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소설 속으로 (3)
아스툰으로 향하는 길.
그동안 나는 벤디라는 소년에게 집요한 질문을 받았다.
어째서 산골짜기에서 알몸으로 활보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무지막지한 힘은 어디서 난 건지.
자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한다.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고 버프 아이템을 몸에 두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다수의 산적들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모습은 난생처음이라고 한다.
거기에 대해 난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나도 처음이라고.
키보드와 마우스만 만질 줄 알았던 내가 어떻게 이런 괴력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나마 마지막에 삼켰던 알약, 용신단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 가야 한다.
이제는 내가 질문을 할 차례다.
상대는 영주의 외동아들이다.
천한 신분은 아니었기에 나이가 어려도 일단 존댓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됩…….”
“로인 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출신은요?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
이 녀석 봐라?
일방적으로 질문만 해 대네.
내가 무슨 질의응답 자판기인 줄 아나!
“어디서 왔는지는 잘…… 아니, 카인이라는 작자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카인.
《델리피나 전기》를 쓴 작가다.
그 작가로 인해 나는 본의 아니게 죽을 뻔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카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벤디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뭐지?
내가 말이라도 잘못했나.
“방금 카인 님이라고 하셨어요?”
“‘님’이란 존칭은 사용한 적 없습니다만, 이름은 카인 맞습니다.”
“설마 예언자 카인 님요?”
“예언자요?”
“네! 델리피나의 모든 일을 다 꿰뚫고 계시는 분이에요! 그분이 남긴 예언서가 있는데, 지금 그 예언서대로 다 맞아떨어져 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분 덕분에 벨라시오닉이라는 재앙도 미리 대응할 수 있었고요. 카인 님 아니었으면 델리피나 전체가 다 벨라시오닉에 의해서 쑥대밭이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종적을 감췄다고 하더라고요. 예언서와 함께요.”
“잠깐만요, 혹시 그 예언서라는 게…… 몇 권으로 되어 있나요?”
“권수는 다섯 권이라고 들었어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제목은요?”
“《델리피나 전기》라고 하던데요?”
“…….”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과거로 돌아가서 《델리피나 전기》가 재미없다고 2권까지만 읽은 나를 때려죽이고 싶어졌다.
* * *
아스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주 훨씬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나는 또……. 영주라고 해서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일 줄 알았건만.’
생각했던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하기야, 이런 산골짜기에 있는 곳이 도시라 불릴 만큼 큰 곳은 아니겠지.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1, 2권에서도 아스툰이라는 마을은 등장하지 않는다.
후속 권에서 아스툰이 등장할지 안 할지는 잘 모른다.
왜냐하면 난 2권 이후로 책을 읽지 않았으니까.
“이쪽이에요.”
벤디가 나를 손수 안내했다.
벤디의 아버지, 아르헨이 거주하고 있는 영주 저택이었다.
벤디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나 혼자만 덜렁 남겨 두고 어디론가 사라진 벤디.
아버지라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이름이 아르헨이라고 했던가?’
그랬던 걸로 기억난다.
문이 열리자 체격 좋은 남자가 벤디와 함께 등장했다.
‘저 사람이 아르헨이라는 자인가?’
다부진 체격에 구릿빛 피부, 그리고 짧은 머리.
아무리 봐도 한 마을의 영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가 아는 귀족 이미지가 아니다.
노가다를 하다가 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턱시도를 차려입고 등장한 그런 느낌이었다.
“자네가 우리 아들을 구해 줬군. 이름이…… 로인이라 했나?”
“예, 영주님.”
“정말 고맙네.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네!”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아르헨.
동시에 아르헨이라는 캐릭터에 관한 정보가 갱신되었다.
-아르헨
-인물 등급 : 엑스트라
-종합 능력 : F
-아스툰 마을의 영주. 젊은 나이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탓에 외동아들 벤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마을 주민들에겐 ‘아들 바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르헨의 등급은 엑스트라.
다시 말해서 아스툰이라는 마을은 《델리피나 전기》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지역이란 뜻이 된다.
만약 아스툰이 《델리피나 전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핫 스팟이라면, 아르헨은 엑스트라 취급 따윈 받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 단역 등급 정도는 받았을 터.
‘여긴 영향가가 없는 지역이겠군.’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이곳 사람들은 다 엑스트라들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 마을에 계속 있으면 풍파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뜻도 되는데.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무조건 이 세계에서 탈출한다!’ 그것이 내 목적이다.
그 전에 우선 델리피나라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더럽게 재미없는 원작 속 세계관이 어떤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침 아르헨이 내게 물었다.
