼저 확인했어야 할 것을 이제야 물었다.

나도 참 바보 같다.

벤디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친절하게 답해 줬다.

“켈타력 209년 3월 29일입니다만.”

딱 라바인 전투가 일어난 해였다.

그리고 1년 뒤, 《델리피나 전기》의 프롤로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직도 기억난다.

프롤로그에는 주인공인 라스가 몬스터 군단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무적의 포스를 자아내며 등장하는 이야기로 꾸며진다.

그것을 본 순간, ‘아, 먼치킨물이구나.’라고 깨달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는 뭐…… 솔직히 재미없었다.

그래서 카인이라는 작자가 나에게 이 글, 당신이라면 잘 수정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본 건가?

아니, 하지만 내가 받아들인 수정의 의미는 교정 교열, 윤문 단계라고.

소설 속으로 들어와서 이야기를 뜯어고칠 거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는데.

골치가 아프다.

생각이 잠시 다른 곳으로 새어 버렸군.

“로인 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컨디션이라도 안 좋아지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아져서요.”

많을 수밖에 없다.

1년 뒤에 《델리피나 전기》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전에 내가 해야 할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주인공을 찾아갈까? 그런데 라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모르잖아? 특징 몇 개만 알고 있을 뿐.’

사진으로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기에 잘 모른다.

소설은 한계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의 한계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벤디에게 물었다.

“라스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라스요?”

“예, 여기 소설의 주인공…… 아니, 능력이 무지막지하게 좋은 젊은 남자인데요. 주 무기로 롱 소드를 휘두르고 다니고, 성격은…….”

이것저것 설명을 들려줬다.

2권까지 읽으면서 얻었던 라스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다 들려줬지만, 들려온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죄송해요. 저는 모르는 사람이네요.”

하긴, 그렇겠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만약 벤디가 라스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면, 인물 등급이 엑스트라로 판정되진 않았을 것이다.

나도 엑스트라니까 할 말은 없다만.

* * *

아르헨의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내 머릿속은 계속해서 바쁘게 회전했다.

이 빌어먹을 소설 속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우선 한 가지 전제가 깔려야 한다.

소설 속 세계가 망하면 안 된다.

그러면 나도 여기서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라스가 모험을 떠나게 된 계기가 있다.

라바인 전투 사건 이후,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손에 얻게 된 악의 세력들이 델리피나를 지배하려고 든다.

즉, 세계 멸망이다.

이들을 막기 위해서 라스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결국 《델리피나 전기》라는 소설의 출발점은 라바인 전투다.

벨라시오닉이 남긴 보물은 델리피나 대륙 전체를 크게 뒤흔드는 근간이 된다.

일단 라스를 찾아내서 이 소설 속 세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이것이 내가 소환된 목표일 것이다.

《델리피나 전기》가 해피엔딩인지 배드엔딩인지는 모른다. 설령 배드엔딩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야기를 뜯어고치면 된다.

적어도 나, 강시언……이 아니라, 로인이 무사히 살아남는 엔딩으로!

이래 봬도 편집자 아니겠나! 원고 수정에는 자신이 있다.

원래 원고를 수정할 때에는 작가에게 작가 수정 원고라는 걸 보내 줘야 한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원고라는 형태가 없으니 상관없겠지.

그리고 라스를 따라다니다 보면 소설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힌트 같은 걸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인이 내게 바라는 건 교정 교열이었다.

올바르게 원고를 고쳐 줄 수 있는지 내게 물었다.

그 말은, 이 세계의 이야기를 올바르게 정립시키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목적을 달성했으니 다시 나를 본래 세계로 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추측에 불과하다.

우선 정보를 얻어야 한다.

라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주인공과 가까울수록 캐릭터 등급이 정해진다.

즉, 어떻게든 주인공과 엮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주연급 등급을 찾으면 된다.

같이 엮이다 보면 라스를 만나게 될 테니까.

높은 등급의 캐릭터를 찾기 위해서 우선은 아스툰이라는 마을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엑스트라들만 모인 시골에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

때마침 마당에서 아르헨이 하인들과 화단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로 저택을 나섰다.

“아르헨 님!”