“아들을 구해 준 보답을 하고 싶은데. 혹시 바쁜 게 아니라면 잠시 아스툰에 머무를 수 있나? 숙식은 내가 다 제공해 주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덥석 받아들이면 없어 보일 것 같아서 한 번은 튕겨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얌전히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잠깐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라니! 가당치도 않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쉬었다 가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명색이 생명의 은인인데, 이 정도 보답은 받아야지. 암, 그렇고말고.
* * *
아르헨의 저택에 머물면서 델리피나에 대한 기초 상식들을 알아보기로 했다.
복잡한 건 없다.
현금 단위라든지 법률 같은 것만 대충 알아 둬도 많은 도움이 된다.
하나 이런 것보다 먼저 신경 써야 할 점이 있었다.
전신 거울 앞에 마주 섰다.
내 정보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로인
-인물 등급 : 엑스트라
-종합 능력 : B
-이름 없는 소년 병사. 원래는 벨라시오닉의 화염 폭풍으로 인해 죽을 운명이었으나, 죽기 직전 벨라시오닉의 보물 중 하나인 용신단을 섭취함으로 인해 드래곤의 육체 능력을 손에 얻고 생존에 성공했다.
-용신단으로 인해 고유 패시브 스킬, ‘드래곤의 육체’ 효과 발동 중.
‘드래곤의 육체라니…….’
아직 실감이 잘 안 났다.
델리피나 세계관에서 드래곤이란 존재는 굉장히 특별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벨라시오닉은 인류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웠을 정도로 강력한 드래곤이었다.
그런 드래곤의 육체 능력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으니, 이건 예상외다.
혹시 나, 먼치킨 된 거야?
“소설에서도 이런 내용 전개는 없었는데…….”
로인이라는 캐릭터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3권 이후에는 등장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다만.
여하튼 살기 위해 억지로 먹었던 약이 내게는 기연이 된 셈이었다.
엑스트라 주제에 종합 능력치가 B급이라니.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검조차 쥘 줄도 모르는 편집자 나부랭이였던 나지만, 용신단으로 인해 그래도 허무하게 죽진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산적들을 제압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직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나인데도 놈들을 쉽게 제압할 정도였다.
어쩌면…….
“내가 확 주인공 해 버려?”
아니, 그건 무리다.
《델리피나 전기》의 주인공은 라스라는 인물로 정해져 있다.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태생이 엑스트라면 무슨 소용이랴?
일단 내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죽음의 위기 속에서 얻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새로 얻은 능력은 나중에 차츰 알아 가기로 하고.
우선은 마을을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델리피나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어졌다.
저택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바로 나를 알아봤다.
“안녕하세요, 로인 님!”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광장으로 가면 볼 게 정말 많아요! 한번 둘러보세요.”
“모르시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저희에게 물어보시고요!”
마주하는 사람들마다 굉장히 친절했다.
내가 벤디를 구해 줬다는 소문이 벌써부터 쫙 퍼진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아르헨은 아스툰 주민들에게 존경받는 영주였다.
위에서 펜대만 굴리면서 지시만 내리는 게 아니라, 일손이 부족하면 스스로 주민들과 같이 작업에 뛰어들 정도로 열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 이의 외동아들을 내가 구해 줬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단번에 호감을 얻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심지어 어느 음식점은 내가 머무르는 동안 무료로 음식을 제공해 주겠다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이대로 이 마을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아니,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
내 궁극적인 목표는 소설 속 세계에서 빠져나가 현실로 되돌아가는 거다.
아무리 용신단을 먹고 강해졌다고 하나, 매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판타지 세계보다 법률로 안전하게 보호받는 현실 세계가 더 낫다.
어떻게든 현실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음, 고민이다.
소설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가는 방법도 분명 존재할 터였다.
가장 큰 힌트는 역시 《델리피나 전기》 소설책 원본이다.
“왜 2권까지만 읽다 만 거냐, 진짜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쉽다.
재미가 더럽게 없어도 완결 권까지 다 읽어 둘 걸 그랬다.
나날이 늘어 가는 한숨.
그냥 저택으로 들어가서 잠이나 잘까 하던 찰나였다.
“로인 님!”
소년의 목소리가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르헨의 외동아들, 벤디였다.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저택으로 돌아가려고요.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잠이나 잘까 하던 찰나였거든요.”
“그러면 제가 주변을 안내해 드릴게요.”
아스툰을 잘 아는 이가 가이드를 자처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부탁 좀 할까요?”
“네!”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이끄는 벤디.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의 전체적인 경관은 나쁘지 않았다.
힐링받는 느낌이랄까.
이 순간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세계에 들어온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