“오, 로인 님! 무슨 일이십니까?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요?”

벤디와 마찬가지로 아르헨은 나에게 굉장히 호의적이다.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줄 터.

“큰 도시로 가고 싶은데. 혹시 아스툰 근처에는 없나요?”

“큰 정도는 아니지만, 아스툰보단 규모가 큰 도시가 하나 있습니다. 갈로아라는 곳인데…… 그쪽에 볼일이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죠. 마침 2일 뒤에 갈로아에 들를 일이 생겨서 길을 떠나려던 찰나였습니다.”

갈로아.

들어 본 적이 있다.

큰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변방에 위치한 도시 중 가장 발달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주인공 일행이 여행을 하면서 어느 도시로 갈지 방향을 잡는 회의를 하던 때에 갈로아라는 도시가 있다는 언급이 아주 잠깐 나온다.

작중에 등장한 이력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니까 가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소설 속 내용을 아니까 이런 건 편하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로인 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하하!”

-띠링! 아르헨과의 친밀도가 +25 상승했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르헨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미인이라면 몰라도, 아저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싶진 않은데.

‘그보다 친밀도라는 시스템이 있나?’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

제아무리 소설 속이라 하더라도 인간관계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보아하니 나중에 가면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아무튼 갈로아라는 도시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갈로아라…….

잠깐 언급만 되었던 도시다.

‘그렇다는 말은 적어도 1, 2권 내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도시임을 뜻하는데…… 뭐, 가 보면 알겠지!’

* * *

갈로아로 떠나기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

고작해야 2일에서 3일 정도밖에 머무르지 않았던 아르헨의 저택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정이 들어 버렸다.

벤디도 나와 헤어지는 걸 굉장히 섭섭해했다.

“꼭 가셔야 하나요?”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게 물었다.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떠나야 한다.

난 소설 속에서 계속 머무를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눈앞의 행복에 안주해선 안 된다.

“죄송합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쉽네요.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러 주셨으면 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이곳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다시 만나죠.”

기약 없는 약속을 남겼다.

‘나란 남자, 나쁜 남자…….’

아르헨과 내가 타고 갈 마차가 저택 앞에 섰다.

마부와 아르헨, 그리고 아르헨을 따르는 집사 한 명과 나.

이렇게 총 네 명이 갈로아로 떠날 예정이었다.

벤디가 자신도 같이 가고 싶다고 아르헨에게 졸라 댔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아르헨이 부재중일 때 벤디가 대신 영주 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로인 님!”

벤디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두 번째 마을로 향했다.

* * *

마차는 아스툰을 떠나 꼬박 2일을 달렸다.

넓은 평야 덕분에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한 도시.

아르헨이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아스툰보다는 컸다.

저곳에 가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도시에 도착했을 때, 아르헨은 내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이거 받으시기 바랍니다, 로인 님.”

“이게 뭡니까?”

“보시면 아실 겁니다.”

주머니를 열어 안을 살폈다.

금색으로 치장된 주화들이 꽤 들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로인 님이 제 아들을 구해 주셨는데, 제대로 된 사례금을 드린 적이 없더군요. 여행하시는 데 도움이 되시라고 일부러 두둑하게 넣어 뒀습니다.”

“돈까지는 안 주셔도 되는데…….”

이건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땡전 한 푼 없는 거지다.

돈이 필요하긴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때마침 아르헨이 사례금을 주니 숨통이 트였다.

친밀도가 높아서 이런 선물을 주는 걸까? 괜찮네, 친밀도라는 거.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은혜라니요! 저는 사례를 한 것뿐입니다. 아무쪼록 평안한 여정이 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아르헨 님도요. 하시는 일 다 잘 풀리시기를.”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 주며 우리는 이별의 순간을 맞이했다.

아스툰에서 델리피나의 사정에 대해 대강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시기가 《델리피나 전기》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기 1년 전의 시점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1년.

이 시간 동안 나는 주인공 라스를 찾아내야 한다.

찾아서 카인이라는 작자가 원하는 교정 교열, 즉 이야기의 올바른 정립을 완성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미션 클리어로 다시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힘든 일이 되겠어.”

이 넓은 대륙에서 주인공 라스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